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로호는 파로호여야 합니다

in #kr5 years ago

파로호는 파로호여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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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충일 아침, 6사단과 파로호를 떠올리며

1951년 4월 중부전선. 중공군은 대규모 병력을 동원한 4월 공세에 돌입합니다. 중공군 9병단은 화천과 가평을 잇는 선을 돌파해서 UN군의 동서를 갈라 놓으려 들었지요. 이 공세를 정면으로 맞닥뜨린 게 한국군 6사단이었습니다. 6사단 마크는 청성, 이스라엘 국기의 다비드의 별과 비슷한 모습이지요. 이 ‘블루 스타’는 6.25 전사에서 유명한 부대입니다. 전쟁 초기 춘천에서 잘 싸워 인민군의 기본 전략을 무산시킨 부대고 북진해서는 압록강 물을 떠서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낸 바로 그 부대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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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 압록강 물 뜬 바로 뒤에 미리 북한에 들어와 있던 중공군들에게 심각하게 뒤통수를 맞고 급거 후퇴하는 아픔도 있었습니다. 당시의 공포는 6사단 장병들에게 살아 있었습니다. “중공군에게 포위당하면 끝이다.”는 생각과 죽여도 죽여도 미친 듯이 올라오는 중공군들의 머리 수는 6사단 장병들의 기를 질리게 하는데 충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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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4월 시작된 ‘사창리 전투’에서 6사단은 중공군의 공격에 늑대에게 쫓기는 양떼 꼴로 후퇴합니다. 장비는 다 내던져 버렸고, 심지어 6사단을 지원하던 미군 포병대까지 그 겨를에 무너져 장비를 버리고 후퇴해야 했습니다. 이 풍경을 묘사한 미군의 기록은 무척 시니컬하죠. “Fortunately, they had outpaced their foe.” 그러니까 ‘다행스럽게도 한국군은 도망가는 데에는 선수였다.(그래서 적의 추격을 벗어났다)’ 정도로 의역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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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사단을 무너뜨린 중공군의 공격은 민망하게도 영국군 2개 대대에 의해 저지됐습니다. 이에 한국군 6사단은 웃음거리가 됐죠, 미군들은 갓댐 블루 스타! 하면서 침을 뱉았고 미군 지휘관은 이런 전문을 보냅니다. “앞으로 이와 같은 불명예스러운 기억을 지워버릴 수 있을 만큼 전장에서 활약을 해야만 나의 믿음이 되살아 날 거요.” 이 창피한 상황을 온몸으로 받아내야 했던 사람은 6사단장 장도영이었습니다. 네. 5.16 당시 민하게 굴다가 박정희에게 뒤통수 맞은 그 분 맞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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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많은 사람들의 인생을 바꿔 놓습니다. 장도영도 아마 전쟁이 없고 분단이 없었더라면 고향 신의주에서 교사로 종생했을지도 모르죠. 하지만 공산당이 설치는 사회에서 ‘성분’이 좋지 못했던 그는 38선을 넘어 남쪽에서 군인으로서 새 인생을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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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사창리 전투 이후 그는 인생 최악의 시기를 맞고 있었을 겁니다. 미 8군 사령관 밴플리트는 아들뻘 정도 되는 (당시 장군이래봐야 서른 안팎. 장도영은 스물 여덟 살) 장도영에게 묻습니다. “싸울 줄 알아?” 그때 장도영의 표현에 따르면 ‘눈에 실핏줄을 세우고’ 대들 듯 대답했다고 해. “Yes!" 의역하면 ”알어! 안다고요!” 그런데 어떤 이는 밴플리트 앞에서 장도영이 아무 대꾸도 못했다고 전하기도 합니다. 그게 중요한 건 아니겠지만.


왼쪽이 장도영. 청성 마크가 보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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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도영 장군은 6사단을 돌아다니면서 훈시합니다. 그의 회고록에는 아주 멋들어진 훈시를 한 걸로 나옵니다. 또 공식 기록도 이렇게 돼 있습니다. “‘본 전투의 성패여하(成敗如何)는 각 장병들의 보국일념(保國一念)에만 달려있다. 끝까지 진지를 고수하고 돌입하는 적을 박멸하여 부조(父祖조상)의 기대에 부응하고 아손만대(兒孫萬代자손만대)의 행복을 찾아 청성(靑星)의 전통을 세우도록 하라’하니 모든 장병들의 미간(眉間)에는 필사무패의 결의가 가득하였다.” (한국전쟁사 6권) 그를 사실로 치더라도 그의 훈시의 포인트는 아마도 이 말이었을 겁니다. “디금부터 나가 죽으라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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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갑제닷컴의 정순태 기자 기사에 따르면 평안도 사투리 억세게 쓰는 그의 훈시를 병사들은 이렇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 깍대기(껍데기)만 사람 깍대기 뒤집어 쓴 00들 나가 듁으라우. 너희 때문에 사단이 망하고 유엔군이 후퇴했어. 저기 뒤에 츄럭 두 대 보이디? 그거이 우리 사단 던 재산이야. 개지고 싶은 대로 다 개지구 가라우. 재보충은 없어. 있는 대로 가지고 개서 죽으라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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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니가 나가 죽어라 개스키야!”하는 반발이 일어나기 쉬웠겠지만 장도영은 부하들에게 신뢰를 잃어버리지는 않았던 모양입니다. 6사단은 절치부심, 미군으로부터 재무장을 지원받고 중공군 앞에 다시 나서게 됩니다. 철모에는 ‘결사(決死)’ 글자를 눌러 쓰고서. 당시 소위로 참전한 전제현 예비역 소장의 증언은 매우 생생합니다.

전장으로 가면서 대대장은 장교들을 모으고 얘기합니다. “우리가 목욕을 하겠소 세수를 하겠소. 우리 몸에 담뱃가루 하나 지니지 말고 깨끗이 죽읍시다.” 그리고는 돈, 수첩, 신분증 모든 걸 불태웠다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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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5월 18일 시작된 용문산 전투에서 6사단 2연대는 일종의 전위 부대로 중공군의 파도를 온몸으로 막게 됩니다. 원래 적당히 싸우고 후퇴해서 예비대를 형성하는 것이 전략에 부합했지만 2연대는 중공군에 포위된 채로 후퇴하지 않은 채 버텼고 여기서 중공군이 중대한 착각에 빠지죠. (이 결사항전이 어쩌다 그렇게 된 게 아니라 장도영이 2연대를 교두보 삼아 반격을 하겠다는 작전을 세우고 있었다는 증언도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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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부대가 한국군 주력이다 해. 여기에 군단을 투입한다 해.”

중공군은 2연대를 공격하는데 수만 명의 군단 병력을 쓸어 넣습니다. 황망하게도 그래도 블루 스타 2연대는 버팁니다. 전투가 치열해지면서 중대장들이 수시로 전사하거나 실종됐을 때 큰 역할을 했던 것은 뜻밖에도 정훈병들이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중대장이 여기 있다고 부르짖으면서 참호를 누비고 병사들의 사기를 북돋웠습니다. 그 중 한 정훈병은 집요하게 이렇게 외쳤다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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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대장님이 여기 계신다! 우리 부모님들이 또 짐 싸서 부산까지 가셔야겠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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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정훈병이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그는 참 핵심을 잘 짚었습니다. 죽고 죽이는 놀음의 전쟁이고 한국군의 가족이라는 것이 인민군에게 어떤 대접을 받을지도 잘 아는 이들로서 자신들이 밀리면 어떤 일이 발생한다는 것을 집요하게 찔렀던 거지요. 그는 밤새 그 외침을 수백 번 반복했다고 합니다. “너희 부모님들 또 발바닥 피나게 부산까지 걸어가게 만들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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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다른 수치심, 그리고 죽기 아니면 살기의 오기는 2연대를 끝까지 버티게 만들었고 팔팔하게 힘을 비축했던 다른 6사단의 연대들이 중공군을 찌르고 들어가면서 중공군은 며칠 전의 6사단 꼴로 허물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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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공군들은 북한강변을 타고 춘천을 거쳐 화천까지 철수하다가 미군과 한국군의 포위망에 걸려듭니다. 삼면이 포위된 가운데 화천 저수지가 퇴로를 막은 거죠. 양구쪽으로 가는 길은 미군 해병 1사단이 막아섰고 철원쪽으로 가는 길목은 한국군 6사단이 칼을 갈고 있었습니다. 한 달 전만 해도 기세등등했던 중공군 9병단 등은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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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는 한국군 부대 노무자가 지게 지고 일을 나갔다가 웬 중공군에게 지게를 지우고 유쾌하게 걸어왔습니다. 뭐냐 물어 보니 중공군이 자기에게 항복했다는 거였죠. 한국군 1개 소대가 중공군 1개 대대의 항복을 받은 기록도 있습니다. 항복도 못한 중공군들은 속절없이 대붕호라고 불리던 화천 저수지에 빠져 죽습니다. 감격한 이승만이 붙인 이름이 ‘파로호’지요. 즉 오랑캐를 격파한 호수.

전쟁은 끝난 뒤로도 수십 년 동안 이어집니다. 총성과 비명은 없다고 해도 그 전쟁 기간 죽어간 사람들의 통한과 핏값의 사연은 전쟁을 치른 당대 이후에 몇 대를 규정하게 된다는 뜻이죠. 한국전쟁도 당연히 마찬가지겠지였습니다. 그런데 정작 한국전쟁의 실체는 날이 갈수록 안개 속으로 사라지는 느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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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부터 넷플릭스에서 <베트남 전쟁> 다큐멘터리를 보고 있습니다만, 그 다큐에서는 남북 베트남 군인, 민간인, 관리, 미군, 미국 관계자 등이 풍부하게 등장해서 전쟁이라는 코끼리의 코끝부터 꼬리 끝까지 만져라도 주게 해 주죠. 그런데 한국전쟁은 여직 그런 내용의 다큐멘터리가 불가능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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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괴군의 남침과 낙동강 후퇴, 인천 상륙과 북진, 중공군 개입 한맺힌 휴전”으로 이어지는 정통(?) 노선과 소설 <태백산맥>에 등장하는 바 “민족주의 세력과 반민족 세력”의 대결로 보는 반골 시선이 워낙이 자석의 산맥처럼 서 있고 잡다한 쇳가루들을 자신의 쪽으로 끌어들인 채 반대편 발언을 용납할 생각은 서로간에 추호도 없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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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역사가 그렇겠지만 전쟁은 단순하지 않습니다. 저는 이 두 노선(?)이 조금씩 자신들의 단순함을 벗고 상대방의 입장을 털끝만큼이라도 이해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넷플릭스의 다큐멘터리 <베트남 전쟁> 반만이라도 다양한 시각에서 본 <다큐멘터리 한국 전쟁>을 보고 싶기도 합니다. 그러나 전쟁의 당사자였던 ‘나라’에 살고 있는 이로서, 그 ‘나라’를 어떻게든 지키기 위해 목숨 바쳐 싸웠던 이들을 기억하려 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승리를 수십 년 후에 ‘평화’라는 명목으로 지우는 데에 찬성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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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중공군들은 우리에게는 불법으로 남의 나라 일에 개입한 ‘오랑캐’였습니다. (뭐 북한은 미군을 그렇게 생각하겠지요. 그러거나 말거나) 그들을 무찌른 일을 전쟁의 아픔이라고 해서 지워 버릴 일도 아니고, 중국 관광객이 와서 기분 나쁠 수 있다고 바꿔 버릴 수도 없는 역사일 겁니다. 가진 돈과 신분증을 불태우면서 죽음을 각오한 장교들, ‘결사’(決死) 글자 철모에 새기고 카빈총 들고 중공군 진지로 돌격했던 장병들, “부모님들 또 부산까지 걸어가게 만들 거냐.”고 울부짖으며 동료들을 격려했던 정훈병들은 자랑스런 우리들의 아버지 세대였고, 그들 덕에 우리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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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그 전쟁의 광기에 여직 사로잡혀서 광화문을 시끄럽게 하고 있는 깃발 부대의 노망에 동조할 생각 또한 추호도 없습니다만, 그들의 역사를 굳이 무시할 필요 또한 없다고 생각하고, 그들의 자랑스러운 기억을 폄하해서도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파로호는 파로호여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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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습니다. 파로호는 파로호여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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