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를 망친 지도자들 4 - 무굴 제국의 아우랑제브

in #kr4 years ago

나라를 망친 지도자들 4 - 무굴 제국의 아우랑제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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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제국이 쇠퇴한 뒤에도 몽골의 이름은 꽤 오랫동안 위력을 발휘했다. 칭기즈칸의 직계 혈통인 ‘황금씨족’이 아니면 제아무리 힘 있는 권력자라 해도 ‘칸’ 칭호를 쓰지 못했다고 해. 그래서 중앙아시아 일대를 휩쓴 티무르 제국의 창건자 티무르도 ‘칸’ 칭호를 얻지 못했지. 대신 그는 황금씨족 출신 아내를 맞아들여 열등감을 해소하려 했단다. 그 후손 중에 바부르라는 사람이 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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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아프가니스탄 지역에 있던 페르가나 왕국의 지배자였던 그는 북인도를 점령하고 1526년 제국을 세우는데 이것이 ‘무굴제국’이야. 무굴은 페르시아어로 ‘몽골’이라는 뜻이다. 아마 네게 무굴제국의 이름은 그리 친숙하지 않을 것 같구나. 이옥순 교수의 〈무굴 황제〉라는 책을 꼭 읽어보기 바란다. 이 책의 부제는 ‘로마보다 강렬한 인도 이야기’인데 읽다 보면 그 표현이 과장이 아님을 알게 된단다. 이 글도 많은 부분 이 책에 의지하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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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아시아에 뿌리를 두었지만 북인도에 터를 잡은 무굴은 인도 대륙의 끝없는 부와 인구를 바탕으로 대제국으로 성장했어. 특히 세 번째 황제인 아크바르 대제는 아버지가 거의 잃어버릴 뻔한 제국을 회복했을 뿐 아니라 백성의 대다수인 힌두교도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종교적 관용 정책을 펼쳐 칭송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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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초대 총리 자와할랄 네루는 〈세계사 편력〉에서 아크바르 대제에 대해 이렇게 얘기하고 있어. “그는 지식의 빛을 줄 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조언을 구했다. 아크바르는 토론을 좋아했으며 진리가 어떤 종교나 종파의 전매품이 아니라고 믿었던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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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크바르는 황제가 되자마자 힌두교도들에게 부과되던 인두세(무슬림에게는 부과하지 않는 차별적 징세)를 폐지했어. 강제 개종 정책도 포기했고 힌두교도들이 질색하는 암소 도살도 금지했지. 심지어 아크바르는 힌두교도와 가톨릭 신도를 자신의 아내로 맞아서도 개종을 요구하지 않았고 힌두교도 아내의 예배 의식에 동참하기까지 했어. 그의 치세하에서 비로소 힌두교도 백성과 무슬림 지배층은 무굴제국의 우산 아래 어우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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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무굴제국은 눈부시게 번영했어. 아크바르의 손자 샤자한은 새로운 수도 델리를 건설하고 1t이 넘는 금과 헤아릴 수 없는 사파이어로 조각한 ‘공작 왕좌’에서 위엄을 과시한다. 페르시아 시인 쿠스라우가 “지상에 천국이 있다면 바로 여기다!”라고 노래할 정도였지. 샤자한은 열네 번째 아이를 낳다가 세상을 뜬 아내를 위해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무덤’ 타지마할을 22년 동안 건설하며, 요즘 돈으로 환산하면 1조원 가까운 비용을 쏟아부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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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아내를 그토록 그리워한 샤자한(인도판 공민왕이랄까?)은 아내가 낳은 아들들에게 뼈아픈 뒤통수를 맞아. 형제들을 몰살하고 황제의 자리에 오른 샤자한은 일찌감치 관대한 성격의 장남을 황태자로 지목해두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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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지상천국’의 권력을 다른 아들들이 쉽게 포기할 리 만무했어. 네 아들 사이에 혈전이 벌어졌고 승리를 차지한 것은 막내 아우랑제브였어. 인도의 고대 경전 우파니샤드를 페르시아어로 번역할 만큼 인도 전통문화에 정통했던 비운의 황태자 다라 시코는 포로로 끌려왔고 델리 시민들이 슬퍼하는 가운데 목숨을 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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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크바르와 아우랑제브

코란 전체를 줄줄 외웠다는 독실한 무슬림 아우랑제브는 참수된 황태자의 머리를 자신이 칼로 한 번 더 으깬 뒤 감금해둔 아버지에게 보냈어. 아우랑제브가 아버지에게 한 유일한 배려는 먼발치로나마 타지마할을 볼 수 있게 해준 것이었는데 장남의 박살 난 머리를 받은 샤자한은 타지마할을 바라보며 “아름다운 당신이 어쩌다 저런 악마를 낳았는가”라고 절규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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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랑제브는 결코 무능한 황제가 아니었고 방탕한 황제도 아니었다. 초반 10여 년간은 매우 명철한 군주였다. 아내 묘에 막대한 재산과 세월을 쓸어 넣은 아버지와 달리, 왕비가 해준 빵을 먹고 직접 모자를 짜서 팔아 자선(무슬림의 의무)을 행할 만큼 검소했지. 후궁 수백 명을 다 폐하고 무슬림 율법에 따라 딱 네 명의 아내만 두었고, 술과 노래를 금지할 정도로 경건한 사람이기도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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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자신의 신앙에 경건한 사람이 다른 이들의 존재 가치에 무신경해지는 것만큼 무서운 일도 없단다. 아우랑제브가 즉위하면서 “아크바르와 자한기르 부자가 장려한 다원적인 문화는 시들었다. 통합성도 사라졌다. 다라 시코가 일구던 관용적이고 진보적인 정치도 죽음을 고했다(이옥순 〈무굴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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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랑제브는 아크바르 대제가 폐지한 힌두교도들의 인두세를 부활시켰어. 목적은 두 가지다. 세금을 더 걷기 위해서, 그리고 힌두교도들을 무슬림으로 개종시키기 위해서. 유서 깊은 힌두교 사원이 여럿 불탔고 그 폐허에 이슬람의 모스크가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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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금 감면을 탄원하는 힌두 백성을 마주쳤을 때 아우랑제브는 그의 코끼리를 전진시켜 그 백성을 밟아 죽인다. 이렇게 했는데도 반란이 일어나지 않으면 그게 이상한 일이겠지. 분노한 농민 반란군이 옛 수도 아그라에 있던 아크바르 대제의 묘를 약탈하고 시신을 부관참시했으며 인도 남부의 마라타왕국을 비롯한 많은 힌두 왕국이 무굴제국에 반기를 들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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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아우랑제브는 종교적 독선과 전쟁이라는 두 호랑이의 등에 탄 채 질주하는 격이 되었어. 스스로의 경건함을 남에게 강요한 끝에 저항을 불렀고, 그 저항을 진압하기 위해 이 자린고비 황제는 밑 빠진 독 같은 전쟁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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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남부 마라타왕국과의 전쟁은 무려 26년을 끌었어. 성실한(?) 군주 아우랑제브는 델리를 떠나 들판에 천막을 치고 살며 직접 군대를 이끈다. 천막이라 하니 풍찬노숙 같지만 델리 인구의 반이 수도를 떠나 황제와 함께 움직였으니 가히 움직이는 수도와 궁전이었어. 이러니 나라 꼴이 제대로 돌아갔을 리가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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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무굴제국의 부는 태양왕 루이 14세가 다스리던 프랑스의 조세 수입보다 열 배가 더 많았다. 하지만 수십 년 전쟁은 제국의 막대한 부를 티끌로 사라지게 했지. 아우랑제브는 휘하 군인들에게 월급조차 지급하지 못하는 처지가 됐어. 그가 싸움터에서 물러난 건 1706년, 88세 노인이 되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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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는 자린고비였으나 지상 최대의 낭비가로 등극한 아우랑제브는 이렇게 한탄한다. “나는 내가 누구인지 무엇을 했는지 알지 못한다. (···) 나는 제국의 보호자도 수호자도 아니었다. 가치 있는 삶은 헛된 것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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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랑제브는 결코 게으름을 피운 적이 없었어. 대제국을 다스리면서, 또 수십 년 전쟁을 치르는 와중에도 모든 관리를 임명하고 정책을 수립하는 데 여념이 없었고 심지어 작전 계획조차 본인이 짜고 명령했다고 해. 그러나 이미 무굴제국은 “자신이 소화할 수 없는 덩치 큰 동물을 삼킨 보아뱀과 같았다. 적들을 이길 수 있었으나 영원히 누를 수는 없었다(〈주간조선〉 2011년 6월20일 ‘인도, 중국과는 또 다른 대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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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아우랑제브는 스스로 감당할 수 없는 일에 성실할 뿐이었고 성실함은 그의 어깨에 더 무거운 짐만 얹어 본인이 “뭘 했는지 알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어. 그 결과 아우랑제브는 제국의 보호자도 수호자도 되지 못한 채 망해가는 나라를 물려준 암군(暗君)이 되었다. 그가 가치 있다고 생각한 것들이 사실은 하잘것없는 집착과 폭력일 뿐임을 깨달은 순간, 그는 89세 노인이었고 쓸쓸하게 죽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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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향을 잃은 성실함은 미련함일 뿐이고, 남에게 베풀지 못하는 미덕은 악덕으로 쉽게 변한다는 것. 아우랑제브의 일생에서 배워야 할 교훈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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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글 리스팀해 갑니다.
샤자한의 타지마할, 나중에 꼭 가보고 싶네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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