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7년 9월 16일 신의 목소리 에게 해에 지다

in #kr4 years ago

1977년 9월 16일 신의 목소리 에게 해에 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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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필라델피아>는 인상 깊은 영화였습니다. 흑인 변호사 덴젤 워싱턴과 성적 소수자이며 AIDS 환자인 톰 행크스. 둘 다 설악산 흔들바위만한 콤플렉스를 가슴에 담아 두고 살던 두 사람이 한 편이 되어 법정 투쟁을 준비하게 됩니다. 둘은 쉽게 마음을 열지 못하죠. 톰 행크스와 악수만 하고도 병원으로 달려가서 검사를 받는 덴젤 워싱턴의 모습에서 우리는 그들간에 놓인 거리를 짐작하게 됩니다. 한 방에 있어도 십 리는 떨어져 보이던 그들의 간극을 좁힌 것은 어느 오페라의 아리아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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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베르토 조르다노의 오페라 '안드레아 셰니에' 중 여주인공 코와니 마달레나의 아리아 ‘La Mamma Morta’였지요. 이 아리라를 듣고 황홀경에 빠지는 통 행크스를 보며 덴젤 워싱턴은 손만 닿아도 병에 걸리는 줄 알았던 이 병균덩어리가 예술에 감동할 줄 아는, 존엄할 권리를 지닌 인간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 결정적인 전기를 마련한 아리아의 주인공이 바로 신의 목소리 마리아 칼라스(1923~1977)였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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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미국 뉴욕에서 약국을 운영하던 그리스 이민자의 딸로 태어납니다. 태어날 때 5킬로그램의 초우량아였던 그는 날씬하고 예뻤던 언니에 비해 찬밥 대우를 많이 받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목소리 하나는 타고났기에 곧 두각을 드러냈습니다. 부모는 가게를 팔아가며 딸들에게 음악 교육을 시키려 했는데 어머니 에반겔리아의 교육열이 더 유난했습니다. 그녀는 남편과 별거를 감행하면서까지 딸들을 데리고 그리스로 돌아가 버립니다. 칼라스의 나이 열 세 살 때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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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의 뜻을 이루지 못한 한을 딸들에게 대행시키려던 이 한국적인(?) 그리스 엄마를 마리아 칼라스는 무척 싫어했다고 하고 어느 시점에서는 평생 안 보겠다고 의절해 버릴 정도였다고 합니다만, 마리아의 그리스행은 일단 성공적이었습니다. 최초의 스승이라 할 엘비라 데 이달고를 만났기 때문이죠. 그의 엄격하고도 자상한 지도 속에 노래는 일취월장을 했는데 노래 실력과 함께 불어나는 게 하나 더 있었습니다. 그녀의 몸무게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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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 예민하던 청소년기 제2차 세계대전이 터졌고 이탈리아가 그리스를 침략해 옵니다. 그리스군은 용감히 싸워 이탈리아군을 혼쭐을 내 줬으나 징징대는 이탈리아 뒤로 진짜 빌런 독일군이 몽둥이를 들고 나타납니다. 독일에 점령당한 그리스 국민들은 극심한 곤궁을 경험하게 됐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마리아 칼라스는 “있을 때 먹어 두자. 먹는 게 남는 거다.”라는 세계관을 체화합니다. 음식을 몰래 숨겨 뒀다가 혼자 와구와구 먹어 대는 버릇이 있었다고 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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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중이 100킬로그램에 육박했지만 그만큼 성량도 풍부해진 마리아 칼라스는 그리스 오페라단의 평생 회원이 됐고 이후 다시 미국으로 금의환향(?)했는데 그렇게 두각을 드러내지는 못했습니다. 목소리는 기가 막히지만 아니 어떻게 헤비급 챔피언 조 루이스 같은 체중의 여자에게 아이다 공주와 나비 부인과 ‘춘희’ 역을 맡길 수 있단 말이야? 하는 것이 극장 관계자들의 군소리였죠. 미국에서 별 볼일을 찾지 못했던 마리아는 이탈리아로 활동 무대를 옮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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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그녀는 자신의 진가를 알아봐 준 후원자이자 매니저 메네기니와 사랑에 빠지죠. 아버지와 동갑이었으니 나이 차이가 어지간합니다. 어쨌든 둘은 결혼에 골인했고 이탈리아에서는 꽤 유능한 매니저였던 남편의 활약과 본인의 천재성이 결부돼 마리아는 큰 명성을 얻게 됩니다. 그런데 메네기니와 마리아 사이는 한 쌍의 매니저와 소프라노 가수로서는 잘 어울렸지만 부부라기보다는 큰오빠와 여동생에더 어울리는 색깔이었습니다. 이후 마리아 칼라스가 한눈을 판 이력을 보면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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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20세기 최고의 디바가 남편 외에 새로운 연정을 품은 대상은 연출가 루치아노 비스콘티였습니다. 비토리오 데 시카, 로베르토 로셀리니와 더불어 소위 이탈리아 네오 리얼리즘 3대 영화감독으로 꼽히는 거장이며, 연극과 오페라 무대에도 대단한 실력을 발휘했던 사람이었죠. 마리아 칼라스는 이 사람에게 푹 빠졌습니다만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었습니다. 비스콘티는 성적 소수자였거든요. 비스콘티는 사랑은 주지 못했으나 마리아의 운명을 바꿔 놓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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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로마의 휴일>이 전 세계를 풍미할 때였습니다. 오드리 헵번의 날씬한 몸매에 마음을 빼앗긴 건 마리아 칼라스가 비스콘티에게 묻습니다. “제가 저 정도 되면 어떨 거 같아요?” 그러자 비스콘티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저 정도만 되면...... 진짜 환상적인 트라비아타(춘희)가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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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부터는 영화가 아닌 실사판 <미녀는 괴로워>가 시작됐습니다. 한국 영화에서는 ‘의느님’이 개입하지만 마리아 칼라스는 오로지 자신의 의지로 초인적인 다이어트를 시작했고 1년도 안돼 36킬로그램을 감량해 버립니다. 마리아~~ 아베 마리아~~~ 이 날씬해진 몸으로 마리아는 1955년 밀라노의 라 스칼라 극장에서 비스콘티 연출로 무대에 올려진 <라 트라비아타> 의 주연을 맡았고 그야말로 감동의 무대, 천상의 목소리를 펼쳤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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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그녀는 20세기 최고의 디바라는 호칭에 전혀 손색이 없는 대스타가 됐습니다. 한때 방에다 음식을 잔뜩 숨겨두고 와구와구 폭식하던 뚱보 소녀는 전 세계인이 선망하고 유럽의 유수한 부호와 귀족들이 다투어 초대하는 특급 게스트가 되기도 했죠. 어느 날 마리아는 남편 메니기니와 함께 그리스의 선박왕 오나시스의 요트에 초대를 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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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나시스는 그 이전부터 마리아 칼라스에게 눈독을 들이고 있었습니다. 파티 옆자리를 일부러 (거금을 들여) 차지한다거나 어마어마한 선물을 한다거나. 요트 초대는 이른바 서론 끝낸 뒤 ‘본론’에 해당했습니다. 남편 메네기니는 본능적으로 초대에 응하기를 반대했지만 마리아는 이미 호화 요트 여행 상상으로 허공 위의 질주를 하고 있었죠. 막상 요트에 올라보니 그곳은 완벽한 별천지였습니다. 호화롭기는 이루 말할 수가 없고, 더 눈이 번쩍 뜨이는 건 그 요트가 거의 누드 요트였다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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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승객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갑판 위를 활보하며 일광욕을 즐겼고 일부 승객은 처음 보는 사람과 대담하게 사랑을 나눴다. 보수적인 연애관에 사로잡혀 있던 칼라스에게 그것은 새로운 세계의 발견이었다. 기가 막힌 것은 오나시스 역시 나체로 갑판을 활보하는 사람 중의 하나였다는 점이었다.” (한국경제신문 2013.3.15. 허무함만 남긴 오나시스와의 열애…빈 가슴 채운 건 팬들의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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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거짓말같은 별천지에서 마리아는 오나시스의 유혹에 홀딱 넘어가 버립니다. 남편이 함께 있었는데도요. 항해가 끝난 뒤 남편은 허둥지둥 이미 넋이 나가 버린 아내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가지만 오나시스란 사람은 정말 걸물이었습니다. 그는 마리아의 집에 찾아가 자신을 맞는 남편에게 이렇게 외칩니다. “당신의 아내에게 청혼하러 왔습니다.” (위 신문) 아마 세계사적으로 이렇게 뻔뻔하고도 비도덕적인(?) 청혼은 없었을 것 같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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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 칼라스는 아버지와 동갑이었던 남편 메네기니 따위는 깡그리 잊고 오나시스와 사랑에 빠집니다만 오나시스는 사랑을 쟁취하는 순간 그 사랑과 굿바이를 시작하는 묘한 인간이었습니다. 오나시스의 마음에 들기 위해 음악 활동도 중단하다시피 하고 미국 국적을 버리고 그리스 국적까지 취득하면서 (그리스 법은 그리스 정교 식 결혼만 인정했으므로 메네기니와의 결혼은 자동 무효)오나시스를 차지하려 들었지만 오나시스는 이미 마음이 떠나 있었습니다. 심지어 임신한 마리아에게 아이를 지우라고 압박할 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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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나시스의 곁에 가장 오래 있었던 여성이기는 했으나 그녀는 끝내 ‘오나시스 부인’의 칭호를 얻지 못합니다. 그 부유한 호칭을 가져간 건 JFK의 부인 재클린 케네디였죠. 그래도 마리아 칼라스는 오나시스를 포기하지 못했습니다. 오나시스는 연애 관계에 관한한 사이코패스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재클린이랑 신혼여행가서 몰래 마리아에게 전화해서는 달링 어쩌고 하는 놈이 어찌 사람이겠습니까. 그러나 이미 마리아도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거기서 “내게 돌아와 줘요.”라고 매달린단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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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나시스와의 시간은 마리아 칼라스를 완전히 망쳐 놓았습니다. 이미 노쇠 기미를 보이고 있었지만 재기 무대에서도 마리아 칼라스는 예전같은 디바의 모습은 보여 주지 못했습니다. 그녀의 마지막 무대는 뜻밖에도 한국이었다 고합니다. 일본에서 공연한 뒤 한국에 건너온 마리아는 1974년 이화여대 대강당에서 공연을 가지게 됩니다. 당시 한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하고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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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는 평생 남편, 그리고 또 다른 남성을 사랑했던, 커다란 두 사랑이 있었다. 그러나 누군가 매력있는 사람이 나타나 나를 데려가기를 바라고 있었다.” 이런유별난 열정(?)을 드러내면서도 그녀는 다음과 같은 범상한(?) 말도 남깁니다. “매력적인 사람이 나타나면 노래를 그만두고 평범한 아내와 어머니로 행복을 찾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평범한 아내도 어머니도 되지 못하고 1977년 9월 16일 쓸쓸히 세상을 떠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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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듀서 월터 레그의 표현이 참 적절한 것 같습니다. “칼라스의 삶은 마치 안전망을 제거하고서 채 공중 3단뛰기를 시도하는 곡예사와 같았다.” 위태위태하지만 뜨거운 갈채를 받았던 , 무모할이만큼 저돌적이었던 그녀의 안전망을 치워 버린 것은 오나시스였습니다. 그리고 다시 그녀는 줄을 타지 못했습니다. 화려했던 자신의 모습을 스스로 음미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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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있으면 9월 16일.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며<필라델피아>의 톰 행크스가 돼 볼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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