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9월 8일 무명천 할머니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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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9월 8일 무명천 할머니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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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정명(正名)에 민감하다. 기탄없이 부르는 대로 부르고 나오는 대로 밖으로 내던 단어들이 생경하고 낯설 때가 있다. ‘항쟁’ 같은 단어들이 그렇다. 광주항쟁의 경우는 전혀 낯설지 않다. 제 욕심 채우자고 무쇠 발톱을 생살같은 백성들 앞에 들이밀었던 살인마들에 맞서서 시민군이 일어나고 시민들은 그를 도우며 약탈 하나 없는 공동체를 잠깐이나마 꾸렸던 광주항쟁은 우리 역사의 빛나는 십자가다. 하지만 입버릇처럼 말하던 ‘4.3항쟁’에 대해서는 좀 생각이 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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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은 제주도민들의 거도적(擧島的)인 봉기가 아니었다. 남로당 그룹들이 고립된 섬에서 어떻게 버틸 것인지, 무장 항쟁의 성공 여부와 피해 가능성은 어느 정도인지를 그리 치밀하게 재지 못하고 올라버린 봉화에 진압군들이 기름을 뿌려 온 섬을 뒤덮은 불길 같은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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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제주 섬 사람들은 머리에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항쟁에 가담했는지 지지하는지 반대하는지 아예 관심도 없는지 구분이 필요없는 ‘빨갱이의 섬’ 주민으로 규정됐고 그 불길 속에 타들어갔다. ‘항쟁’이 아니라 ‘학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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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누군가 ‘수준있다’고 칭찬한 우익 유튜버 중 하나는 4.3을 두고 이런 표현을 했다. “해충을 잡으려다 익충까지 잡은 사건” 이 벌레 같은 녀석에게 보이는 게 벌레밖에 더 있겠냐마는 그 ‘익충’들은 말도 하고 웃고 떠들고 일하며 농사일하고 물질하며 자식들 먹여 살리던 수많은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벌레 닮은 유튜버가 턱 돌아가에 한 방 맞은 뒤에 깨달아야 할 것 ‘해충’조차도 그렇게 잡으면 될 일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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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와 경찰, 그리고 생판 생경한 서북 사투리를 쓰며 이역같은 섬에 상륙한 서북청년단은 참빗질을 하듯이 제주도를 동에서 서로 남에서 북으로 쓸어내리고 쓸어올렸다. 무장대건 농사꾼이건 해녀들이건 제주 말 쓰고 토벌 도상에 있으면 사냥의 대상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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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1948년 제주도 출동을 거부하며 감행된 14연대의 봉기 이후 상황은 더 심각해졌다. 기존의 잔인함에 이 섬을 놔두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겠다는 신생 정부의 독기가 더해졌다. 1948년 연말을 전후하여 그때껏 진압을 맡고 있던 9연대가 2연대로 새롭게 교체되면서 진압의 광기는 진해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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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1월 , 제주 서쪽의 한경면 판포리에서 총성이 난무했다. 판포리는 중산간 마을이었다. “해안가에서 벗어난 중산간 마을 사람들은 무조건 해안 지대로 내려오라. 안그러면 눈에 보이는대로 사살하겠다.”는 포고가 나왔지만 삶의 터전을 버리고 해안가로 내려오라는 것은 굶어 죽으라는 얘기였고 마을 사람들은 불안 속에 살고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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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어느날 토벌대가 들이닥쳤다. 이른바 ‘폭도’를 추적해 왔던 것인지 마을 사람들을 폭도로 간주한 것인지 토벌대는 인정사정없이 총을 쏘아붙였다. 무수한 사람들이 쓰러졌고 토벌대가 물러간 뒤 시신들을 수습하던 중 한 사람이 소스라치게 놀랐다. “살아 있어. 이 사람 살아 있어.” 1914년생, 당시 서른 다섯 살의 진아영 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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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어서도 놀랐지만 더 놀라운 것은 진아영의 비참한 상처였다. 총알이 그녀의 턱을 날려 버린 것이다. 얼굴이 피범벅이 되고 턱뼈다 너덜거렸지만 살아 있었다. 가냘프게 숨쉬는 모습을 보며 차라리 죽어 버리는 게 낫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다고 했다. 그러나 그녀는 살아 남았다. 그 이후 그녀는 말을 할 수 없었다. 턱이 없으니 발음이 될 턱이 없었다. 결혼은 꿈도 꿀 일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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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간 언니가 그녀를 자신의 마을로 데려갔다. 진아영은 그곳에서 무명천으로 턱을 감싸고 평생을 살았다. 함께 사람들과 어울려 밥을 먹지도 못했다. 제대로 씹지도 못하고 흘러내렸겠거니와 그 모습을 누구에게 보여 주기 싫었던 것이다. 하다못해 커피 한 잔을 받아도 돌아나와 골목길 응달에 앉아 혼자 마셨다. 먹어야 사는 인생, 밥이라도 먹지 않았다면 그녀는 무명천을 한시도 얼굴에서 떼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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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자신의 터전 문을 꽁꽁 잠궜다. 가져갈 것도 없고 누가 탐낼 물건도 없었으나 일하러 갈 때나 인근에 사는 사촌 집에 다니러 갈 때에도 꼭 문단속을 꼼꼼히 했다. 그건 피해의식이었다. 누군가 자신을 노리고 있고, 언제 어떻게 자신을 엄습할지 모른다는 공포였다. 턱이 사라진 틈에 돋아난 공포의 무더기를 진아영은 무명천으로 그렇게 감싸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녀의 유품으로 남아 있는 이면지에는 서툰 글씨의 메모가 적혀 있다. “쥐약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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턱이 사라지고도 가족을 잃고도 2004년 9월 8일 아흔 살을 일기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꿋꿋이 살았던 진아영 할머니였으니 쥐약의 용도는 온전히 찍찍거리며 밤잠 깨우는 쥐새끼만을 위한 것이었으리라. 하지만 내가 그 상황이고, 내 손에 문득 쥐약이 쥐어졌더라면 언제든 털어놓고 입을 다물어도 이상할 것이 없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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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녀는 밥을 제대로 먹지 못해 (씹을 수가 없으니) 평생 위장병과 영양실조에 시달리면서도 살아 남았고 손이 갈퀴같이 되도록 톳을 캐며 아흔 살까지 버티며 우리에게 ‘무명천 할머니’의 모습과 이름을 전해 주었다. 우리 현대사가 얼마나 가슴 아프고 복장 터지고 기가 막힌 역사였는지를 그녀는 그저 살아나옴 자체로 들려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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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아영 할머니가 살던 집은 제주 올레 14코스 근처에 있다. 할머니도 길렀다는 선인장이 그득한 곳. 할머니가 톳을 캐던 바닷가에서는 거인의 팔 같은 풍력 발전기가 돌아가는 곳. 할머니의 옛집은 이제는 활짝 열려 사람들의 발걸음이 흔하고 할머니는 생전 만날 일 없던 사람들의 인사를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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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할머니같은 사람들을 두고 “해충 죽이려다가 벼락맞은 불쌍한 익충들”로 표현하는 진짜로 버러지같은 놈들이 설치는 세상에서 그래도 국가에 의해 사냥당하고 버림받았으나 아흔 인생을 버티고 살았던 진아영을 기억하고픈 사람들이 보존하고 있는 그녀의 옛집. 그곳에는 아직 진아영이 살고 있다. 2004년 9월 8일 너무나도 고달프고 참담했던 세상 여행을 마치고 편안한 곳으로 돌아간 진아영 할머니의 명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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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연해지네요.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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