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3년 2월 27일 여걸 남자현 체포되다

in #kr8 years ago

산하의 오역

1933년 2월 27일 여걸 남자현 체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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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년 2월 27일 오후, 일제의 괴뢰국인 만주국 최대 도시 가운데 하나였던 하르빈의 도의정양가 거리. 얇지 않은 복색의 사람들이 손을 비비며 종종걸음을 쳤다. 기세는 수그러들었으나 대륙의 겨울은 그 꼬리가 길었다.그런데 거리 모퉁이나 가게 처마 아래, 그리고 골목 곳곳에는 날카로운 눈매의 사람들이 은밀히 도사리고 있었다. 포목상 처마 아래에서 신문을 들고 있던 중년 신사가 일본어로 중얼거렸다. “요칸가 요쿠나이.” (예감이 좋지 않아). 실망의 눈초리로 거리를 훑어보던 중년 신사의 눈이 갑자기 커졌다. 그는 신문을 접어 무릎을 탁탁 치고는 누군가를 가리켰다. 동시에 날카로운 호각이 일순 주위의 모든 소음을 제압하며 울려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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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이이이이익. 동시에 예닐곱 명의 날랜 사내들이 거리로 뛰쳐나왔다. 그들은 일본 형사들이었다. 소스라치는 행인들의 물결을 뚫고 그들은 표적을 향해 달려들었다. 표적은 천만 뜻밖의 인물이었다. 형사들을 피해 필사적으로 도망가는 사람은 중국인 거지였다. 그것도 남자가 아닌 여자에 이미 백발이 난무한 노인이었다. 보통 할머니들보다는 민첩했으나 경찰의 적수가 되지는 못했다. . 뜀박질에서 젊은 형사들을 이기지 못한 그녀는 곧 따라잡혔고 총성이 울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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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바닥에 쓰러진 노파는 기를 쓰고 저항했으나 빠져나갈 길은 없었다. 몸부림치는 노파를 제압한 후 깊이 눌러 쓴 모자를 벗기자 유난히 강단 넘치는 눈에 다부진 턱선을 가진 얼굴 윤곽이 드러났다. 경찰대 지휘관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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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았다. 그 여자다. 드디어 남자현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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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현.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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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힌 노파는 중국인이 아니었다. 남자현이라는 조선인이었다. 몸싸움 와중에 헤집어진 옷 속에서 조선 옷이 드러났다. 추워서 껴입은 옷이 아니었다. 그 옷은 남자의 옷이었고 오래된 핏자국까지 묻어 있었다. 중국 옷 속에 받쳐 입은 조선 남자의 복색. 그것은 40년 전 의병에 가담하여 일본군과 싸우다가 죽어간 남편의 유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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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2년생이니까 당시 우리 나이로 예순 둘 환갑을 넘긴 나이였다. 요즘에야 환갑 잔치를 하면 이상한 눈길로 보지만, 그때만 해도 남자현 자신이 결혼한 나이대로만 자식들을 시집장가 보냈다면 증손자를 볼 수도 있는 나이였다. 그녀는 열아홉 살에 시집을 갔던 것이다. 그녀의 시댁은 경북 영양군 석보면 지경동. 남편은 김영주라는 사람이었다. 김영주는 알콩달콩 잘 살던 남편이 뜻밖에 세상을 떠난 건 1896년이었다. 그 전해 일어난 을미사변, 즉 명성황후 시해 사건은 경상도 두메 산골에서 근근히 살아가던 가난한 선비들에게도 큰 충격을 안겼고 울분을 터뜨리며 화승총과 녹슨 칼을 잡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남자현의 남편 김영주도 끼어 있었다. 무던한 남편이었지만 한 번 고집을 부리면 누구도 꺾을 수 없던 남편은 아내에게 이렇게 자신의 뜻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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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가 망해 가는데 어떻게 집에 앉아 있을 수 있겠소.” 남자현은 묵묵히 말을 듣고 있엇지만 다음 말에서 그만 새파랗게 질리고 말았다. “지하에서 다시 보세. ” 이미 남편은 죽을 각오를 하고 있구나. 저도 모르게 남자현은 자신의 배에 손을 갖다 댔다. 그녀는 임신 중이었다. 그리고 뱃속의 아이는 아버지를 보지 못할 운명이었다. 망한 나라의 아둔한 선비이기를 거부했던 남편은 의병 전쟁 와중에 목숨을 잃고 말았던 것이다. 당시 남자현의 나이 스물 넷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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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상과부가 된 남자현은 유복자를 낳아 기르면서 시어머니를 홀로 모셨다. 친정 아버지는 정3품을 지낸 양반이었고, 남편의 가문도 일대에서 문명(文名) 드높은 의성 김씨 집안이었으니 여필종부 삼종지도의 한자성어는 몸에 밴 정도가 아니라 뼈에 새긴 양반집 며느리였다. 양잠도 하고 길쌈도 하며 혼자서 삶을 버텨낸 남자현은 마을에서 주는 효부상까지도 받은 모범적인(?) 지어미에 며느리에 어머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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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스무 해를 넘겨 살아 양가 부모상 다 치르고 나이 마흔 일곱에 이르렀다면 이제 외아들 장가 들이고 손주 재롱 볼 욕심을 내는 것이 보통 사람의 마음일 것이다. 평균 수명이 여든을 헤아리는 요즘에도 “새로운 길을 가겠다.”고 한다면 주위에서 뜯어말릴 그 나이에, 남자현은 자신의 인생을 송두리째 물갈이하는 선택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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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조선 천지를 뒤흔든 3.1 운동이 계기였다. 각지에서 터져 나오는 만세 소리를 들으면서 그녀는 선언한다. “남편과 나라가 죽었을 때 나는 이미 죽었다.” 그리고 만주에 넘어가기 직전 서울에 머무르며 만났던 손정도 목사에게 그녀는 이렇게 토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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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많이 살았으니 당장 죽어도 여한이 있을리 없지만 시골에 들어앉아 흐지부지 살기에는 왜(倭)에 대한 한이 너무 크고 뚜렷하여 그것을 풀고 가는 것이 그간 은혜 지은 인연들에 대한 보답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나는 조선의 총구다> 이상국 공저) 서로 아끼고 사랑하였지만 글 읽은 선비로서 망해 가는 나라를 볼 수 없다 하여 의병으로 나섰다가 전사한 남편, 의병 어머니라 하여 온갖 수모를 겪다가 그 후유증으로 돌아가신 시어머니, 나라와 딸의 불행을 한탄하며 숨을 거둔 친정아버지 그 모두의 마지막 모습들이 새록새록 그녀의 눈동자에 담기고 있었다. 이제 나는 당신들을 대신하여 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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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독립군 단체 가운데 하나였던 서로군정서에 들어가 독립군 수발에 나선다. 그녀는 젊은 독립군들의 어머니 노릇을 하며 교회를 세우고 학교 건립에 힘을 보태고 부상당한 독립군을 간호하느라 동분서주했다. 하지만 남자현은 ‘어머니’에 그치는 사람이 아니었다. 대관절 저 여성이 어떻게 20년이 넘도록 시부모 봉양하며 시골 마을에서 얌전히 살았는지 알 수 없을 지경으로 용감하고 호방한 여장부로서의 본색을 드러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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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은 독립군에 가담한 청년이 내부에서 다툼이 있었는지 조직을 벗어나 만주 마적단으로 가 버렸다. 독립군에게는 살덩이처럼 소중한 말까지 끌고 가 버렸기에 여간 낭패가 아니었다. 남자현은 마적단 두목에게 편지를 쓴다. “나라 잃은 처지에 의리까지 잃어서야 되겠습니까..... 일제와 싸워야 할 우리들이 서로를 상처내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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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여기까지는 마적 두목은 무심하게 읽었으리라. 하지만 그 다음 구절에서 마적 두목은 눈을 크게 뜨고 말았다. “저는 조선의 여전사(女戰士) 로 명예를 걸고 그곳 지도자에게 글을 써서 보내니 뜻을 따라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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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에 무서울 것 없는 마적 두목이었지만 이 당당하고도 기품 있는 조선의 ‘여전사’에 감동하고 말았다. “싸움이 급하여 일단 그냥 나갑니다. 돌아오는 길에 상의합시다.” 마적들은 일본 경찰서를 습격하여 한바탕 쓸어버린 후 돌아오는 길에 마필과 청년을 돌려 주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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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현은 스스로를 전사(戰士)로 자처했거니와 그 이후의 삶 역시 전사에 가까웠다. 아니 누구보다 맹렬한 전사였다. 그 앞에서는 어떤 범 같은 독립 투사도 감히 눈을 치뜨지 못했고 내가 옳으니 네가 틀렸니 말주변 좋은 사람들도 남자현 앞에서는 입을 다물었다. 우리 독립운동사는 그 자랑스런 투쟁의 이력과 아울러 남부끄러울 정도의 분열과 상호 갈등의 역사 또한 지니는데 남자현은 이런 모습에 질색을 하는 사람 중의 하나였다. 1922년 남만주 환인 일대에서는 분열이 치열하다 못해 서로 총을 들고 싸우고 죽이고 살리는 어처구니없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남자현은 이 참상에 가슴을 치며 괴로워했고 마침내 중대한 결단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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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현 선생 편집니다.” 여러 갈래로 나뉘어 다투던 독립운동가들에게 남자현의 편지가 전해졌다. 그런데 좀 이상했다. 글씨는 검붉었고 비릿한 냄새를 풍겼다. 편지를 받은 이들은 모두 기절할 정도로 놀랐다. “이건 남선생 혈서가 아니야?” “맙소사. 금식 기도 가셨다더니 지금 어디 계신 거야?” “이분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우리가 무슨 낯으로 살아!” 두어 해 전 남자현은 경술국치 10주년 기념식에서 손가락을 칼로 베어 즉석에서 혈서를 써 연설한 적이 있었다. 그때 피 뚝뚝 떨어지는 손가락으로 글을 써내리던 모습을 보고 가슴을 쓸어내린 기억이 선연한데 이번엔 아예 손가락을 잘랐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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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결하라. 우리는 강토를 빼앗은 일본과 싸우러 왔지 동족과 싸우러 온 것이 아니다. 피 한방울이라도 적을 위해 써야 하거늘 같은 조선일을 해치는데 쓴다는 것은 너무도 아깝지 않은가.” 이 여호(女虎)의 울부짖음 앞에 기가 질린 남정네들은 일시적으로나마 분열을 멈추고 한 깃발 아래 모이는 시늉이라도 해야 했다. “이로 말미암아 환인·관전 등지의 주민들은 그 은공을 감사하여 곳곳마다 나무로 비를 세워 그 공덕을 표창하고 만주 각층 사회에서는 누구나 선생을 존경하게 되었다.” (잡지 <부흥> 1948년 12월호, ‘독립운동사상의 홍일점, 여걸 남자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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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 번 그녀의 활약이 두드러진 사건 중의 하나가 1926년의 길림 대검거 사건이다. 도산 안창호가 길림 지역 조선인들의 민족 의식을 고취시키고자 북경을 거쳐 길림으로 와서 동문 밖 대동공장에서 강연을 가지고자 했는데 5백명의 동포가 몰려들어 대성황을 이루었다. 이 사실을 안 장작림은 공장을 포위하고 참가자 거의 전부를 체포해 버렸다. 안창호, 오동진,김동삼 등 독립운동의 동량같은 이들이 무더기로 체포됐고 장작림이 이들을 일본에 넘겨 버린다면 기둥뿌리가 흔들릴 판이었다. 이때 남자현은 대책위원회를 꾸려 동분서주했고 안창호 등이 풀려나는데 공을 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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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독립운동의 어머니이자 여전사’로서 만주 벌판 곳곳을 누볐지만 남자현에게는 채워지지 않는 목마름이 있었다. 그리고 이 갈증을 풀기 위해 그녀는 또 한 번 변신을 감행한다. 1926년 4월, 길림성의 어느 마을에서 남자현 앞에 둘러앉은 청년들은 남자현이 꺼내는 말에 입을 딱 벌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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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으로 내가 들어가겠다. 조선 총독 사이토 마코토를 내 손으로 죽일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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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들은 말을 더듬을 정도로 놀랐지만 남자현이 농담을 하고 있다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다. 남자현은 능히 그런 말을 할 사람이었다. “저.... 젊은이도 힘에 부치는 일입니다. 어머니께서 그러시는 건......” 그러자 남자현은 한 수 더 떴다. “왜놈 경찰이 머리 희끗한 여자가 의심이나 하겠나? 오히려 내가 더 잠입하기 쉬울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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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현은 완강했다. 이미 여전사로서 그 명망이 만주일대에 가득했으나 그녀는 진짜 전사(戰士), 몸을 던져 적을 부수고 자신을 죽여 더 많은 적을 죽이는 역할을 맡고 싶어했던 것이다. 결국 그녀는 권총 하나와 실탄 여덟 발을 들고 압록강을 건넌다. 아들에게 “죽으러 가는 것이나 마찬가지지만 나라가 없으면 죽은 몸이나 진배없으니 슬퍼할 필요도 없다.”는 비장한 말을 남긴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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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적으로 남자현은 뜻을 이루지 못한다. 남자현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다른 조선인의 활약 때문이었다. 그녀보다 먼저 사이토를 죽이려 한 사람이 있었던 것이다. 송학선이라는 젊은이였다. 동네 뒷산에서 소나무를 상대로 칼 찌르기 훈련을 거듭한 그는 돌아간 순종 황제를 조문하러 오는 사이토를 노려 차에 뛰어들었다. 두터운 소나무 줄기에도 거침없이 박히던 그의 칼은 여지없이 일본인들의 피를 쏟게 했지만 애석하게도 그건 사이토가 아닌 다른 일본인들이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일본 경찰의 경비가 부쩍 강화되어 남자현은 사이토 근처에도 접근할 수 없었고 만주로 돌아와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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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 일본 제국주의는 만주사변을 일으키면서 대륙에 대한 야욕을 현실로 옮겼다. 독립군의 근거지이자 수많은 한인들의 삶의 터전이었던 만주 전역은 일본의 지배 하에 들어갔다. 중국 정부는 일본의 침략 행위를 규탄하며 국제연맹에 그 부당함을 호소했고 국제연맹은 영국인 리튼을 단장으로 하는 조사단을 파견하지만 조사단이 도착하기도 전에 일본은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부의를 데려다가 만주국 수립을 선언해 버린다. (1932년 3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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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게 도착했지만 리튼 조사단은 만주 지역을 돌아다니며 만주국의 실체에 대한 조사를 진행하게 되는데 남자현이 머물던 하얼빈도 방문한다. 그러자 남자현은 국제연맹이라는 국제 사회에 만주 지역 한국인들의 독립 염원을 전달할 기회로 보고 또 한 번 손가락을 잘라 혈서를 쓴다. 이번에는 혈서와 함께 자른 손가락까지 전달하여 독립의 열망을 전파하려 했지만 혈서와 손가락은 리튼 조사단에 전달되지 못한다. 전달책이었던 중국인이 돈만 챙기고 일을 하지 않은 것이다. 남자현의 손가락은 하얼빈 거리 어딘가에 뿌려져 덧없이 썩어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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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현의 이 행동은 단순한 단지(斷指 )시위가 아니었다. 당시 리튼 조사단은 일본 정부의 엄중한 감시 하에 있었고 그들에게 반일(反日) 메시지를 전달하려다가 목숨을 잃은 한국인과 중국인이 이미 여럿이었던 것이다. 남자현이 무명지를 자르며 아들에게 보낸 편지는 비장함과 다급함, 절망감과 결연함으로 범벅이 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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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이 무명지(無名指)라 한들 어찌 쓸모 없는 손가락이겠느냐. 제 나라를 잃고 무명민(無名民)이 되어 떠도는 나보다는 실한 것이었느니, 어쩌면 평생을 가만히 붙어 내 손을 채웠던 이 작은 것이 나라를 위해 큰일을 할 수도 있겠다 싶구나. 중지와 약지 사이에 어중간하게 여기도 붙었다 저기도 붙었다 살아온 줏대 없음을 논죄하는 준엄한 심판이 아니겠느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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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해인 1933년, 남자현은 또 한 번의 거사를 준비한다. 일본의 만주국 전권대사 무토를 암살하려는 것이었다. 손가락도 몇 개 없는 예순 할머니가 폭탄을 던질 힘이나 있었을까. 그래서 무토와 함께 자폭하려 했던 말도 있지만 남자현은 기꺼이 그 역할을 자임했다. 그러나 거사를 논의하던 이들 가운데 밀정이 있었고 남자현은 40년 전 남편이 죽어가며 입었던 조선옷을 중국 거지 복색 안에 넣어 입고서 폭탄을 전달받으러 가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고 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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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포 후 남자현은 나이를 고려하지 않은 일본 경찰의 모진 심문을 받았고 “적이 주는 것을 목구멍으로 넘기지 않겠다.”는 각오로 단식을 시작한다. 단식이 열흘을 넘어서고 사경을 헤매는 지경에 이르자 일제는 병보석으로 남자현을 풀어 준다. 이미 남자현은 삶과 죽음의 경계선을 넘어서고 있었다. 남자현은 자신이 가진 돈 249원 80전을 내놓으면서 세 가지의 유언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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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현 임종.jpg
임종하는 남자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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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돈 중에서 200원은 조선이 독립하는 날 정부에 독립축하금으로 바쳐라. 그리고 시련이는 꼭 대학까지 공부시켜서 내 뜻을 알게 하라. 남은 돈 49원 80전의 절반은 손자의 학자금으로 쓰고, 나머지는 친정 의령 남씨 종손을 찾아 공부시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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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 일곱 이후 견결한 여전사로 살았던 남자현은 유언에서야 아픈 속내의 일부를 드러냈다. 독립운동가의 집에서 태어나 제대로 가르칠 여유도, 뭣 하나 잘해 줄 여지도 없이 성장하는 손자에 대한 애틋한 마음, 그리고 자신의 존재로 말미암아 큰 피해를 본 친정에 대한 미안함이 그것이다. 평생 억눌러 왔던 한 마디, 한 단어를 남자현은 죽음 앞에서야 토로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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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죽기를 각오한 바이니까…….”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남자현은 손을 내밀었다. 손가락 두 개가 썩둑 잘려나간 그 손을 내밀면서 그녀는 생의 마지막 말을 남긴다. “이것이나 찾아야지” 하얼빈 거리 아무데나 아무렇게나 던져져 썩어갔을 그녀의 손가락을 어찌 찾겠는가. 하지만 남자현은 죽음의 목전에 다다라 그것을 찾고 싶다고 했다. 신혼의 꿈을 간직한 채 자신의 곁을 떠나버린 남편을 다시 만나게 되었을 때, 비록 곱지는 않더라도 온전한 손을 내밀고 싶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관성의 법칙이란 사물에서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다. 살아온 방식은 곧 살아갈 모습이 된다. 어린아이들은 하루에도 열 두 번씩 변한다지만 머리가 굵어지고 키가 더 자라지 않은 이들이 ‘변신’한다는 것은 실로 어려운 일이다. 또 10대나 20대의 더운 피와 젊은 심장도 아닌 나이 마흔 일곱의 중년 여인이 , 양반집 규수로 태어나 선비 가문에 시집을 가서 시부모 봉양 잘해 효부상도 받고 남편 죽은 뒤 삯바느질로 아이를 기르고 집안을 건사했던 ‘조선 시대 여인’이 그 관성을 180도로 벗어나 민족 해방 전선의 강고한 여전사로 탈바꿈한 예는 기적에 가까울 정도로 드물 것이다. 그녀가 관성을 타파하고 세상과 세월을 거슬러 솟구칠 수 있었던 동력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의로운 분노였을 것이다. 그녀 옆에 당연히 있어야 할 남편을 빼앗아 가고, 남편이 지키려던 나라를 삼키고, 응당 내질러야 할 울분을 총칼로 짓밟던 정경들은 그녀의 가슴 속에 의분의 계단으로 쌓였고 그 층계들을 하나 하나 밟아 오르면서 그녀는 일생의 2/3를 차지한 평범한 여자로서의 삶이라는 관성을 물리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역사 속에서 그 힘은 또 하나의 관성이 된다. 아들 김성삼은 어머니의 유언을 충실히 따랐고 해방 후 해방 1주년 기념식장에서 어머니가 잘린 손가락으로 전해 주던 ‘독립축하자금’ 200원을 백범 김구에게 전달했던 것이다. 그 순간 남자현은 그 강고한 턱선을 무너뜨리고 활짝 웃었을 것이다.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은 먹고 안 먹고의 문제가 아니라 정신에 있어!” 하는 그녀 자신의 입버릇을 되풀이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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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알고 현대를 살아가는 것. 어려운 일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정말 대단하고 존경스럽다는 말 외에는 다른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습니다. 이런 분을 알게 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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