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훤과 황장엽

in #kr5 years ago

1997년 2월 12일 견훤과 황장엽

까마득한 옛날의 어느 날을 가정해 본다. 옛 백제의 영역에 속하지만 후백제의 견훤과 각을 세우고 고려 태조 왕건에게 베팅을 했던 나주 지역을 지키던 말단 병사가 있다고 치자. 그는 나주를 몇 번이고 공격해 왔던 후백제군과 싸우면서 몇 번이나 죽을 고비도 넘겼을 것이고, 전쟁 하나는 기막히게 잘하는 후백제 왕 견훤이 또 언제 들이닥칠지 몰라 전전긍긍하고 있었을 것이다. 더운 여름 날 이마에 흐른 땀 손으로 훔쳐내며 성 밖을 노려보고 있던 그에게 동료가 놀라운 소식을 전했다. “아 글씨 견훤이 귀순을 해 왔단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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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을 들은 병사의 반응은 100퍼센트 이랬을 것이다. “뭐가 워쩌? 겨..겨...견훤이 뭘 어쨌다고?” 확신한다. 왜냐면 1997년 2월의 어느 날, 황장엽의 망명 소식을 선배로부터 전해들은 내 반응이 그랬던 탓이다. “뭐가 어떻게요? 화,....화....황장엽이 뭘 어쨌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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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 대학 총장 14년, 최고인민회의 의장 11년, 노동당 비서 18년, 김일성의 주체 사상의 이론적 근거의 제공자이자 김일성의 철학 개인교사였던 황장엽, 북한에서 핵심적이라는 수식어도 모자라는 고갱이 중의 고갱이 인사 황장엽이 1997년 2월 12일 북경 주재 한국 총영사관에 몸을 맡긴다. 마치 철천지원수처럼 다투던 고려의 세력권 나주에 몸을 의탁했던 견훤과 같이. 망명 소식이 알려졌던 날 기자들과 함께 탔던 엘리베이터는 요란했다. 그 중의 한 코멘트는 이랬다. “이건 김종필이 월북한 거야.” 그때는 흠 그 정도겠군 고개를 끄덕였는데 며칠 뒤 워싱턴 포스트는 나의 빈약한 상상력을 일축하는 표현을 사용했다. “마르크스가 소련을 탈출하는 것 또는 토머스 제퍼슨이 미국을 탈출한 것이나 다름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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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김정일이 그를 두고 ‘가롯 유다’라고 지칭하며 배신자여 갈테면 가라 외친 적도 있지만 기실 황장엽의 망명이란 그 단어의 도덕적 의미를 배제하고 말할 수 있다면, ‘배신’이었다. 진정코 거대하고 획기적인 ‘배신’이었다. 이미 그때 나이 일흔 넷. 그냥 아랫목만 차지하고 자리 보전하면서 손주들 커 나가는 모습에 만족할 수도 있는 나이였다. 그 나이 에 그는 자신의 일생을 송두리째 부정할 수도 있는 선택에 몸을 내맡긴다. 수만 명의 목숨을 바쳐 가며 혈전을 치르고 서로 거의 죽이고 죽을 뻔한 위기를 교환했던 호적수 왕건을 찾을 때의 견훤의 심경이 그랬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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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민족을 불행으로부터 구원하기 위한 문제를 좀 더 넓은 범위에서 협의하고 싶은 심정에서 북을 떠나 남의 인사들과 협의해 보기로 하고 결심했다.” 는 것은 그가 주 중국 한국 대사관에서 작성한 자필 진술서의 망명 이유였다. 또 “인민이 죽어가고 있는데 무슨 사회주의인가?”라고 말하면서 북한의 현실을 강하게 비판했고, ‘가짜’ 주체사상의 포로가 된 이남의 학생과 노동자들에게 ‘진짜’ 주체사상을 가르쳐 주겠노라는 포부도 피력했다고 한다. 하지만 망명을 둘러싼 잡다한 코멘트들 가운데 무엇보다 공감이 가는 것은 모스크바 유학 시절 만났던 아내 박승옥에게 보내는 글이었다. “사랑하는 당신과 아들 딸들, 손주들의 사랑을 배신한 나를 가혹하게 저주해 주기 바라오. 나는 이것으로 살 자격이 없고, 내 생애는 끝났다고 생각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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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권력 투쟁에서 밀려서 그에 불만을 품고 탈북을 결행했다는 말도 있지만 그는 정권을 보좌하는 입장에 있었지 실권을 휘두르는 위치가 아니었다. 사상 투쟁이 벌어져 핀치에 몰렸다는 설도 있지만 과거 김일성이 벌이던 종파 투쟁의 희생양들처럼 몰아내기에는 그의 급수가 너무 높았다. 자신이 이룬 모든 업적과 사랑하는 가족, 그리고 자신의 역사가 담긴 조국까지 버린 데에는 그 스스로 감당하기 어려운 분노와 절망적인 환멸이 도사리고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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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도 사망하기 전 “내가 통치하는 공화국이 어찌 이렇게 됐단 말이냐?”라고 절규했다는 설이 있지만, 그 역시 “내 사랑하는 공화국이 어찌 인민들을 이리 속수무책으로 굶겨 죽인단 말이냐?”라고 땅을 치며 하늘을 우러렀을지도 모른다. 음험한 장남이 자신이 가장 아끼고 사랑하던 막내아들을 죽여 버리고 자신마저 절에 가둬 버렸을 때 견훤이 느꼈던 그 심경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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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결행하려던 망명은 중국에서야 이뤄졌다. 1997년 2월 12일 황장엽이 북경 주재 한국 총영사관에 진입한 이후 필리핀을 경유하여 한국에 들어올 때까지의 시간은 내내 초긴장의 연속이었다. 한국 외교관들까지도 골프채를 들고 황장엽을 호위했고 대사는 몇 발짝 대사관을 나서는 데에도 대사관 무관들의 엄중한 경호를 받았다. 북한은 그를 그냥 보낼 수 없었고, 남한은 사상 최대의 대어 귀순자를 털끝 하나 다치게 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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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견훤이 안전하게 송악에 들어왔듯 황장엽도 서울에 안착했다. 그리고 둘은 똑같이 자신의 필생이 담긴 나라를 부정한다. 견훤은 왕건에게 어서 불효한 신검의 백제를 쳐 달라고 호소했고 황장엽은 “김정일은 수백만 동포를 굶겨 죽이고 온 나라를 감옥으로 만든 민족반역자인데 어떻게 그와 민족공조를 하겠다는 것인가? 햇볕정책은 적을 벗으로 보고 안심하게 하며 아픔을 잊어버리고 잠들게 하는 마취약이다.” 라며 햇볕정책을 펴는 김대중 정권을 혹독하게 비난한다.

견훤은 그 뜻을 이룬다. 그는 왕건의 선봉이 되어 후삼국 마지막 대전투인 일리천 전투에 참전했고 노구의 그가 나부끼는 깃발 앞에 후백제의 용장들이 다투어 머리를 숙였다. 후백제는 마침내 무너지고 왕건은 후삼국을 통일한다. 하지만 자신의 생애와 맞바꿔 쌓아올린 나라가 사라지는 모습은 그에게 극도의 스트레스였으리라. 그는 곧 등창이 나서 세상을 떠났다. 황장엽은 그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하필이면 그가 망명한 뒤 등장한 10년의 남한 정부는 그와는 다른 대북 정책의 기조를 갖고 있었고, 그의 입지는 더 이상 넓어지지 못했던 것이다. 그리고 하필이면 2010년 10월 10일 북한 노동당 창건일에, 그리고 김씨 가문의 3대째 ‘장군님’이 열병식에 그 모습을 드러낸 날 죽었다. 그리고 그는 서로의 목을 놓고 겨루던 적수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국립묘지에, 공식적으로 ‘전향’하지는 않은 그가 달가와했을 것 같지는 않은 태극기가 덮인 채 묻힌다.

분단과 상쟁의 시기에 태어나 한 나라를 창업하고 경영하거나 그 기틀을 닦는 위업을 지녔지만,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것들을 잃고 자신이 정성을 들였던 대상에 배신당한 결과 평생의 자신을 부정하고 적수에게 몸을 내맡긴 견훤과 황장엽이 묘하게 엇갈리는 날이다. 1997년 2월 12일 북한측 인사를 감쪽같이 속이고서 황장엽의 승용차가 북경 주재 한국 총영사관으로 쏜살같이 내달렸다. 분단이 낳은 또 하나의 기박한 사연이 태어났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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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었던 역사의 스토리가 덕분에 되살아 났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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