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밀하게 위대하게의 실사판- 7살짜리 대북요원의 사연

in #kr3 years ago

은밀하게 위대하게의 실사판 - 7살짜리 북파요원의 사연
.
스파이 영화에 단골로 등장하는 클리셰가 있지. “일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을 경우 우리 정부는 당신을 부인할 것이다.” 영화 <더 락>에서 영국인 스파이로 미국에서 활동하다가 잡힌 션 코너리는 감옥에서 수십 년을 썩지만 영국 정부는 간단히 그 ‘존재를 부인’하며 빠져 나갔던 것처럼 말이야.
.
스파이들의 세계에서는 불문율이 하나 있다고 해. “성공한 공작은 공개되지 않는다.” 남북도 마찬가지다. 남이나 북이나 엄청난 수의 공작원들을 상호 침투시켜 파괴공작을 벌이거나 지하 조직을 구축하려 들고 누군가를 포섭하려 들었지만 그만큼 많은 실패들을 했지. 이 실패가 드러날 때 양쪽 당국은 당연히 그 사실을 부인하고 우리는 관계없다고 우기게 된다.
.
전 세계 정보기관들이 가장 탐내는 공작 중의 하나는 이중간첩 공작이야. 즉 적의 스파이를 포섭하여 우리 편으로 만드는 거지. 그만큼 위험부담도 크고 투자도 많이 해야 하지만 일단 성공하기만 하면 상대방의 정보를 내 손금처럼 들여다볼 수 있으니 그보다 더 매력적인 공작은 없지 않겠니.
.
세계를 주름잡는다는 미국의 CIA도 러시아 정보기관의 이중간첩 공작에 호되게 당한 바가 많다. 그 중 대표적인 사례라면 1994년 체포된 올드리치 에임스 사건을 들 수 있겠지. 에임스는 글쎄 CIA 내부에서 러시아와 동유럽을 담당하는 고위직이었단다. 그런 그가 이중간첩이 됐으니 러시아 내 CIA의 활동망이 거덜날 수밖에 없었지.
.
우리 역사에도 그런 일은 은근히 찾아볼 수 있다. 1983년 다대포 무장공비 침투사건 때 해안으로 숨어드는 북한 침투조를 급습한 건 일반 해안 경비부대가 아니라 대북 특수부대였어. 이쪽의 이중간첩이 된 북한 스파이가 흘린 정보를 통해 그 침투 과정을 낱낱이 지켜보고 있다가 덮친 케이스였지. 세상에 알려진 몇 안되는 ‘성공한 공작’의 하나인 셈이다.
.
전쟁 이후 남북한이 서로 보낸 수만명의 공작원들(한국 정부가 공식적으로 인정한 북파 공작원 수가 7,726명이니 북한도 그보다 적지는 않을 거야.)은 분단의 비극을 가장 크게 체현해야 했던 사람들일 거야. 목숨을 걸고 휴전선을 넘나들다가 체포돼 처형되거나 ‘동지’들을 팔아 목숨을 부지했거나 그 외 말로 하기 힘든 사연들의 주인공일 테니까. 그 가운데 오늘 아빠는 심문규라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 줄까 해.
.
그는 1925년 강원도 철원에서 태어났다. 그는 일본군에 입대해 관동군으로 근무하다가 별안간 참전한 소련군의 포로가 됐다. 가까스로 탈출에 성공했지만, 이번에는 중국 공산당 팔로군에게 사로잡혀 팔로군 노릇을 하게 돼. 무슨 빠삐용도 아닌데 그는 또 탈출을 감행해 고향으로 돌아온다. 언급했듯 그의 고향은 강원도 철원.
.
오늘날 남한내 철원 땅에는 북한 노동당사가 남아 있다. 즉 전쟁 전 철원은 북한 땅이었어. 그는 철원의 인민보안대원으로 근무하다가 즉 밀주(密酒) 관련 사건에 연루돼 철창 신세를 진다. 그런데 전쟁이 터지고 철원이 수복되면서 남한편에 서서 치안대원 노릇도 했고 6사단에 입대, 수색대원으로 활약한다. 그리고 전쟁 후에는 HID 즉,대북특수부대 요원이 됐지.
.
“갔다 오면 장교 대접을 해 준다는 약속” (한겨레신문 2009년 9월 15일, 아들의 증언)이었다는데 남편이 대북특수요원이 된다는 사실은 아내에게는 막막한 벼랑으로 내몰리는 느낌이었던 것 같아. 임신 중이던 아내는 낙태를 위해 키니네를 먹었다가 그만 숨지고 말았다. 이런 아픔을 뒤로 하고 1955년 9월 20일 심문규는 아이들 셋을 처남에게 맡기고 북한 침투에 나서게 된다. (오마이뉴스 2011년 7월 6일)
,
북한에 침투해 소정의 임무를 완수한 뒤 인민군 몇 명까지 납치해 두고 귀환을 위해 배를 기다렸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배는 오지 않고 육로로 돌파, 귀환하라는 명령이 내려을 받는다 이때 납치된 인민군을 어떻게 했는지는 모르겠구나.
.
어쨌든 육로로 귀환 하던 중 심문규는 인민군에 체포됐지. 북한은 당연히 이 남한의 ‘간첩’에게 이중간첩 공작을 하려 든다. 북한 여성과 결혼해 가정을 꾸린 심문규는 이 위험한 임무를 계속 거절했다고 해. 그런데 역시 북한에 침투했다가 자수한 HID 요원들에게 천만뜻밖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
“일곱 살 난 당신 아들에게 HID가 북파교육을 시키고 있어요.”
.
이건 사실이었다. 심문규의 아들 심한운은 아버지를 만나게 해 준다는 사탕발림에 넘어가 산을 타고 바다를 헤엄치는 훈련을 받고 있었으니까.
.
아이들을 모아 놓고 살인 기계로 교육시킨다는 설정의 영화 <은밀하게 위대하게>의 실제판이 북한이 아닌 남한에서 벌어지고 있었던 거야. 심문규는 이 소식을 듣고 남파를 자원한다. 북한에서 새로 얻은 아내도 임신 중이었지만 그는 일곱 살 아들이 자신과 같은 궤적을 밟는다는 것을 참기 어려웠나 봐.
.
이번에는 북에서 남으로 휴전선을 넘은 그는 1957년 10월 6일 서울의 처남집에 도착한다. 그는 처남댁, 즉 아이의 외숙모가 겨우 HID에서 빼내 온 아들과 꿈에 그리던 상봉을 했지. 그리고 곧바로 그가 소속됐던 대북첩보부대에 자수한다. 남파돼서 한 일도 없었고, 그럴 시간도 없었으니 별 일 없을 것이라 생각했을지도 몰라. 그러나 그건 세상을, 그리고 분단을 너무 무르게 본 생각이었다.
.
대북첩보부대는 그를 1년 넘게 데리고 있으면서 정보를 캐고 남파간첩과 접선하게 해 그를 체포하는 등 이른바 단물을 다 빼먹은 다음에야 군 특무대에 넘긴다. 범죄를 저질렀다면 즉시 특무대에 넘어가야 했지만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이지. 특무대는 대충 이런 의견을 낸다.
.
“북한군에 체포돼 군사기밀을 제공하고, 북파공작원을 적발했으며, 간첩으로 남파됐으나 임무를 포기하고 자수한 자로, 공훈이 있기에 정상을 참작하여 의법 처리하는 쪽이 좋겠다.” 즉 범죄 사실은 있으나 공도 있으니 그를 참작하여 처벌하자는 것이었지.
.
처음 공소장 내용에는 다 ‘자수한 간첩’으로 돼 있었으나 첩보부대의 의견이 반영된 중앙고등군법회의에서 공소사실이 “서울시에 잠입한 후 합법을 가장할 의사로 첩보부대에 자수하였다”고 180도로 바뀐다. 즉 간첩 활동을 포기하고 자수한 게 아니라 간첩 활동을 하려고 자수했다는 주장이었고, 이를 근거로 심문규는 1961년 5월 25일 사형대의 이슬로 생을 마감하게 돼.
.
그의 죽음조차 가족들에게 알려지지 않았다. 일곱 살 나이에 아버지를 찾겠다며 북파 훈련을 받았던 아들은 거의 반세기 동안 아버지가 왜 죽었는지, 어떻게 죽었는지를 알 수 없었어. 진실화해위원회의 조사를 거쳐 2012년 심문규가 죽은지 반세기 만에 대한민국 법정은 무죄를 선고했지만 그것으로 심문규의 영혼에게, 그리고 그 가족들의 아픔에 어느 정도의 위로가 될지 모르겠구나.
.
더 놀라운 사실 하나는 심문규와 비슷한 형태로 죽어간 북파요원들이 한두명이 아니라는 거야. 36지구대(동해첩보부대) 부대장이었던 이의 증언이다. “(북파공작원들이 북한에 체포된 뒤 이중간첩 임무를 띠고) 남한에 내려오면 다시 (남한에) 귀순을 하였으며, 첩보부대에서는 귀순자들에게 북한에서 습득한 정보를 빼낸 후 처리하였다(죽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그들을 사회로 돌려 보낼 수도 없었고, 다시 교육을 시켜 북파시키더라도 북한에 다시 귀순할 것이 뻔하기 때문이었다.”
.
이 건조한 한 마디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핏물과 비명이 배어 있는지를 상상해 보기 바란다. 북파요원들은 이런 말을 들었다고 해. “체포되면 죽어라. 살면 북한의 이중간첩이 되고, 남파되면 남한에서 죽는다.”
.
그렇게 남과 북 양쪽에서 죽어간 사람들은 대관절 몇 명이나 됐고, 그 사실은 과연 햇볕을 볼 수 있을까. 우리는 아직 모르는 것이 너무나 많다. 알게 되면 더 비통해지고 기가 막히겠지만 알아야 할 사연들이 산처럼 쌓여 있다.

image.png

Coin Marketplace

STEEM 0.29
TRX 0.11
JST 0.033
BTC 63458.69
ETH 3084.37
USDT 1.00
SBD 3.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