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6년 9월 6일 보도지침의 발견, 그리고 오늘날의 보도지침

in #kr2 months ago (edited)

1986년 9월 6일 보도지침의 발견, 그리고 오늘날의 보도지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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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오면서 ‘지하세계’에 박스에 암장(?)해 놨던 내용물들이 풀렸다. <현실과 과학>이니 <노동해방문학>이니 <사상문예운동>이니 하는 추억의 잡지(?)들이 무더기로 쏟아져 나왔다. 내가 이것들마저 들고 이사를 다녔으니 이삿짐 센터 아저씨들이 얼마나 고생했을까 싶어 냅다 버려 버리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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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료적 가치(?)를 생각했지만 어차피 이해하지도 못할 사료 또는 철이 지나도 여러 철이 지난 사료 가지고 있으면 뭐하나 싶어서 결단을 내렸다. 노해문 쓸 때 조직의 괴수와 주사파의 괴수가 하와이에서 만나 수영을 즐기고 있는 세상에 무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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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래도 책꽂이 한 켠에 꽂아둔 잡지들이 있었다. ‘말’지였다. 80년대 것은 없고 90년대 이후 열 댓권 정도였지만 이건 버리기 아까웠다. 그리고 ‘사료적 가치’가 충분했다. 어차피 무슨 신식국독자니 반제반파니 반제반독이니 하는 팔색당파들의 이론 싸움에는 일 점 관심 없었던 게으른 자로서 <현실과 과학>은 ‘별로’ 모르겠으나 <말>지의 기사는 여전히 친숙하고 추억을 불러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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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지를 버리지 못한 이유 중 하나는 이 잡지가 우리 역사에 끼친 지대한 긍정적 영향력 때문이다.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그 가운데 1986년 9월 6일 나온 ‘보도지침’ 특집호는 당시 대한민국이 어떤 나라였는지, 헌법 1조 1항,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라는 넋두리를 얼마나 늙은 개 쉰 밥 먹고 짖는 소리였는지를 처절하게 폭로했던 일대 선언이요 사건이요 쾌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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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언론통폐합이라는 가관이 펼쳐진 뒤 정권의 입맛에 맞게 세팅된 언론 하에서 언론인들에 대한 처우는 상당히 높아졌고 특혜도 많이 부여됐다. 전형적인 당근과 채찍 정책이었다. 무슨 사건이 생기면 경찰 간부가 언론사 사회부장들 데리고 온천에 가서 질펀하게 놀고 두둑이 봉투를 돌렸고 일선 기자들에게 아파트 분양도 알선해 주었다. 그런데 그 당근에는 뼈가 있었다. 보도지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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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기부 보안사 등의 언론 담당 부서원들이 기사를 읽고 빨간펜으로 찍찍 긋기도 했지만 핵심적 창구는 문화공보부(문공부, 현 문화관광부) 내 홍보조정실이었다. 이곳에서 매일 각 신문사로 이른바 보도지침(당시 문공부 용어로는 홍보조정지침)을 내려보냈다. 그래도 양심이 있어선지 아니면 일말의 치밀함인지 문서보다는 전화로 지시가 내려왔다고 한다. 편집국장들은 그걸 일일이 받아서 자신의 아래로 내려보냈고. 전화 말미에는 이런 말이 오갔겠지. “백암온천 물이 좋다던데 허허허.” “아이고 지난번에 수안보도 죽여 줬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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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말이 안되는 일이 일상이 된 사회에서도 ‘이게 말이 됩니까’하고 치받는 사람은 나오게 마련이다. 팔팔한 나이 서른 셋의 한국일보 기자 김주언이 그랬다. 일정한 시간만 되면 전화통을 붙들고 늘어지는 국장. 그리고 쏟아지는 국장 지시 사항. 누구나 그게 국장의 생각이 아닌 걸 알지만 응당 그렇게 해야 하는 상황. 고랫적 김동길의 유행어처럼 “이게 뭡니까?” 소리가 튀어나와야 맞지만 또 아무도 그렇게 얘기하지 않는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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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언은 국장이 통화 중 끄적인 종이들을 빼돌려 꼼꼼히 복사한다. 2020년 6월 5일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 제공되면서 전면 공개된 ‘보도지침 원본’이 총 584건이었으니 김주언 기자의 뚝심과 집념에는 다시금 경의를 표할 수 밖에 없다. “1985년 10월 19일부터 1986년 8월 8일까지 문화공보부 홍보정책실에서 보도통제를 위한 세부 일일지침으로...... ‘보도지침’ 원고에는 당시 빨간 펜으로 교정 교열한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다. 원고지에 문장을 옮겨 인쇄소에 넘겨야 했지만, 그럴 틈도 없을 정도로 긴박하게 이뤄졌음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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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지침은 참으로 알뜰하고 친절(?)했으며 세심하고도 근엄했다. “야당 질문내용은 빼고 ‘그저 했다’라고만 보도할 것”같은 직접적인 전달사항 말고도 형용사를 많이 사용했다. ‘눈에 띄게’ ‘크지 않게’ ‘돋보이게’ ‘균형 있게’ 아 이 얼마나 기자들의 자율성을 존중하는 보도지침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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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제 편집국장 월급을 대신 받아갈 듯한 지침도 많다. “국회 유회 공전된 것은 스트레이트 3~4단으로 보도. 스케치 기사는 안되고 해설 박스기사는 좋음.” “주한상공회의소 학생 난입사건의 처리방침 발표 예정. 사회면 톱이나 중간톱으로 다루지 않기를. 사이드톱 정도가 좋다고 판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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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가 진짜 중대한 사태에 직면하면 말투가 바뀐다. “성고문사건 검찰 조사결과 발표 내용만 쓰고 시중에 나도는 반체제측 고소장 내용 일체 보도하지 말 것. 발표 이외 독자적 취재는 불가.” “ KBS 시청료 거부 관계 기사 및 KBS라는 표현도 일체 쓰지 말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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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언 기자가 빼돌린 보도지침은 홍제동 성당 신부 김승훈과 국회의원 이철 등에게도 전달됐고 어떤 경로로 폭로할 것인가가 논의됐지만 그래도 언론인 관련 단체와 매체를 통한 폭로가 적합하다고 의견이 모아졌다. 이 창구가 해직언론인 등이 중심이 된 민주언론운동협의회였고 그 기관지인 ‘말’지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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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지에 보도지침이 폭로되자 그야말로 세상은 아니 권력은 (보도가 되지 않았으니 보통 사람들은 알 수가 없었다) 발칵 뒤집혔다. 말지 제작진은 일제히 잠적했다. 그 중 발행인이었던 김태홍이 체포됐고 그 뒤에 민언협 실행위원이었던 신홍범이 달려 갔다.이들을 다그쳐 알아낸 것이 김주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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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서 출근하다가 출근길에 건장한 경찰, 사복 경찰관들이 한꺼번에 덮쳐서 완전히 고개 숙이고 옷으로 머리를 감싼 뒤에 차에 실려서 끌려갔거든요. 그러고 난 뒤에 신문사에 출근해야 하는데 신문사에도 안 오고, 집에서도 저녁에 안 오고 하니까 상당히 고심을 했던 것 같아요. 고심도 하고, 걱정도 하고. 그 당시에 제가 끌려간 곳이 남영동 대공분실이거든요, 그곳이 박종철 군이 물고문으로 죽은 장소인데, 그래도 기자 출신이니까 이 사람이 끌려 왔다는 이야기를 신문사에 통보해주고, 신문사에선 집에다 연락해줘서 그때부터 알게 된 거죠.” (김주언 TBS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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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잡아가서 그들에게 적용한 법은 무엇이었을까? 웃을 준비하시고..... “국가보안법 위반, 외교상 기밀 누설, 국가 모독,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이었다. 보도지침 폭로가 그 안위를 좌우할만큼 허약한 국가라는 고백은 그렇다고 치고 ‘외교상 기밀 누설’에는 폭소가 터진다. 왕년의 소련 농담, “브레즈네프(공산당 서기장)는 돌대가리.”라고 외친 모스크바 시민에게 적용된 법이 국가원수모독죄와 ‘국가기밀 누설죄’라는 블랙 유머의 한국판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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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특집호 발간 후 말지는 상당 기간 나오지 못했다. 당연하다 역린을 건드린 정도가 아니라 용이 문 여의주를 빼내 농구를 했으니 5공 정권의 서슬 아래 다시 해를 보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말지는 다시 나왔다. 말지 발행인 송건호는 복간 회의에서 회의적 입장을 밝히는 사람들에게 평소의 그답지 않은 분노를 터뜨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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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인이었던 김태홍이 구속된 후 다시 발행인을 맡고 있던 송건호는 뜻밖에 단호했다. 이만한 일로 주저앉아서는 조직이 보위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반대쪽이 끝내 의견을 굽히지 않자 송건호가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그렇게 겁이 나면 당신은 나오지 말아요!’” (정지아, <나는 역사의 길을 걷고 깊다 –참언론인 송건호의 생각과 실천>, 한길사) 그렇게 말지는 다시 나왔고 나의 대학 시절을 관통해 21세기까지 이어지다가 그 막을 내렸다. 내 어찌 이 말지(誌)를, 그나마 손에 들어왔던 역사를 버릴 것인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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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포스팅을 읽으면서 그렇게 옛날 언론인들은 용감했는데 지금 ‘기레기’들은 뭐냐 흥분하는 분들도 계시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오히려 그분들에게 이렇게 묻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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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감한 언론인들은 지금도 용감하고, 할 말 하는 언론인들은 오히려 예전보다 많으나 단지 당신의 마음에 들고 들지 않고를 기준으로 기레기라는 호칭을 쏟아붓고 있는 것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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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당신과 생각을 같이 하는 사람들이, 당신과 생각과 다른 논조를 펴는 언론인들에 대해 가하는 비난과 ‘양념’이 과연 보도지침을 내리던 사람들의 ‘우국충정’과의 거리가 얼마나 멀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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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가짜뉴스’ 때문에 언론의 ‘개혁’이 필요하다는 논리가 ‘사이비 기자’ 때문에 언론통폐합이 정당하다는 5공 인사들의 논리와 무슨 차이가 있을까. ‘김정숙 여사’라고 안하고 ‘김정숙씨’라고 그 난리를 쳤던 당신들은 ‘보도지침’을 강요했던 것은 아니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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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건호가 말지 복간을 앞두고 머뭇거리는 인사들에게 노호를 터뜨릴 때 그 옆에서 송건호에게 시쳇말로 ‘뿅간’ 사람이 있었다. 당시 민언협 간사였던 최민희다. 그녀의 헌신을 존중하고 그 이력으로 국회의원까지 역임한 것에는 하등 불만이 없다. 하지만 명색 언론운동을 한 사람으로서 최근 그녀가 한 말은 송건호 선생의 불벼락을 맞기에 손색이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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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애초 조국 전 장관이 대한민국의 초엘리트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초엘리트로서 그 초엘리트만의 인간관계가 형성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 자식들은 굳이 불법이나 탈법이나 편법이 아니더라도 그 초엘리트들 사이에 인간관계 등으로 일반 서민이 갖지 못한 어떤 관계들이 있다. 그게 불법적이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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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이런 말을 함으로써 오히려 조국 전 장관을 모욕했고 “사회적 특수계급의 제도는 인정되지 아니하며, 어떠한 형태로도 이를 창설할 수 없다.”는 대한민국 헌법 11조 12항을 우롱했으며 5공 때 문공부 관계자도 차마 하지 못할 농단으로 ‘서민’들의 마음을 다치게 했다. 송건호의 분노를 들으며 어머 저런 분이 계셨구나 감동한 젊은 날을 돌아본다면 과연 할 수 있는 말일까.

보도지침을 폭로한 날, 당시 민언협 회장이었던 송건호 선생의 말로 글의 문을 닫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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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인들은 다투어 곡필을 비웃고 그러한 지식인은 이미 지성인이 아니라고 단정하기를 서슴지 않는다. 그러나 직필 하기가 얼마나 어렵고 얼마나 큰 용기가 필요한가에 대해서는 그다지 깊은 검토가 없는 듯하다. 현실을 지배하는 것은 대부분 조소의 대상인 바로 그 ‘곡필’이며 당연한 것처럼 생각되는 ‘직필’은 놀랄 만큼 읽어보기가 어렵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숨길 수 없는 한국의 현실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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