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9년 9얼 11일 슬픈 베아트리체 첸치

in #kr4 years ago

1599년 9얼 11일 슬픈 베아트리체 첸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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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탕달 신드롬’이라는 게 있다. <적과 흑>으로 유명한 작가 스탕달이 1817년 피렌체를 방문하여 산타크로체 성당에서 어떤 작품을 보다가 무릎에 힘이 쭉 빠지고 맥박이 비정상적으로 뛰다가 탈진하여 쓰러진 일에서 유래하는 증상이다. 스탕달은 이 증상으로 한 달간이나 치료를 받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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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미술 작품을 보다가 스탕달과 비슷한 경험을 하거나 나아가 환각이나 실신,일시적인 전신마비까지 가는 이들이 간간이 나온다고 한다. 물론 어지간히 예술적 조예가 있거나 예민한 분들 한정이겠지만. (나 같은 사람은 그림에 환각제를 발라놓지 않은 이상 그럴 리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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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스탕달이 관람 후 ‘심장이 떨리고 힘이 빠지는’ 체험을 하게 했던 그림은 대체 무엇일까? 그건 어느 젊은 여인의 초상화로 알려져 있다. (다른 그림이라는 주장이 더 맞는 듯하다. 애초에 스탕달이 간 성당에 문제의 그림이 없었다고 한다. 단지 스탕달이 이 여인의 이야기를 발굴하여 작품으로 소개한 바 있어 스탕달 신드롬과 이 그림이 연결돼 스토리화됐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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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이름은 베아트리체 첸치. 초상화가 그려진 것은 그녀 나이 스물 두 살, 1599년 9월 11일 그녀가 참수형을 받기 직전에 그려진 그림이었다. 그녀에게는 무슨 사연이 있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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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로마 근처에서 내로라 하는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행복한 귀부인이 되지는 못했다. 그 아버지 프란시스코가 그야말로 내로라 할 빈틈없는 악당이었기 때문이다. 베아트리체는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의 비틀린 욕망의 희생양이 됐다. 이 악랄한 아버지는 툭하면 몽둥이를 휘두르며 가족들을 두들겨 패는 악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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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범죄를 몇 번 저질러 처벌받을 뻔 했지만 돈으로 메웠다. 자신의 구명에는 돈을 아끼지 않던 그는 가족에게는 천하의 구두쇠이기도 했다. 딸을 시집 보낸 뒤 지출한 지참금에 두고두고 배가 아파했을 만큼. 그는 남은 딸 베아트리체는 결혼시키지 않기로 작심했고 그예 자신의 성적 노리개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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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라는 이름의 악마에 짓밟히는 베아트리체를 보고 가슴을 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녀의 친오빠, 그리고 새어머니, 이복동생이었다. 더 이상 보다못한 그들은 프란시스코의 범죄를 고발한다.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법은 강자의 편이었다. 고발이 유야무야된 후 프란시스코 첸치는 가족 모두를 자신의 별장으로 사용하던 성에 가둬 버렸다. 베아트리체에 대한 능욕은 당연히 계속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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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신창이가 된 베아트리체는 자신이 갇힌 성에서 일하는 하인 (집사라고도 하는데)과 사랑에 빠진다. 신분의 차이도 있었겠지만 상황의 중대함은 그 사랑이 얼마나 힘겨웠을지를 짐작케 한다. 폭군 프란시스코의 가족들과 베아트리체, 그리고 그녀의 연인은 의기투합한다. “저 악마를 죽여 없앱시다. 하느님도 우리를 용서하실 겁니다.” 친오빠, 새어머니, 이복동생 모두 손을 잡았다. 거기에 베아트리체의 연인을 포함한 두 명의 하인도 가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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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성을 찾아온 프란시스코에게 독을 먹이려고 하지만 독살은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나 살의(殺意)는 묘한 오기와 위기의식을 동반하는 법이다. 여기서 물러서면 또 기회도 없을 것이고 자칫하면 우리가 죽을 수 있다는. 온 가족이 달려들었다. 아내와 아들이 남편을 붙들고 늘어졌고 또 다른 아들이 망치를 휘둘렀다. 아마 평생 악마를 보아온 베아트리체도 힘껏 거들었으리라.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며 악마는 죽었다. 그들은 프란시스코를 높은 곳에서 내던 져 실족사한 것으로 꾸미려 했다. 베아트리체의 연인과 하인들도 입을 맞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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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뜻대로 돼 가지는 않았다. 망나니 프란시스코의 죽음은 누구에게도 아플 것이 없었지만 문제는 그가 누구나 탐낼만한 재산을 가진 아주 부유한 귀족이었다는 점이다. 가족들은 실족사를 주장했지만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 이들이 많았다. “수상한데?” 조사가 행해졌고 가족들은 철저한 심문을 받고 하인들은 상상을 절하는 고문을 받는다. 베아트리체의 연인이었던 하인은 끝까지 입을 다물었지만 결국 다른 사람들의 입으로 사건의 전모는 드러나고 만다. 매 앞에 장사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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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시민들도 망나니 프란시스코가 어떤 인간인지를 익히 알고 있었고 베아트리체와 그 가족들이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어쩔 수 없는 범죄를 저질렀음을 탄원했다. 그러나 결코 그 가족을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이 있었다 교황 클레멘트 8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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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양반은 스타벅스나 기타 커피 프랜차이즈 업계가 성인(聖人?)으로 모셔야 할 양반이다. 일부 수도사들이 터키 쪽으로부터 유입된 이 음료수를 사탄의 것이라 주장하며 금지해 달라고 청원해 왔을 때 커피 맛을 본 클레멘트 8세는 “이 음료수에 세례를 베풀어 악마를 물리치고 우리 기독교인의 것으로 만들자.”고 해서 커피를 합법화(?)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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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프랑스의 앙리 4세 (영화 <여왕 마고>의 얼뜨게 보이는 마고의 신랑 앙리 드 나바르)와 타협하여 프랑스와의 관계를 정상화하고 앙리 4세를 가톨릭으로 돌아세우는 등 꽤 유능한 수완을 발휘한 교황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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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성경과 어긋나는 주장을 한다는 이유로 저 유명한 조르다노 브루노를 비롯해 ‘신성모독’을 범한 이들을 서슴없이 불태워 죽일 만큼 냉혹한 사람이기도 했던 클레멘트 8세는 베아트리체 가족의 재판에서도 차가움을 잃지 않았다. 그 차가움의 이면에는 불길 같은 뜨거움이 있었다. 바로 첸치 가문의 재산에 대한 탐욕이었다. 첸치가 죽었고 그 가족들이 범인이라면 그 막대한 재산은 교황에게 귀속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로마 시민들의 탄원 따위는 바람에 휘달리는 나뭇잎새 소리만도 못할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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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9년 9월 11일 베아트리체 가족은 처참하게 처형된다. 친오빠는 사지가 찢겼고 새어머니는 목이 잘렸다. 베아트리체는 그 모든 꼬락서니를 목도한 후 단두대에 선다. 이복동생 하나만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갤리선의 노잡이로 끌려가는 것이 다행이었다고나 할까. 죽음을 앞둔 베아트리체는 여전히 아름다웠고 뭇 사람들의 통탄을 자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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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가운데에는 제2의 라파엘로라 불렸던 귀도 레니가 있었다. 죽음 앞에서도 무너지지 않았다는, 그래서 처형 순간까지도 기품이 있었다는 베아트리체는 그에게 큰 영감을 주었고 베아트리체의 초상을 그려 남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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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도 레니의 제자 중에 안드레아 시라니라는 사람이 있었다. 화가가 되고 싶어했지만 재능이 떨어지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신통하게도 그의 딸 엘리자베타 시라니는 재능이 충만한 화가였다. 안드레이 시라니는 자신이 뛰어난 화가가 되지 못한 한을 딸에게 퍼부었다. 딸을 집에 가두다시피 하며 그림을 그리라고 강요했고 그 그림으로 술값을 충당하는 고주망태로 살아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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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어느 날 엘리자베타는 사부님 아니 사조(師祖)님이라 할 귀도 네리의 베아트리체의 초상을 보고 영감을 받는다. “저 여자 나랑 비슷하구나.” 아버지의 폭력과 욕마에 갇힌 딸들의 비극을 공유한 것일까. 엘리자베타는 레니의 그림을 모사하기 시작한다. 그냥 베낀 것이 아니라 그녀의 아름답고도 서글픈, 기품이 넘치지만 절망이 서린 표정에 화가 자신의 모습까지 살짝 얹은.... (개인적으로 보기엔) 새로운 그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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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탕달이 이 그림을 보았는지 어쨌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엘리자베타 시라니의 <베아트리체 첸치의 초상>을 미술관에서 마주치고, 그림 속 그녀와 눈길이 마주친다면 스탕달 신드롬까지는 몰라도 꽤 긴 시간 상념에 젖을 듯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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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욕망은 대체 어디에서부터 나오고 어디까지 발현되는가. 저 깊고도 서글픈 눈빛으로 보았던 마지막 세상은 무엇이었을까. 왜 이런 일은 시대를 뛰어넘고 세월을 가로질러 반복되는가. 우리에게도 검찰 수사관 아버지가 친딸을 능욕해 오다가 그 연인의 칼에 맞아 죽은 사건이 있었고 비슷한 사례는 수도 없이 많았는데..... 도대체 왜 그런 ‘고장난’ 인간들이 나오고, 그에 대한, 그리고 피해자에 대한 우리 사회의 대응은 무엇이었는가....... 질문은 꼬리를 물고 생각은 길어진다. 1599년 9월 11일 목잘려 죽어간 스물 두 살 여성의 초상화 앞에서.

조금 긴 P.S
언제나 전설은 진실과 함께 존재합니다. 진실에 뿌리를 둔 나무이지만 가끔은 진실을 덮을 큰 그늘을 만들기도 하지요. 위 이야기도 그런 면이 있을 듯 합니다. 그래서 진실의 일면을 소개한 페친 석지훈님의 댓글 붙여 듭니다.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석지훈선생님께 감사드리며


저 그림에 대해서 조금 말씀 드리면, 요즘 미술사 연구자들은 이 그림에 대해 전혀 다른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베아트리체 첸치는 말씀하신 것처럼 1599년에 처형되었는데, 귀도 레니는 이 당시 아직 고향 볼로냐에 있었고 1601년에나 처음으로 로마에 건너왔기 때문에, 베아트리체 첸치를 직접 목격했을 가능성은 전무합니다. 엘리자베타 시라니 역시 그 짧은 인생에 볼로냐를 떠난 일 자체가 없기 때문에 이 그림을 보았을리도 없다고 (*이 그림은 그려진 이후 로마를 떠난 일이 없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생각됩니다.

또, 시라니의 아버지 죠반니 안드레아 시라니가 고주망태였다는 이야기는 후대에 만들어진 풍문이며, 오히려 통풍으로 인한 통증으로 그림 작업이 어렵게 되자 자신의 스튜디오와 직원들을 통째로 딸 앞으로 넘기는 등 딸을 적극적으로 서포트 했을 뿐 아니라, 딸을 "귀도 레니의 환생"으로 신나게 선전하면서, 그녀가 요절하자 볼로냐의 시 참사회원들을 움직여 시 명의의 성대한 장례까지 치르도록 했던 것도 기록에 남아있습니다.

한편 이 그림은 로마의 바르베니니 가문 컬렉션에 1702년에 처음으로 입수되면서 처음으로 기록에 등장했는데, 당시 작성된 구입 목록에는 그 대상이 베아트리체 첸치가 아니라 고대 그리스의 무녀인 "시빌레"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이러저러한 증거로 보아, 요즘 학자들은 이 그림이 베아트리체 첸치가 아니라, 귀도 레니가 로마의 모 교회에다 그린 <그리스도의 재림> 벽화 (현재는 소실)에 등장하는 시빌레를 습작으로 그린 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물론, 이 그림이 레니의 진작이라는 사실도 의심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아직까지는 소수설인거 같습니다.

그러나 지난번에 애국가 글 쓰셨을 때와 마찬가지로, 결국은 창작자보다는 이를 수용하는 사람들에 의해 예술 작품의 가치는 달라지기 마련이니까요. 이 그림이 이미 18세기 중엽부터 세상의 소문을 타게 되면서 점차 베아트리체 첸치의 그림으로 알려졌던 듯 합니다. 1755년의 로마 관광 안내서에도 이미 이 그림이 베아트리체 첸치의 그림이라고 소개되어 있고, 스탕달은 물론이거니와 디킨스나 괴테, 퍼시 셸리 등의 명사들도 이 그림을 이미 그렇게 알고 이해했지요.

셸리는 이 그림에서 영감을 받아 아예 1819년에 <첸치 가문의 비극 The Cenci; A Tragedy>라는 극시를 썼고, 이 극시로 인해 처음으로 로마의 지역 전승에 불과했던 베아트리체 첸치의 이야기가 전 유럽에 소개되었습니다.
저는 여담이지만 작년에 신혼여행 중 로마에서 이 그림을 친견했는데, 이미 이런 사정을 다 알고 있음에도 여전히 매력적인 그림이라는 느낌이었습니다. 간단히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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