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9월 13일 행복한 골키퍼 홍덕영

in #kr4 years ago

2005년 9월 13일 행복한 골키퍼 홍덕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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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말할 수 있다’가 되겠는데 언론사마다 시험보고 다니던 시절 스포츠조선 시험도 봤었다. 필기 통과하고 면접을 가게 됐는데 다른 데와 면접이 겹치면서 스포츠조선을 포기했었다. 그때 스포츠조선에 갔으면 어떤 인생을 살았을지 사뭇 궁금하다. 스포츠조선 시험이 기억나는 이유는 작문 시험 때문이다. 그때 시험 제목은 매우 건조하고 평이했다. ‘스포츠가 미치는 긍정적 영향에 대해 쓰시오’ 하여간 뭐 이것과 비슷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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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이렇게 서두를 시작했었다. “지하철에는 3대 바보가 있다. 스포츠신문을 사는 바보, 그걸 옆에서 훔쳐 읽는 바보, 그리고 선반 위에 스포츠신문 없나 돌아다니는 바보.” 성미 급한 채점자였으면 이런 미친 넘 하고 던져 버릴 이 서두를 보완했던 건 “그래도 스포츠는 드라마고 인생이고 역사다.”는 주제의 예화로 동원된 손기정과 황영조의 사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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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필이면 손기정의 베를린 금메달과 같은 날(8월 9일) 바르셀로나에서 금메달이 나왔고, 하필이면 일본 선수를 눌렀으며 하필이면 그때 손기정이 바르셀로나 현지에 있었다. 스터디움을 내달리는 황영조를 보면서 손기정은 함께 펄쩍펄쩍 뛰었다고 한다. 이런 드라마가, 인생이, 역사가 어디 있겠는가 니라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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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전두환이 3S 정책을 폈다는 악명 때문에 그렇지 그 3S 모두 인간을 바보 만들지는 않는다. 스크린이든 섹스든 스포츠든. 오히려 다양하고 폭넓은 스토리의 보고가 아니겠는가. 2005년 9월 13일 세상을 뜬 한국 축구팀의 전설적 골키퍼 홍덕영도 드라마 한 편은 쓸만한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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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덕영은 이북 출신이다. 함흥 사람이다. 언젠가 함경도 출신인 아버지께서 “차라리 남쪽에 소련이 들어오고 북쪽에 미국이 들어왔다면 궁합이 맞았을 것 같다”고 하신 적이 있는데 이는 기독교가 무척 성했던 북한 지역의 특성을 얘기하신 것이었다. 함흥 지역도 예외가 아니어서 반공 소요가 잦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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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덕영의 집안은 서점과 체육사를 동시에 운영하는 자본가 집안이었고 당연히 공산당과는 물과 기름이었다. 빨갱이 세상이 싫었던 홍덕영은 혈혈단신 남으로 내려오게 된다. 보성전문 (고려대) 입학 시험을 보기 위해 올라탄 전차 안에서 만난 보성전문 학생들이 “보성은 골키퍼 때문에 안된다니까” 하며 한탄하는 걸 들었다. “오케이 이걸로 학교 가자.” 그는 보성전문 축구부를 찾아 골키퍼를 자원했고 실력도 있었던 그는 보성전문 골키퍼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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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단이 굳어져가던 시기였고 동시에 치열한 이념대립이 벌어지던 때였다. 1948년 올림픽을 앞두고 고려대 4명, 연희전문(연세대) 4명 등 총 11명의 축구 선수가 월북하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고 보성전문 축구 선수였던 이문휘는 좌익 사형수로 감옥에 갇혀 있다가 전쟁 통에 기적적으로 풀려나 김정일의 전처 성혜랑의 회고록에 등장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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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덕영은 그들을 익히 알았을 것이다. 어쩌면 전차 안에서 “골키퍼가 형편없는데 어쩌지?” 걱정하던 바로 그들 가운데 하나였는지도 모른다 그들은 북을 택했고 그 이후 영영 만나지 못한다. 분단의 비극은 축구판도 갈라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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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12년만에 올림픽이 재개됐다. 장소는 런던. 해방된 조선 (대한민국 정부 수립 전이라) 사람들은 12년 전 베를린 올림픽의 금메달의 기억을 잊지 못했고 태극기를 앞장세워 올림픽에 어떻게든 참가하길 열망했다. 성금이 모아지고 복권이 판매되고 미군정도 거들면서 ‘조선 올림픽 대표단’은 런던으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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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조선 사람들은 마라톤의 경우 최윤칠이나 서윤복 등이 평소 기록만 내면 금메달은 따놓은 당상이었(다고 믿었)고 역도 등에서도 금메달 몇 개는 나오리라고 보는 등 일약 스포츠 강국으로 부상할 정신승리를 하고 있었다. 축구에서도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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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베를린 일본 대표팀이 우승후보 스웨덴을 3대2로 격파하며 8강에 오른 ‘베를린의 기적’을 연출했던 것을 조선 사람들 역시 생생히 기억했고 그때 결승골을 넣은 김용식(본인 기억임. FIFA 기록과는 좀 다름) 같은 백전 노장이 팀을 이끌고 있었던 바 축구에서도 메달 딸 수 있다는 뭐랄까 깜찍할만큼 맹랑한 기대를 하고 있었다. 관록의 노장 중심으로 팀을 구성했기에 (이 때문에 젊은선수들이 열받아서 월북했다는 말도 있다) 골키퍼 홍덕영은 제일 막내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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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대표팀의 ‘정신승리’는 첫 판에서 멕시코를 잡는 기염을 토하며 극에 달했다 5대 3. 나름 축구 좀 한다고 주름잡는 멕시코는 넋을 잃었고 한국 선수들은 기고만장했다. 이제 메달의 색깔이 문제 아닐까? 다음 상대 스웨덴은 1936년 베를린에서 축구라면 조선보다 한 수 아래였던 일본에게 깨진 팀이었다. 까짓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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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한국팀은 스웨덴에게 12대 0이라는 기록적인 만신창이가 됐다. 홍덕영 골키퍼의 온몸에 멍이 들었다 할 정도로 바이킹의 후예들은 한국 골문에 쉴새없이 슛을 때려 넣었다. 강슛도 강슛이지만 당시 축구공 가죽에는 그대로 물이 스며들었던 바, 수중전으로 펼쳐진 스웨덴 전에서 홍덕영은 물 먹은 가죽덩어리를 온몸으로 막아내야 했다. 그러니 온몸이 시퍼럴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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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덕영 본인의 회고로 9대 0까지는 셌는데 그 뒤로는 몇 골을 먹었는지 모르고 다음날 기록을 보고 알았다고 한다. 12대 0 . 그 후 조선의 신문 기사들도 스코어를 헛갈렸다 11대 0. 12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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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전쟁이 났고 전쟁 중 열린 1952년 헬싱키 올림픽때도 14명의 미니 축구대표팀이 꾸려졌지만 전쟁 중에 헬싱키까지 축구팀이 이동하기는 무리여서 참가가 무위에 그쳤다. 다음의 빅 이벤트가 1954년 스위스 월드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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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예선전이 치러졌는데 상대는 또 그놈의 ;‘웬수같은 일본’이었다. 홈 앤 어웨이로 예선을 치러야 하는데 “일본놈은 발 못붙여!” 하는 반일감정 때문에 한국 축구팀은 두 차례 원정 경기를 치러야 했다. 이때 골키퍼도 홍덕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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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덕영이 필생의 감격으로 꼽았던 경기가 이 두 번의 한일전이다. 태극기를 들고서 옛 식민 지배국으로 원정 갔던 한국팀은 1승 1무로 일본을 제압했다. 1차전에서 일본을 5대 1로 이기던 날의 감격은 대단했으나 2차전은 참혹했다. 1차전의 참패의 굴욕을 일본팀은 주먹과 발길질로 갚았다. 한 선수의 치아가 몇 대나 부러졌고 끝내는 기절해 버릴 정도로 거칠게 나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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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수 교체 제도가 없던 시절이었다. 잠깐 기절했던 선수는 정신을 차리자마자 다시 그라운드로 굴러 들어갔다. “지면 현해탄에 빠져 죽자”던 장택상 축구협회장의 발언 때문만은 아니었다. 1차전에서 2만 명의 일본 관중들 사이에서 수십 명의 재일교포들은 악을 쓰며 한국을 응원했다. 끝내 이겼을 때 한국말을 제대로 몰랐던 2세들까지 애국가를 따라부르며 울었다고 한다. 어떻게 질 수 있었으랴. 못지지. 못지고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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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날아간 스위스에서 한국 축구팀은 망극한 패배를 당한다. 특히 세계 축구사에 빛나는 전설적인 마자르 군단 헝가리에게 걸린 건 참 비운 중의 비운이었다. 더구나 며칠을 걸려 스위스에 도착한 게 경기 전날이었으니 컨디션이랄 것도 없었을 것이고. 헝가리에게 9대 0 터키에 7대 0. 그 골을 먹은 것이 역시 홍덕영이었다. 하지만 그는 명 골키퍼라고 추앙을 받았다. 그가 몸을 날려 막아낸 공이 먹은 골의 두어 배는 됐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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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가리 전에서는 선수들 태반이 쥐가 나서 그라운드에 뒹구는 상황에서 겨우 일곱 명이 악으로 깡으로 뛰기도 했다.. 매몰차고 차갑기로 이름난 스위스 사람들에게 한국 팀은 깊은 인상을 남긴다. 한국전쟁이야 유럽에도 꽤 알려져 있었을 터이니 요즘으로 하면 막 내전 끝난 아프가니스탄 축구팀 정도의 느낌이랄까. 일단 복장부터 엉망이었다. 출국 전 외상으로 맞춰 입은 양복인데 기장이 문제였다 대부분 선수들의 다리를 덮지 못하고 깡총하니 발목을 덮을랑말랑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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짖궂은 외국 기자가 물었다. “한국에는 짧은 바지가 유행이오?” 그때 홍덕영이 야무지게 대답했다. “우리는 전쟁을 겪은 나라요. 물자 절약을 애국으로 생각하고 바지를 짧게 입었소 ” 이런 형편이 알려지자 유럽 사람들의 온정심이 발동했다. 한국 선수들의 숙소 앞에는 온갖 옷가지며 음식, 스위스 시계와 현찰까지 잔뜩 쌓였다. 그러나 또 유럽은 냉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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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형편없는 팀이 올 것 같으면 아시아와 아프리카 애들은 빼고 월드컵 합시다.” 그때 FIFA 회장이자 월드컵의 아버지라 할 줄리메는 다음과 같이 반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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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한국 같은 나라가 처참하게 패했다지만 수십 년 뒤 일을 누가 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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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리메의 반박 겸 예언은 들어맞았다. 그로부터 48년 뒤 2002년 한국은 월드컵 유치국이 됐고 4강이라는 어마어마한 (좀 머쓱하기도 한) 성과를 이뤄냈던 것이다. 줄리메는 벌써 고인이 됐지만 홍덕영은 살아 있었다. 2002년 당시 그는 1954년 출전했던 한국팀 가운데 생존해 있던 3인 중 한 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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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컵이 개막되던 즈음 그는 병원에 입원 중이었다. 병실에 TV가 따로 없거나 시청이 불편했던 모양이다. 그는 병원을 나와 아들 집으로 간다. 축구를 보기 위해서였다. 폴란드와의 첫 경기를 그는 감격 속에 지켜 봤다. “ 반세기 만에 후배들이 이 늙은이의 한을 풀어주는 것 같아서 정말 고맙고 대견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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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가 질릴 정도로 많은 슛을 막아내고 또 먹다 보니 징글징글해져서 공을 관중석으로 차 버렸던 (예비 공이 없었기에 공이 돌아오려면 시간이 걸렸고 그 시간이나마 쉬기 위해) 옛 골키퍼가, 깡총한 양복 입고 다니며 웃음을 사고 등번호를 꿰매 입고 나갔던 전쟁통 한국 대표팀의 골키퍼가, 해방된지 10년도 안돼 식민 지배국에 가서 악으로 깡으로 홈팀의 공세를 막아냈던 왕년의 막내가 월드컵 ‘첫 승’을 목도하는 심경이 어땠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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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마지막 인터뷰에서 이런 말도 한다. “박지성처럼 유럽에서 뛰는 선수도 많잖아? 일본 선수들이 대부분 실패하고 왔는데, 한국 선수들은 꼭 성공했으면 좋겠어. 그게 일본을 이기는 또 다른 길 아니겠어?” (NK조선 2005년 8월 30일) 반세기 후에도 그의 머리 속에는 1954년 일본전이 틀어박혀 있었던 것이다. 그런 그가 마지막 본 월드컵이 하필이면 한일공동월드컵이었다는 것은 또 무슨 스포츠의 드라마고요 역사요 조화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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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인터뷰를 하고 꼭 2주 후 그는 평온하게 하늘나라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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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동의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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