학력고사 보던 시절

in #kr5 years ago

최단시간 시험장 탈출 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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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12월 22일인가 그랬을 겁니다. 대통령 선거 1주일 가량 뒤였고 크리스마스 직전이었습니다. 제가 대학 입시를 치르던 날이었죠. 하필이면 그 해 입시 제도가 바뀌어 선지원 후시험으로 지원 학교에 가서 시험을 봤습니다. 그래서 인근 학교가 아니라 무슨 과거 보러 가는 시골 선비가 돼 괴나리 봇짐같은 가방에 총정리 문제집 집어넣고 서울행 기차를 타야 했습니다. 그때 기차 안에서만 몇 명의 초등, 중등 동기들을 만났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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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때 전교 1등을 하던 친구도 있었는데 그 녀석이 저를 보고 놀랐습니다. “니도 서울 가나.” 아 그냥 한 대 쥐어 박아 버리고 싶었습니다. 확 마 신림동 가다가 버스에 빵꾸나 나라 저주를 속으로 퍼붓고 돌아서는데 아리따운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아 니도 서울 가네.” 초등학교 동기 여학생이었습니다. 경상도 사람들은 압니다. 거의 같은 이 말이 억양에 따라 어떻게 뜻이 천양지차로 바뀌는지. 전자는 “너 따위가 서울 가냐.”이고 후자는 “아 너도 나랑 같이 서울 가는구나. 서울에서 보자” 정도까지 함유한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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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 친척집이 있어 자주 오긴 했지만 그래도 서울은 낯선 도시였습니다.학교 인근에 숙소를 잡고 저녁을 든든히 먹은 뒤 엎드려 책을 폈습니다. (따로 책상이 없어서) “일찍 자는 게 좋지 않겠니?” 어머니가 말씀하셨을 때 아주 결연하게 대답했죠. “뭐 잠도 안오는데요 뭐.” 어머니가 잠깐 씻고 나오셨을 때 저는 침을 한강처럼 흘리며 코를 백운대처럼 드높게 골면서 자고 있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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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일날 아침. 어머니가 뭔가를 내미십니다. 우황청심원이었죠. “반 알만 먹어라. 다 먹으면 졸릴 수도 있단다.” 평생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먹어 본 우황청심원이었는데 제 개인적인 소견으로는 매우 효과가 있었습니다. 손에 땀도 안나고 가슴이 두근거리지도 않고 마음도 착 가라앉는 것이 모의고사 때보다 더 편안히 시험지를 대할 수 있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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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교시 시험은 좀 수월했습니다. OMR 카드에 기입을 끝내고 행여 잘못되지 않았나 검수까지 다 하고도 시간이 1시간이나 남았습니다. 그런데 다 쳤다고 나가겠다고 할 생각은 꿈에도 못했습니다. 시험 시작 전, 독문과 교수님으로 기억되는 울퉁불퉁 인상의 노교수님이 시험 끝날 때까지 절대로 나갈 수 없다고 으르렁거리셨으니까요. 저는 카드를 치워 두고 학창 시절 5교시 끝난 뒤 쉬는 시간에 거의 빠짐없이 취하던 자세로 엎드렸습니다. 우황청심원 효과가 마지막으로 발휘되는 듯 잠이 솔솔 왔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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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잤을까. 갑자기 누가 제 목을 툭툭 쳤습니다. 예의 그 독문과 교수님이셨죠. “시험 다 봤나?” 아 그때 서울 말씨에도 억양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어제 새마을호에서 만났던 전교 1등짜리 녀석의 경상도 말처럼 그 속내가 딱 비치지 뭡니까. “이 한심한 놈아. 시험이나 제대로 보고 자나? 한 번이라도 더 문제를 들여다보지.”의 의미였습니다. 그래서 다 끝냈고 고칠 수도 없다고 공손히 말씀드리고 다시 엎드리려는데 또 한 번 삐딱한 어조로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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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황한 수험생은 교수님을 올려다보고 말을 더듬었습니다. “아까.... 교수님이 시험 중엔 몬나간다고 하셔..... 하셔가지고예.... 하셔가지고요.....” 교수님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랬지.” 그런데 왜 그러심 ? 표정으로 교수님을 올려다보는데 또 한 번의 삐딱선이 허공을 갈랐습니다. “코를 골면 다른 학생들이 시험을 볼 수가 없잖아. 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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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분에 저는 가장 빨리 교실을 나선 수험생이 됐습니다. 예비 소집일이나 원서 넣으러 왔을 때는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던 캠퍼스가 그제야 눈에 들어왔습니다. 이미 한기가 내려버린 캠퍼스는 스산했지만 교문 밖에는 부모님들이 여전히 열기를 품은 채 다시 아이들 맞이하기 위해 몰려들고 계셨고 학력고사 답안지를 파는 (도대체 그 정답 어떻게 누출된 거지??)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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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덜터덜 교문 쪽으로 걸어나오는데 몇 몇 대학생들이 ‘수고하셨습니다’ 류의 팻말을 들고 뭔가를 나눠 주고 있더군요. 일종의 ‘신입생 필독 도서’ 느낌의 도서 리스트였죠. <한국 민중사> 정도의 제목만 기억나지만 수십 종의 책 제목이 수동 타자에 실려 찍혔던 유인물을 손에 들고 두려움에 떨었던 (민중??? 이거 운동권이야!!!) 기억이 새롭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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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력이 부진한 사람도 아마 대학 시험 보던 날의 풍경은 잊기 어려울 겁니다. 자세하게는 아니더라도 대략적으로, 핵심적으로는 그날의 크로키를 그릴 수 있을 겁니다. 그만큼 많은 사람들의 희망과 기쁨, 그리고 아쉬움과 슬픔을 갈랐고 그 이전 몇 해의 결실과 그 이후 몇 해의 향방을 결정하는 일대 행사였으니까요. 슬몃 웃음이 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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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교수님은 갑자기 드르렁 드르렁 엎드려 코를 고는 수험생을 보고 무슨 표정을 지었을까. 주변의 수험생들은 또 어땠을까. 답안지 팔던 사람들은 어느 학원에서 나왔고 어떻게 답들을 알았을까. 타자체로 쓰여졌던 그 책의 제목들은 무엇이었으며 선배들은 어떤 마음으로 그 책들을 권했을까. 여러 가지가 궁금해지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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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하루를 위해 고생하시고 시험 연기라는 초유의 경험도 하신 ‘지진 학번’ 수험생들의 건투와 평안을 기원합니다. 아울러 그 부모님들의 노고에 위로를 보냅니다. 수험생도 힘들지만 부모 노릇도 힘들더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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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랑 비슷한 경험이 있으시네요... 저도 마지막 교시를 가장 먼저 끝내고 나와서 건물 밖에 줄지어 있던 많은 학부모들의 시선을 느끼며 저 멀리 기다리시던 아버지께 "아빠 합격" 이라고 외쳤었습니다.... 물론 전 그 다음 해에 재수학원에 등록했습니다.

이제 먼 기억속에 있는 이야기네요^^

저랑 같은 시험을 치셨군요 ^^ 전 수학을 망쳐서 점심 시간에 집에 가 버릴까 생각까지 했는데, 찍은 게 천운으로 다 맞아서 입학한 케이스 ㅎㅎ; 재수생이 유난히 많이 생긴 해이기도 했지요. 이듬해에 신입생 받으니 그 전 해에 같은 교실에서 시험치던 친구들이 보이기도..

ㅎㅎㅎㅎ 저로서는 행운의 시험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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