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5년 9월 5일 검사다웠던 검사들 그 후

in #kr2 months ago

산하의 오역
1965년 9월 5일 검사다웠던 검사들 그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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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을 적고 보니 문득 ‘호랑이 담배 먹을 때’나 ‘공룡이 활개칠 때’ 같은 관용어가 생각나서 뭔가 아련하다. 자타가 공인했던 (요즘은 좀 아닌 거 같아서) 대한민국 최고의 파워 집단 검찰은 그 위상만큼이나 악명이 높았고, 최근까지도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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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도 나쁜 짓 많이 하지만 정말 나쁜 놈은 검찰이다.” 어렸을 적 아버지가 늘상 하신 말씀이다. 그 뒤에 “그러니 공부 열심히 해서 좋은 검사 돼라.”가 따라붙기도 했지만 말이다. ‘전교 1등 후 의대생’이 최근 이과생들의 로망이라면 일제 강점기 때부터 문과생의 로망은 ‘고시 패스 후 판검사’가 아니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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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사실 검찰이 요즘 같은 위상(?)을 지닌 건 사실 6공화국 이후다. 검사 끗발이 어느 시대에나 구름 아래로는 내려온 적 없지만 그래도 하늘 위의 하늘이 꽤 있었던 것이다. 중앙정보부 같은 정보 기관에서 쪽지를 들이밀면 검사는 그대로 구형해야 하는 ‘정찰제’ 구형을 해야 할 때도 있었고 “기천 명 검찰이 12만 경찰하고 해 보자는 거냐.”면서 대놓고 경찰이 검찰에 엉길 때도 있었으니까. (5공 시대) 하지만 원래 사람이든 조직이든 어려울 때 그 진가가 드러나는 법이다. 대한민국 검찰이 가장 검찰다웠던 리즈시절은 1965년 9월 5일을 전후하여 전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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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 8월 14일 ‘남산 돈가스’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이 마이크 앞에 섰다. “4‧19직후 조직된 통일민주청년동맹(통민청)과 민주민족청년동맹(민민청), 그리고 사회대중당과 진보당 및 빨치산 출신들이 김영춘(金永春, 남파간첩)의 지도아래 인혁당을 결성하고 학생시위를 배후에서 조종, 정부타도 운동을 벌이게 했다.” 이른바 1차 인혁당 사건. “일당 57명 중 41명을 구속하고 나머지 16명을 전국에 수배 중”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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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실 전쟁 전과 전쟁 중, 그리고 전쟁 후 내내 지속된 남과 북의 첩보전과 상호 파괴 공작의 비밀은 통일된 뒤에나 제대로 그 전모가 밝혀질 것이다. 우리가 기절할한 비밀이 지하 속에 잠자고 있을 수도 있다. 인민무력부장을 지낸 아무개가 우리 스파이였다거나 몇 선 국회의원 아무개가 보위부 공작원 암호명 거시기였다거나. 저 많은 간첩단 중 일부는 진짜였을 것이다. 그리고 간첩의 ‘존재’가 간첩의 ‘제조’를 정당화할 수는 없었다. 우리의 암흑기는 그걸 가능케 했고 오히려 조장했다는 점에서 암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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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인혁당도 그랬다. 문제는 그 증거였다. 중앙정보부 수사관들이 무슨 심증을 가지고 어떤 매를 때려 자백을 받아냈든 북한이 위협한다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었고 증거법정주의를 채택한 나라였고 검찰은 그 증거에 따라 기소하고 판사는 양심에 따라 판결해야 하는 나라였다. 그러나 그 증거들이 대개 엉터리였다. 당시 공안기관 총감독이라 할 중앙정보부는 수사 결과를 검찰에 넘기고 기소하라는 사인을 냈다. 그런데 사인이 엉켜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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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사 결과를 넘겨받은 건 서울지검 공안부 이용훈 부장검사와 김병리, 장원찬,최대현 검사 등이었다. 그런데 수사 기록을 들춰봐도 그렇고 증거를 들여다봐도 그렇고 이건 앞뒤좌우는 물론이고 아귀와 견적이 전혀 맞지 않는 엉터리였다. 이들 역시 공안검사였다. “우리의 공안부 네 검사는 보안법 관계 사실에 대하여는 추호의 용서도 하지 않기로 유명한 분들”(동아일보 1964년 9월 10일) 이라는 평을 듣는 ‘반공 검사’였다. 그런데 그들이 보기에도 중앙정보부의 수사는 목불인견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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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중대한 사건을 증거도 없이, 또 검찰에 송치도 하기 전에 전 국민을 상대로 대대적으로 발표부터 해버린 중앙정보부가 원망스러웠다.”는 이용훈 부장검사의 회고에서는 여러 가지 뉘앙스가 풍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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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안검사인 그도 인혁당 사건을 가볍게 보지 않고 ‘중대하다’고 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증거도 없이’ 하다못해 검찰 송치도 전에 발표를 해 버렸으니 더 이상 나올 증거도 증인도 없다. 대체 나더러 어떡하냐는 지극히 ‘법률가적인’ 반발이었다. 이 인혁당 사건 관련자 구속 만기일이 1964년 9월 5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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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을 앞두고 벌어진 검찰 내의 인혁당 기소 공방전(?)은 만화처럼 재미있다. 8월 말, 이용훈은 서울지검장 서주연에게 기소하지 못할 것 같다고 보고했다. 이때 서주연의 대답은 요즘 말로 ‘견찰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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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소를 못하면 정부의 위신이 뭐가 되나? 어떻게든 (기소)해 봐야 도는 거 아니오?” 서주연은 기가 막혀 했지만 정작 기가 막힌 건 이용훈 쪽이었다. 이용훈 검사는 그저 ‘검찰스러웠다.’ “어떻게 해 보라는 말씀은 증거가 없어도 기소하라는 말씀입니까?” (한겨레신문 2010년 4월 18일 한홍구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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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31일 이용훈 부장검사는 검찰총장에게 인혁당 불기소건을 건의했지만 당연히 퇴짜를 맞는다. 이때 검찰총장 나이 서른 여섯 살. 박정희 대통령이 사단장 시절 법무참모를 한 인연이 동앗줄이 된 사람이었고 전직은 중앙정보부 차장이었다. 말이 먹힐 리가.... “더 들여다 보시오.” 다음 날 9월 1일 이용훈 부장검사는 법무부장관 민복기, 차관 권오병 이하 별무리같은 간부들 앞에서 다시 불기소 의지를 밝힌다. 그때 권오병 차관과 이용훈 검사의 문답 역시 우리 역사에 기록될 명문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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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갱이 사건에 일일이 증거 운운할 수 있겠소? 정보부에서 받아낸 피의자들의 자백을 검사들은 왜 못 받아내는 거요? 정보부에서 자백한 것이 있으니 그대로 공소제기를 해도 되지 않겠소?” (권오병)
“차관님,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차관님께서는 대학에서 형사소송법을 강의하시면서 학생들에게도 그런 식으로 가르치십니까?”(이용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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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여곡절 끝에 서울지검 공안부 이용훈 부장검사와 김병리·장원찬·최대현 검사는 9월5일 증거불충분으로 “양심상 도저히 기소할 수 없으며 공소를 유지할 자신이 없다”며 공소장 서명을 거부했다. 이에 신직수는 당직검사 정명래를 통해 이 가운데 26명을 국가보안법상의 반국가단체 결성 혐의로 기소했고 이에 반발해 이용훈·김병리·장원찬 검사는 사표를 제출하기에 이르렀다 대한민국 검찰이 역사이래 전과 후를 통틀어 가장 빛났던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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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나오는 이름들은 이른바 ‘불멸의 신성가족’ (김두식 교수 표현)들이다. 이 사건 이후로 몰락하거나 슬프게 인생 마감한 경우는 없다고 해도 무방하다. 이용훈 부장검사는 끝내 사표를 내고 검찰을 떠나야 했다. 검사 인생으로서는 쓴잔이지만 이후 변호사 생활을 했고 동백림 사건 당시 변호사로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이력보다 나는 그가 상관들과 나눈 문답 하나 하나가 무척 소중하고 보배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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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검장에게 이렇게 들이받고, 대통령 법무참모 출신인 검찰총장에게 딱딱 들이대고 차관에게 “애들한테 그렇게 가르칩니까?”라고 일갈하는 부장검사. 아니 어떻게 된 게 50년 전보다 ‘상명하복’은 열 배는 더 굳건하고 검사동일체의 원칙은 철의 기지로 튼튼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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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 원래 중앙정보부의 지침에 개긴 공안 검사는 네 명이었다. 그런데 사표를 낸 건 세 명이다. 한 명은 슬쩍 빠진다. 이름은 최대현. 김형욱 회고록에서 그는 이렇게 묘사돼 있다. ‘최대현은 서울지검 공안부에서 나의 심복처럼 움직이던 젊고 유능한 검사’. 김형욱은 이 젊고 유능한 심복에게 전화를 건다. 그의 회고록을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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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어떻게 사건을 처리하고 있는 거요? 중앙정보부를 그렇게 망신을 주어야만 되겠나?”
“죄송합니다, 부장님. 저는 기소할 만한 요건이 충분하다고 계속 주장해왔습니다만 이용훈 부장검사께서 이를 완강하게 반대하고 있습니다” 되레 이용훈을 옭아매는 듯한 이 강직한 듯하나 무한히 간사했던 검사의 농간. 아니나다를까 그는 막판에 사표를 내던지는 검사진에서 빠진다. ‘개인적’인 사유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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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로도 그는 유능한 정권의 심복 노릇을 한다. 정인숙 여인 살해 사건을 맡아 고위층들의 치부를 가려 주었고 남과 북 모두에서 살기 버거워했던 ‘리버럴’ 이수근을 위장간첩으로 규정하고 기소하여 사형을 때려 버린 이가 바로 최대현이었다. 검찰에서 물러난 뒤에도 관세청장 등을 역임하며 아늑하고 우아하게 살다가 승마 사고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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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리 검사는 사표 소동이 무마되면서 검찰에 남아 계속 일했다. 1970년대 중반 밀수의 천국 여수에서 젊은 세관원이 밀수선 선주의 아들의 칼부림에 살해당하는 일이 벌어졌는데 그 뒤 청와대 특명 사정반원들이 들이닥쳤다. 김병리는 그 책임자였다. 월남민 출신으로 경찰 출신이기도 했던 그는 한동연 여수 바닥에서 저승사자로 통했다. 또 저 유명한 삼학소주 사건을 맡아 한때 소주 점유율 40%를 자랑했던 삼학소주를 끝장낸 장본인이기도 하다. (삼학소주가 DJ정치자금을 댔기에 망했다는 얘기는 DJ의 장남 고 김홍일 의원이 부정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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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 당시 스물 일곱의 패기넘치는 장원찬 검사는 후일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피의자들 모두가 인혁당이란 단어를 들어본 일이 없고 모두 고문에 의해 한 것이라고 혐의사실을 강력히 부인했다. 그건 증거로서 효력이 없다. 하다못해 심증이 갈만한 무슨 종이쪽지라도 있어야 할 텐데 정말 하나도 없어 답답했다. .....” 이분 역시 서울시 부시장, 의료보험협회장 등을 역임하며 가파른 한국 현대사를 여러 층 위에서 굽어 보며 살아 오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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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인지 뭔지 모르겠으나 1964년 9월 5일 권력에 저항했던 검사들은 그들이 기소하고 수사했던 사람들에 비해서는 몰락하지도, 비참하게 생을 마감하지도, 고통받지도 않고 살아갔다. 그들의 용기를 찬양하고 박수를 보내면서도 그들보다 수백 배의 용기를 냈으나 바스라지고 가루가 돼 흔적도 없이 사라졌던 이들, 무엇보다 당시 중앙정보부의 엉터리 기소장에 희생된 사람들을 생각하면 그들의 용기를 기리는 일도 좀 면구스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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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거부한 기소장에 이름이 오른 이 중의 하나였던 제일은행 직원이었던 이종배씨. 그는 현장검증을 다녀오다가 또다시 고문을 당할 일이 두려워 투신했다. 이로 인해 척추골절상을 입은 이씨는 중증장애인으로 지내다 1970년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장애인이 어떻게 죽었을까. 식음을 전폐한 채 굶어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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