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독광부 1진 출발

in #kr5 years ago

1963년 12월 21일 광부 독일로 가다.

6.25 당시의 한국은 UN군으로 온 에티오피아 군인들이 죽어가는 전쟁 고아들을 보다 못해 고아원을 세우고, 필리핀 군인들이 불쌍한 나머지 눈물을 흘리던, 세계 최악, 최빈의 나라였다. 1960년대에 들어와서도 사정은 나아지지 않았다. 실업자는 넘쳐났지만 일자리는 없었고, 가난은 스모그처럼 나라를 휘감아 뒤덮었다. 돈을 벌기 위해서라면, 그리고 외화를 얻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마다하지 않았던 그 무렵, 1963년 눈이 번쩍 뜨이는 모집 구인 광고가 뭇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일단 정원은 500명, 일터는 막장이라 불리우는 탄광이었지만 그 장소가 중요했다. '독일'이었다. '독일 파견 광부 모집." 당시 "라인강의 기적"을 구가하던 독일은 노동력이 부족하여 제3세계 인력들을 무한대로 빨아들이고 있었고 장면 정권 때부터 운위되어 온 한국 광부 독일 파견이 마침내 성사된 것이다.

전국에 독일 바람이 불었다. 500명 정원에 지원자는 4만 6천 명이 몰려들었다. 그 태반은 한국 탄광 광부로 취직하라고 하면 버럭 화를 냈음직한 대학 졸업자들이었다. 혹여 얼굴이 너무 허여멀거면 떨어질까봐 검정칠을 하고 온 사람들도 있었다고 한다. 시험은 현실적이면서도 간단했다. 60킬로그램 모래 가마니 다섯 번 들어올리기. (파독광부 45년사 - 재독한인글뤽아우프회) 이 시험(?)에 통과한 인텔리 광부들 1진이 1963년 12월 21일 독일을 향한 장도에 오른다. "처자를 두고 가는 광부들은 눈물짓곤 했지만 총각 광부들은 돈벌이하러 가는 길이라 웃음을 앞세웠다."(서울신문 1963년 12월21일)

해외여행 하기가 조선 시대 백정이 경복궁 입궐하기보다 더 무망했던 시절, 난생 처음 비행기를 타고 지구를 반 바퀴 돌아 독일 땅에 떨어진 광부들의 모습은 실로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그 꼬락서니를 지켜봤던 독일인의 회고다. "처음 한국 광부들이 전세 비행기를 타고 뒤셀도르프 공항에 도착했을 때의 광경이라니…맙소사…머리엔 포마드를 반지르르 바르고 넥타이에다 카메라는 거의 한 대씩 목에다 걸고 트랩을 내려서는데…이건 관광객들인지, 비즈니스맨들인지…"(남정호 기자, 「글뤽아우프는 파독광부사에서 애환의 대명사」, 재독한인글뤽아우프회 엮음, <파독광부 30년사> 중 )

그들이 일단 배치된 곳은 북부 함본과 남부 애슈바일러 탄광이었다. 독일인들은 들어갈 생각조차 하지 않는 지하 1000미터까지 내려가고 섭씨 40도까지 올라가는 지옥의 바로 윗칸같은 막장이 초보 광부들을 맞았다. 그곳에서 한국인 광부들은 툭하면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는 감독관의 핀잔을 들으며 죽을둥살둥 땅을 파다가 동료를 만나면 "글뤽 아우프!"를 부르짖었다. '글뤽 아우프'란 (탄 캐고 올라가서) '위에서 보자'는 독일 광부들의 인사였다.

하지만 위에 올라와본들 별 수 없었다. 땅 아래에는 막장이 있었지만 땅 위에는 맘 놓고 나다니기도 어려운 새장 같은 숙소에서 향수를 달래야 하는 외국인 노동자 신세였다. 격무로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랠 소주 한 잔도 구하기 어려운 이방인 신세였다. 거의 월급의 반은 고국으로 부치고 달랑 반만 남겨 생활했다고 하니 그럴 여유조차 부족했을 것이고.

여기서 재미있는 일화 하나를 소개해 보자. '무터킨더의 독일 이야기'라는 블로그 (http://pssyyt.tistory.com/397) 에 실린 파독 광부의 이야기를 정리한 것이다. 그렇게 팍팍하고 여유없는 독일 생활이긴 했지만 한국 남자들의 알콜 집착증은 여전했다. 하지만 수중에 돈은 없고 술 생각은 간절했던 이들은 한국식 '외상'을 시도하게 되는데 그 상대가 누군가. 세계에서 정확하기로 둘째 가라면 로렐라이 언덕에서 뛰어내릴 독일인들이 아닌가. 한국 광부들은 도시 '외상'의 개념이 없던 그들을 상대로 한국적 외상 술값 제도 확립을 위한 부단한 노력에 들어갔다.

독일 주인들도 날이 갈수록 그 재미(?)를 알았다. 하도 통사정을 해서 한 두 병 내 줘 봤더니 월급날이 되면 철석같이 갚는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급기야 주인들은 아예 한국인 전용 외상 장부를 만들어 놓고 광부들에게 인심 좋게 외상으로 술을 내 주었다고 한다. 천하의 '독일 병정'들을 길들인 한국 광부들의 무용담(?)이지만 그 귀한 술을 마시면서 온몸을 내리누르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싸우며 피로를 씻어야 했을 광부들을 생각하면 사뭇 처연한 심경이 된다. 어쩌면 그들이 발휘한 신용(?)은 당연한 귀결이었을지도 모른다. 외상값을 떼먹고 달아날 데가 어디 있으며 또 무슨 방법이 있었으랴.

그들이 독일에 실려온 1년 뒤 박정희 대통령이 독일을 방문했다. 이때 박정희 대통령과 광부들의 눈물의 만남이 당시 뤼브케 서독 대통령까지 감동시켰고 뤼브케 대통령이 눈물을 멈추지 않는 박정희 대통령에게 "독일이 도와 주겠습니다!"고 약속했다는 등의 감동적인 일화가 한동안 인터넷에 회자된 바 있는데 사실과는 조금 또는 많이 다르다. 뤼브케 대통령은 그 만남에 동석하지 않았었고, 그 에피소드에 주요 배역으로 등장하는 한국 간호사들은 독일에 파견되기 전이었으며 박정희 대통령의 인간적 면모를 부각시키는 부분도 각색의 흔적이 역력하다.

그러나 모든 선입견을 배제하고 볼 때, 그 만남의 자리가 그렇게 사무적이었을 것 같지는 않다. 지지리도 못사는 나라에서 어떻게든 먹고 살고자, 또 고국의 가족의 살림살이에 보탬이 되어 보고자 지구 반대편의 나라 1천 미터 지하를 곡괭이로 두들기던 이들, "이렇게 파다가는 (지구를 뚫고) 우리 집 앞마당으로 나오겠다."고 농담하던 광부들 앞에 고국의 대통령이 나타났다면 서로 간에 어떤 심경이었겠는가. 목이 메어 애국가를 끝까지 부를 수 있었겠는가. "나의 살던 고향은"이라도 합창했다면 통곡의 바다가 되지 않았겠는가. 거기에 그 냉혹함과는 별도로 눈물은 흔하던 박정희 대통령이라면 거기에 당연히 동조했을 것이고.

한국에서보다 돈은 더 벌었을지 모르지만 파독 광부들은 결국 서럽고도 고달픈 외국인 노동자일 뿐이었다. 1965년 4월 6일 한 광산에서 일어난 파업 사태는 그 단면을 보여 준다. 독일 노동자에게 '비협조적'이라는 이유로 한국인 광부 한 명이 코뼈가 부러지는 폭행을 당하자 한국인 광부들의 대부분이 입갱을 거부한 것이다. 당시 언론 등에 보도된 한국인 광산 노동자들의 요구조건들을 보면 가슴 한 구석이 시려 온다. "외국인이라고 푸대접하지 마라!.... 폭행 가해자를 인사조치하라! 우리에게 맞는 일자리를 달라 ( 각종 장비, 작업 조건 등이 독일인에 맞게 맞춰져 있었음).... (그리고 심지어) 한국에서 온 고춧가루를 착취한 통역 (아마 한국인이겠지)은 사실을 밝히고 자진 사퇴하라." (장재림, "서독의 한국인 광부" - 신동아 1969년 5월호)

이때 독일 사업주들이 한국 광부들을 협박했던 주요 레파토리는 “계약 만료 전 한국 광부의 귀책 사유로 인하여 귀국할 때 그 여비는 본인이 부담하여야 한다”는 조항이었다. 비행기 값의 차원이 요즘과는 비교가 안되었던 시절, "꼬우면 알아서 돌아가!" 하는 으름장은 대단한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바로 21세기에 파독 광부의 아들, 조카들이 한국에 온 외국인 노동자에게 즐겨 써먹는 수법이다. 그 횡포에 무릎을 꿇기도 하고, 또는 맞서 싸우기도 하면서 파독 광부들은 독일의 탄전지대의 지하 세계를 누볐다. 그렇게 한국에서 독일로 떠나갔던 광부들의 수가 14년에 걸쳐 총 7936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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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독 광부의 아들, 조카들이 한국에 온 외국인 노동자에게 즐겨 써먹는 수법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 못 한다"더니, 예멘 난민 대하는 태도도 다름없더군요.

그걸 박노자라는 친구는 2001년에 ‘당신들의 대한민국’을 통해 ‘송곳으로 후비듯’ 짚었습니다.
舊소련에서 태어나 韓國史學을 전공하고 1991년 한국에 유학 온 친구랍니다.

‘같은 황인종’인 몽골인까지도 당연한 착취대상으로 생각하는 그들은, 피부색이 다른 ‘검둥이’들을 아예 사기를 쳐도 때려도 강간해도 무방한 ‘비인간’으로 취급했다.
……
조선시대에 조선에 귀화한 ‘오랑캐’ - 여진족이나 일본인 - 가 자식에게 교육을 시켜 출세 가도에 올릴 수 있었던 반면에, 기적적으로 귀화에 성공한 ‘동남아시아 검둥이’의 자식이 ‘잡종’, ‘트기’의 딱지를 평생 벗을 수 없는 대한민국의 현실을 생각해 보면, 역사가 과연 진보하는지 회의마저 느끼게 된다.

독일인들은 그래도 상당히..... 전향적이었습니다. 간호사들과 광부들 상당수가 독일에 정착할 수 있었던 이유기도 하죠.... 한국은.... 아이고 한국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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