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구도심 답사 2- 기억은 지층이 되고

in #kr4 years ago

인천 구도심답사 2 - 기억은 지층이 되고 과거는 전설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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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자들어 아내에게 “늙었다.”는 타박을 듣게 되는 일이 잦다. 자발없이 솟아나는 흰머리 때문만은 아니다. 나이 덜 들었을 때는 쳐다도 보지 않던 드라마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모습을 여러 번 보이고 나서다. 더욱이 쳐다보지 않는 수준을 넘어 멸시에 가까운 시선을 보이던 멜로물에 몰입하는 걸 보고 아내는 여러 번 혀를 찼다. 그 중 하나가 <도깨비>가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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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깨비>의 스토리 라인을 대충 듣고는 글자 그대로 관심이 없었다. 가슴에 칼 꽂고 죽지 않는 도깨비라든가 그걸 뺄 수 있지만 동시에 그를 죽일 수 밖에 없는 도깨비 신부라는 황망하기 이를데없는 설정에 금쪽같은 내 시간을 어찌 빼앗긴단 말인가. 넷플릭스에 올라와서도 한참을 외면했는데 어느 날 심심해서 누른 클릭 한 번에 도깨비의 세계에 빠지고 말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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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중 여러 장면이 인천 배다리 헌책방 골목 근처에서 촬영됐다. 배다리라는 이름 자체가 도깨비 방망이같은 변화가 일어났음을 보여 준다. 조수 간만의 차가 크기로 세계적으로 이름 높은 인천 앞바다의 밀물이 지금은 완연한 육지가 된 이곳까지 밀려들어왔고 배다리가 놓였던 날의 흔적이 이 지명이다. 천년을 죽지 않고 살았던 도깨비라면 여러 번의 상전벽해에 신물이 나서 상전벽해 위에 뜬 외딴 섬처럼 그나마 변하지 않고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이곳을 찾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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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친구들과 충북 옥천에 들렀을 때 구태여 볼 것도 없는 시골 마을을 굳이 가자고 채근하는 녀석의 뒤통수에 온갖 불평을 퍼부으며 따라간 적이 있다. 목적지는 정말로 아무것도 없는 시골 마을이어서 재차 비난의 미사일을 퍼부을 참이었는데 녀석이 갑자기 <향수>를 부르기 시작하자 분위기가 일변했다. 아 그곳은 정지용의 <향수>의 배경이 되는 마을이었던 것이다. ‘차마 그곳이 꿈엔들 잊힐리야’ 노래하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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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노래 한 자락에 온 마을이 새롭게 ‘일어서는’ 경험을 했는데 여기서 일행들은 비슷한 경험을 한 것 같다. 모두들 저마다 <도깨비>의 추억에 젖는다. 평소라면 거들떠보지도 않고 지나쳤을 풍경 앞에서 감동하며 탄성을 내지른다. 공유가 되기엔 짧거나 어긋난 50대 남자들이 롱코트를 입고 오지 않은 것을 한탄하고 김고은 엄마 뻘이 된 50대 아줌마들이 깜찍과 끔찍 사이의 포즈를 연출하며 즐거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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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도깨비>에서 공유는 천년의 세월 동안 여러 이름으로 살면서 사람들의 생로병사와 역사와 사회의 부침을 목도했다. 그런 도깨비가 실제 있다면 그는 인천의 배다리에 배들이 들고 나는 것도 보았고 썰물 때 꼼짝없이 뻘밭에 갇혀 밀물만 기다리는 애타는 선주들의 동동거림도 들었을 것이고 이곳이 육지가 되고 한때 번화한 거리였다가 지금은 ‘옛날 풍경’으로 남은 배다리 골목 언저리에서 웃고 있었으리라. 배다리는 그런 곳이다. 문득 사람들을 작은 ‘도깨비’로 만들어 주는. 도깨비의 20분의 1밖에 살지 못했으면서도 “그때는 그랬지” 하면서 공유의 미소를 지으며 풍경을 눈으로 쓸어내리게 해 주는 곳이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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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은 쌓여 지층의 형형색색 속에서 과거는 전설이 되며 오늘날의 사람들은 전설 속에서 새로운 이야기를 일군다. 배다리는 그런 곳이다. 이곳에서는 ‘한 100년 된 건물’이라는 게 그렇게 귀하지 않다. 대충 100년을 이어온 ‘20세기 약방’은 지금도 운영 중이며, 역시 생긴지 한 100년 된다는 애관극장은 지금도 ‘절찬 상영중’이다. 문화 공간으로 새롭게 거듭난 양조장은 익어가는 술 냄새 대신 시간의 향기를 풍기고 낡은 건물을 빌려 ‘기억의 질량’을 표현하는 예술가의 붓끝은 낡았으나 새롭고 오래되었으나 풋풋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시대의 변화처럼 팍팍하고 경사진 비탈길을 오르다 보면 나는 얼마쯤 되었소 하는 포스를 발휘하는 건물들이 곳곳에 출몰하는데 우리나라 최초의 도선사 유항렬의 집은 그 중에서도 걸출하다.

유항렬은 우리나라 최초의 도선사다. 1937년 일본인들의 견제를 극복하고 조선인 최초로 도선사 면허를 받은 뒤 인천항에서 도선사 활동을 한 사람이다. 1915년 9월 일제가 공포한 조선수선령은 일본인 도선사들에게 일종의 특혜를 보장한 것이었고, 도선사가 되려던 유항렬은 까탈스러운 견제와 방해를 이겨내야 했다. 우여곡절 끝에 그는 도선사가 됐고 해방 이후 한동안 서울의 관문 인천 유일의 도선사였다. 그 일은 쉽지 않았다. 한 명의 도선서가 가세했으나 야간 출항하는 배를 안내한 이후 귀항하다가 풍랑을 만나 목숨을 잃는 일이 있을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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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유항렬은 살아 냈다. 인천상륙작전 때 유엔군 함정을 안내했고, 1·4후퇴 때는 인천항에서 철수하는 유엔군 군함들을 마지막까지 도선한 뒤에야 피란길에 올랐다. 그 후 정년퇴직할 때까지 30년간 선박 3000여 척을 안내했다. (중앙일보 2003년 10월 12일) 1900년생이고 1971년에 돌아간 그가 도깨비처럼 살았다면 올해로 두 번째 환갑을 맞는다. 120년 전의 경자년 그가 태어났고 71년의 생애 태반을 인천에서 보냈고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그림 같은’ 집을 지어 (도선사는 예나 지금이나 괜찮은 수입을 올리는 직업이다) 그의 흔적을 남기고 있다. 인천시에서 이 집을 사들였다고 답사 리더 종수가 말해 주는데, 지금은 폐가 비슷해 보이는 그의 집도 조만간 ‘유항렬 도선사의 집’으로 단장해 다시금 우리의 발길을 거칠 때가 오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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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다못해 교회와 성당도 이곳에서는 역사의 지층을 이룬다. 인천광역시에서 가장 먼저 지어진 가톨릭 건축물인 답동성당과 한국 감리교의 ‘어머니 교회’라고 불리는 기독교대한감리회 내리교회, 대한성공회 내동성당들이 곳곳에서 역사적 내공을 쌓아가며 인천의 변화를 그 발치 아래로 굽어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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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볼 만큼 봤으니 밥을 먹어야 했다. 금강산도 식후경인데 인천 구도심이야 당연하지 않겠나. 그러나 이런 곳에서의 점심 또한 예사로울 수는 없다. 인천의 유서깊은 신포시장의 명물 닭강정을 먹느냐, 막냉면이기는 하지만 서울에서 원정와서도 먹는 ‘세숫대야 냉면’을 먹느냐 왈가왈부가 있다가 한 친구가 손가락을 뻗었다. “어 저기 괜찮은데.” 눈을 들어 보니 경인면옥이다. 20년 전 내가 촬영도 했던 곳이다. 그 당시 50년 역사였으니 이 집도 이미 70년의 역사를 아로새겼을 것이다. 그때 80대였던 주인 할머니. 나에게 “6.25 전쟁 난 것도 모르고 탱크가 신포시장 앞에 온 걸 보고 알았어. 인민군이 영문 모르고 피난짐 싼 사람들한테 ‘동무들 돌아가기요’ 했던 게 기억이 나.” 하며 추억담을 들려주던 그분은 모르긴 해도 좋은 세상으로 가셨을 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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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에 웬 냉면집인가 하며 서울의 노포들을 들먹이는 냉면 매니아들이 있겠지만 아서자. 개항 이후 인천은 새로운 문물과 옛 문물의 접합점이었고 바깥 사람들이 이곳 사람들의 문화를 만나는 장이었다. 일찌감치 개화했던 평안도 사람들이 배를 타고 또는 경의선과 경인선을 타고 활개치며 돌아다닌 곳도 인천이었다. 그래서 인천에 유명한 평양냉면집이 의외로 많았다. 서울의 부유층들이 “나는 인천에서 배달을 해 먹느니라.” 돈지랄을 벌여서 인천에서 서울까지 종업원들이 목판에 싣고 경인선을 타기도 했다고 한다. 세월이 가고 서울의 냉면집들이 들어서면서 그 명성은 저물었으나 경인면옥은 아직 건재하니 이 아니 기쁠소냐. 일행은 평양냉면과 만두, 그리고 녹두지짐에 막걸리를 곁들인 점심으로 배를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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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인천 특유의 오르막을 걸어오르는 와중에 특이한 곳을 만난다. 인천시 유형문화재 49호 홍예문이다. 개화기 인천 중앙동 등지에 모여 살던 일본인들의 인구가 점차 불어나자 만석동 쪽으로 그 영역을 확산시키고자 했고 일본군 공병대가 나서서 자유공원으로 이어지는 응봉산 허리를 잘라 석축을 쌓고 문을 내고 길을 열었던 곳이다. 1908년 완공됐으니 무려 112년을 버틴 문이다. 좁은 문으로는 지금도 차들이 오가고 석축의 튼튼함은 여전히 완고하다. 홍예문을 보기 위해 내려가는 계단은 영화 <기생충>에 등장하는 부암동 계단만큼이나 길고 조밀한데 계단 허리께에는 내려가야 홍예문의 면모를 제대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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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예문을 아래쪽에서 올려다보면 사뭇 기묘한 느낌에 사로잡힌다. 마치 저곳을 통과하면 새로운 세계가 펼쳐질 듯하고, 전혀 다른 시대가 나올 것 같은 예감이랄지. 일본 공병대가 저 무지막지한 석축을 쌓고 산을 뚫는 걸 보면서 인천의 조선인들 역시 그랬으리라. 사실 저 문왼쪽으로 가면 당시 조선 사람들로서는 별천지라고 할 수 밖에 없는 풍경이 펼쳐졌다. 맥아더 동상이 서 있는 자유공원 주변은 여러모로 조선이되 조선이 아닌 곳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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