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4년 9월 1일 비가 오면 생각나는 망원동

in #kr4 years ago

1984년 9월 1일 비가 오면 생각나는 망원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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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 변화 때문인지 뭣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올해는 정말이지 비와 친하다. 쨍쨍 맑다가도 어느 결에 다가온 먹구름이 한바탕 샤워라도 시키듯 쏟아붓고 가는 일이 잦아서 본의 아니게 영국 신사들처럼 우산을 스틱삼아 가지고 다녀야 하나 싶을 정도다. 또 하늘이 작심이라도 한 듯 들이퍼붓는 날이면 아이고 또 어느 동네에 물난리 나는 거 아닌가 오지랖이 저절로 떨리기도 한다. 한반도에는 큰 홍수가 많이 있었지만 서울 지역을 강타한 대홍수는 1925년과 1972년 1984년을 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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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홍수 통제소가 있는 한강인도교의 위험 수위 기준은 10.5미터인데 1925년은 11.26미터 1972년에는 11.24미터, 1984년에는 11.03미터를 기록하며 가뿐하게 위험 수위를 뛰어넘었다. 3위라고 무시할 건 아니다. 1984년 서울 지역 1일 최대 강우량은 무려 298.4 mm, 기상 관측 시작 이후 최대 규모의 물폭탄이었다. 그런데 이 세 번의 대규모 수해마다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불운한 동네가 있으니 그것이 마포구 망원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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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 망원동은 망원정이 있는 동네라 하여 붙은 지명이다. 세종의 형 효령대군이 처음 지었고 세종이 행차했을 때 마침 가뭄을 끝내는 비가 내려 기쁜 비의 정자, 즉 희우정(喜雨亭)이라 했는데 효령대군이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에게 하사하면서 ‘망원정’(望遠亭)으로 이름을 바꿨다. 망원정이 사라진 것은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였다. 당시 동아일보 기사를 보면 정자 따위를 신경쓸 여력이 있었을 것 같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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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화가 불지른 전쟁터라 하더라도 타고 남은 기둥이나 허리찢긴 나무 그림자는 찾을 수 있을 것이요 가장 심한 지진이 있은 후라도 쓰러진 집의 형태는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망원리 (당시 행정구역은 고양군 연희면 망원리)에는 아무것도 없다. ‘일본의 지진이 차라리 나았겠지. 모두 죽은 것만 못하지 농사나 부쳐먹던 것이 저꼴이 되었으니 무엇 먹고 산단 말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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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원동은 홍제천이 한강과 합류하는 곳으로 폭우가 쏟아지고 서해 바다의 밀물이 겹치면 쉽사리 피해를 보는 곳이었지만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는 온 동네가 고스란히 떠내려 갔던 것 같다. 동네 자체가 지대가 낮았다. 망원동 강둑은 마포 일대보다 8미터 가량 낮았다고 하니 대한민국 수도(首都)가 아니라 수도(水都)라는 악명을 떨치던 서울 시내에서도 대표적인 홍수 취약 지구였다. 아울러 분뇨 취약지구(?)이기도 했다. 근처의 상암동에 서울의 쓰레기들이 산을 이루고 있었다면 망원동에는 분뇨 처리장이 있어서 똥물이 강물처럼 흘렀다. 망원동 일대의 수천 개의 판잣집 주민들은 여름철이면 그 냄새도 냄새지만 거기서 올라오는 파리며 독나방이며 하는 해충들 때문에 곤욕을 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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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우연히 남루한 옷을 입고 뛰놀던 아이들을 뒤따라가 봤다가 이 처참한 상황을 본 장신대 교수 주선애는 이렇게 부르짖었다. “주님 왜 보여주셨습니까.” (국민일보 2017년 4월 11일) 이 끔찍하고 퀴퀴한 기억을 학생들과 나누며 “이런 곳이야말로 우리 삶과 신앙의 현장이 아닐까” 조심스럽게 얘기를 전했는데 강의 후 누군가 주 교수를 따라나오며 말을 걸었다. 간단했다. “선생님 한 번 가 볼래요.” 이상양 전도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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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몇몇 친구들과 함께 망원동으로 향했다. “ 공동화장실을 만들자고 의기투합했다. 누구보다 열심이었던 이 전도사는 아예 뚝방마을에 월세방을 구해 눌러앉았다.” (위 신문) 그러나 이상양 전도사가 의욕적으로 낮은 자들 사이로 스며든지 두어 달 뒤 대홍수가 망원동을 덮쳤다. 이상양은 쏟아지는 비와 차오르는 물 속에서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망원동 사람들을 고지대의 초등학교로 대피시킨다. 또 뗏목을 얼키설키 만들어 똥물반 빗물반의 검은 물을 헤치며 목만 내밀고 있는 사람들을 구했다. 넋이 나간 사람들을 제쳐 두고 구호품을 얻기 위해 가장 동분서주한 것도 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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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양 전도사를 이런 구렁텅이(?)에 빠뜨린 것이 안스러운 주 교수가 전도사에게 등록금을 하라고 돈을 주면 금방 뚝방촌 사람들을 돕는 데 다 써 버렸다....공부를 중단한 아이들을 위해 18㎡(약 9평)짜리 공간에 세를 얻어 장로회신학대에서 낡은 의자를 가져와 야간 중학교를 만들었다. 첫날 수업을 시작하기 전 먼저 기도하자고 했더니 기도시간에 분필이 날아오는 등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이 전도사가 없는 돈으로 밥을 지어놓고 심방을 가면 아이들이 와서 먼저 다 먹어 버리곤 했다.” (국민일보 2019년 7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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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열심히 활약하던 이상양 전도사는 폐결핵 환자였다. 자신의 몸도 곯아갔지만 그는 천상 “우는 자들과 함게 울고” “가난한 자들에게 축복하던” 예수의 제자였다. 스승인 주선애 교수는 제자의 엉뚱한 질문에 당황할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선생님. 버스 안내양들이 하루에 몇 번이나 문을 열고 닫는지 아세요?” “모... 몰라?” “천사백번이래요 글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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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이 없는 사람은 알 수 없고 알지 못하면 느낄 수도 없는 법이다. “선생님 돈 백만원만 있으세요?” “갑자기 왜?” “구두닦는 아이들이 자릿세만 내지 않아도 애들이 공부할 수 있습니다. 집이 있으면 합숙을 시키면서 자리를 하나 둘 살 수 있고 그렇게 되면 이 아이들이 공부를 할 수 있습니다. 혹시 셋집은 하나 얻을 수 없을까요? 100만원이면 될 텐데요.” 주선애 교수는 턱없이 웃어 넘겼지만 그게 그의 마지막 부탁이 된다. 망원동에서 6년간 삶을 불태운 이상양 전도사는 1977년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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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삶이 아로새겨진 망원동은 그 뒤 새롭게 변화했다. 분뇨 처리장도 옮겨졌고 성산대교가 뚫리고 홍수를 막기 위한 거대한 유수지가 만들어졌고 둑방도 새로 쌓아 보강했다. 더 이상의 홍수는 없을 것으로 예측한 중산층이 몰려들어 인구도 엄청나게 늘었다. 적어도 주선애 교수가 “왜 이런 걸 보여 주십니까?”라고 한탄했던 동네와는 천양지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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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1984년 9월 1일 또 한 번의 수마가 망원동을 덮친다. 믿었던 유수지 제방이 터지면서 수천 가구가 일시에 물에 잠겼다. 별안간 가슴께까지 차오른 물살을 헤치며 주민들은 필사적으로 고지대로 피신했다. 당시 중동초등학교에만 3천명의 주민들이 아우성을 치고 있었다니 사태를 짐작할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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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디앙 사진

그저 수재민으로서 수해 구호 물자나 받아서 망가진 집에 돌아가 한바탕 울고 어떻게든 다시 살아가는 것이 대한민국 국민의 도리(?)이던 시절, 헝클어진 머릿결의 한 변호사가 수재민들 사이를 누비며 외친다. “이건 자연재해가 아니라 부실 공사와 유수지 물관리 잘못으로 발생한 인재(人災)입니다. 국가에 소송을 제기합시다. 돈 걱정은 마십시오. 승소하면 받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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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래 변호사였다. 처음에는 무슨 미친 소리 하느냐 약올리느냐 하던 주민들이 태반이었고 소송단은 불과 5명이었지만 뚝심 좋은 조영래 변호사는 계속 밀어붙였다. 6년여의 긴 시간 끝에 3700여 명이 모이는 소송단이 꾸려졌고 서울시와 한판 승부가 벌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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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는 망원동 유수지 공사 중 발생한 부실공사의 증거를 담은 '토목학회' 결과보고서를 은폐하고, 천재에 의한 사고라는 주장을 펼쳤다. 그러나 지역 주민들의 증거보전 노력과 조영래 변호사, 박원순 변호사 등의 현장에 대한 증거보전 신청. 더불어 배수로의 부실관거 공사와 물을 막아야 하는 수문상자가 원래 계획보다 작게 설계 시공된 사실, 벽과 바닥의 방수처리 미흡 등의 내용을 담은 연세대의 사고보고서가 함께 제출되며 소송은 망원동 주민의 승리로 끝나게 된다.” (오마이뉴스 2017년 11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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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문은 그렇게 누군가 돌을 던질 때 일어난다. 그리고 던져지는 돌들이 많아지면 새로운 지형이 생겨나고 말랐던 곳에 물이 차고 흘러야 할 곳으로 물이 흐르게 된다. 조영래 변호사처럼, 그리고 지도 교수가 “왜 이런 걸 제게 보여 주십니까?” 한탄할만큼 암담한 동네에 “제가 한 번 가 보겠습니다.”하고 손을 들고 서슴없이 뛰어들었던 이상양 전도사처럼, 오늘날 망리단길의 화려한 조명에는 그들의 자취도 스며들어 어슴푸레 빛을 발하고 있을 것이다. 비가 오면 생각나는 망원동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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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잊혀지는 사람들을 살려내시는 군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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