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자씨만한 믿음이 있어도

in #kr5 years ago

겨자씨만큼 믿고 싶어하는 마음만 있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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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이십 년 전 일이다. 김대중 대통령 시절이었으니. 부산에서 아버지 연배의 한 어르신을 만난 적이 있는데 항만청장인가 꽤 높은 지위를 역임하시고 명예롭게 퇴직하신 분이었다. 즐겁고도 품위 있는 화제가 풍성하셨고 젊은 사람에 대한 배려도 깍듯하시고 ‘교양 있다’는 건 이런 걸 말하는구나 싶은 ‘은발의 노신사’였다. 살짝 살짝 지극히 경상도적인 정치 의식을 내보이시는 걸 제외하면 만점에 가까웠다고나 할까. 그런데 그 살짝 살짝을 슬쩍 슬쩍 넘어가 드린 것이 실수였던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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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이 부산 출신의 서울내기가 ‘우리 편’이라고 생각한 듯 싶다. 점차 ‘살짝 살짝’이 ‘쿵짝 쿵짝’으로 바뀌더니 급기야 이런 말씀을 해 왔다. “언론에 있으니 알고 있겠지마는 참 큰일이야. 북한 땅굴이 수원까지 왔다 하니.” 빈말이 아니라 마시고 있던 차를 내뱉을 만큼 놀랐다. 푸흡...... 네? 그러자 그분은 내 반응을 보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새삼스럽게 뭘 놀라나. 국민들도 알 건 다 알고 있어.” 그분은 김대중 빨갱이 정권 하에서 북한이 줄기차게 땅굴을 팠고 그 땅굴이 수원까지 왔다고 철석같이 믿고 계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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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번 예의 바른 부정 끝에 도저히 설득되거나 깨우칠 수 있는 상황이 아님을 알고서 이 정도로 대답을 마무리했다. “북한 토목 기술 세계적인데요. 서울 시내 가스관 피하고 수도관 피하고 지하철 피해서 수원까지 땅굴을 팠다? 북한을 너무 고무찬양하시는 거 같은데요.” 그때 퇴직 공무원의 답은 이것이었다. “그러게! 그놈들이 그렇게 지독한 놈들이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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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항쟁 진상규명위원회 위원으로 지만원을 추천하느냐 그렇지 않느냐를 두고 김진태랑 나경원이 다투고 지만원은 나경원에게 쌍욕을 퍼붓는 과정을 보며 그래도 나경원 어깨 위에 있는 물체가 김진태나 지만원과는 달리 고무나 플라스틱 덩어리가 아니구나 싶었는데 대신 추천했다는 공수부대 지휘관을 보아하니 짧았던 내 오해가 부끄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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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길남이라는 군바리 역시 자신이 시위 현장에 나가보니 죄 북한 사람들 소리였다고 지껄이는 아메바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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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정신 나간 탈북자 관종이 (참 관종에는 남북이 없다) 광주에 북한 특수부대가 개입했다고 ‘폭로’한 것이 ‘썰’이 되고 ‘주장’이 되고 나아가 ‘팩트’가 되는 과정을 보면 위의 퇴직 고위 공무원이 왜 ‘북한 땅굴 수원 접근론’이라는 해괴망칙한 논리를 펴게 됐는지도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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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어떤 주장을 발화(發話)하면 대개 사람들은 네 부류로 나뉘게 마련이다.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는 쪽과 반대자, 동조자, 그리고 동조자보다 한 발 더 나아간 ‘믿고 싶어하는 자’ 이 마지막 부류들은 어느 누장의 사실과 허위에 큰 관심이 없다. 그저 특정한 주장이 믿고 싶을 뿐이다. 아니 믿고 싶은 주장을 선택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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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에도 근거가 필요하다. 교회가 동서로 갈라지기 전 가톨릭이 그리스 정교측의 성상 (聖像) 숭배 금지령에 격렬히 반발한 것도 라틴어도 뭣도 모르고 눈에 안보이는 뭔가를 숭상한다는 걸 이해하기 싫어하는 게르만족들에게는 성상이 필요했기 때문 아니었던가. 믿고 싶은 주장을 퍼뜨리기 위해서라도 근거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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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주장이 황당한데 근거가 확실할 리는 없다. 근거 역시 주장만큼이나 어이가 없다. 여기서도 또 믿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생겨난다. 아래 사진처럼 북한 이을설 원수가 광주에 와서 할머니로 분장하고 있다는 ‘근거’가 제시됐을 때 몽타쥬 분석 수십 년의 경찰 아저씨라도 붙어서 “인체역학적으로 이 둘은 같은 얼굴”이라고 한 마디 하면 이 사진은 유력한 근거가 된다. 물론 ‘믿고 싶어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겨자씨만한 믿음만 있어도 산을 옮길 수 있다는 예수의 말은 반어적으로도 옳다. 세 사람만 있어도 우리집 뒷산에 호랑이가 포효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이렇듯 ‘믿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그들이 근거를 만들어내고 그 근거가 또 다른 믿음 희망자를 불러내는 순환을 거듭하다보면 어느새 거짓은 눈처럼 다져지고 허위는 눈덩이처럼 불어나는데 거기에 눈코입 그려놓고 팔 다리 나뭇가지 걸어 놓으면 눈‘사람’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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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가 저 눈사람이 움직이는 걸 봤다고 외치면 믿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그걸 믿는다. 그 즈음에서 믿음은 ‘팩트’가 되고 규명해야 할 ‘진실’의 대열에 등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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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국내 최고 학부 나와서 최고위 관료나 판검사 변호사 기업 경영주 다 거친 사람들이 도무지 말이 안 되는 소리를 자신 있게 늘어놓게 되는 것은 그들이 바보라서가 아니라 믿고 싶은 것만 믿겠다는 편향의 소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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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이 빨갱이라 북한이 땅굴 파는 걸 봐 주고 있다는 썰을 ‘믿고 싶은’ 것이고 감히 공수부대에 시민들이 대든 것은 공수부대의 악귀같은 만행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북한 특수부대기 때문에 그랬다’고 믿고 싶은 것이다. 기실 이 맹신과 맹신을 가장한 사악함 사이에서 오가는 이들에게는 어떻게 말할 도리가 없다. 그저 이 땅에서 보수한다는 사람들이 불쌍할 따름이다. 그래서 홀연 나 자신이 불쌍해지고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것이다. 나는 분명히 보수적인 사람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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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따지고 보면 위에서 길게 언급한 이 과정이 과연 보수나 수구의 전유물인가는 생각해 볼 문제다. 진보 쪽에도 그런 ‘겨자씨 믿음’ 가진 사람들은 꽤 많았고 민둥산에 호랑이 만든 적도 많았던 것 같아서. ‘세월호를 들이받는 잠수함’이라는 사진이나 돌고래처럼 날아올라 난간을 들이받고 사라진 잠수함 (김어준의 파파이스)에서 비롯된 ‘믿음’들은 수년 간의 시간과 조사 과정을 거치고도 끝내 ‘외력설’을 포기하지 못하는 암담함으로 남지 않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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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얀마 아웅산 묘소 폭발 테러를 남한의 자작극이라고 우기는 ‘진보’나 노무현 정권 때 진보쪽 인사들이 가세하여 조사됐고 결과가 다 나왔던 KAL 858기 폭파 사건도 조작됐다는 주장을 고수하는 모양새, 뭔가 그 모든 일을 배후에서 해 내는 강위력하고도 전지전능한 존재에서 나는 비슷한 그림자를 본다. 부산에서 만난 고위 공무원 아저씨의 이야기. “그럼! 그것들이 얼마나 지독한 것들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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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탁에 앉으면 먹고 싶었던 반찬이 우선 눈에 들어온다. 정보도 마찬가지다. 수없이 흘러다니는 정보의 바다에서 눈에 띄는 것은 우선 내가 믿고 싶은 정보이게 마련이다. 그러나 편식하다 보면 건강을 해치듯 믿고 싶은 것만 믿다 보면 결국은 스스로가 불신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믿고 싶은 사실은 누구에게나 많다. 단지 믿을만한 사실과 믿고 싶은 사실을 구분하는 이성(理性)을 기대할 뿐이다. 또 그를 갖기 위해 노력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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