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ay. 5등은 필요없습니다

in #kr5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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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시절 나는 공부를 썩 잘하는 편은 아니었다. 좋아하는 과목만 점수가 높았고 관심이 없는 과목의 성적은 형편없었다. 그래서 그런지 반에서 5등 정도만 해도 공부를 잘하는 아이처럼 보였다.

그런데 막상 사회에 나와서 느낀 점은 5등이 결코 ‘잘하는 것’이 아니란 거였다. 올림픽을 나가도 메달은 3등까지만 준다. 5등과 3등은 두 계단 차이지만, 그 두 계단의 차이로 받은 결과는 하늘과 땅차이다. 몸치인 내게는 5등의 실력도 대단해보였지만, 시상대에 오를 수 있는 건 3등까지다. 그럴 때면 나는 국가가 떠들썩하게 울리는 무대 뒤편에서 조용히 자신의 장비를 갈무리하고 있을 5등을 생각하곤 했다.

기재가 부족하다거나, 운이 없어 반집차 패배를 기록했다는 의견은 사양이다.
바둑과 알바를 겸한 때문도 아니다.
용돈을 못주는 부모라서도 아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가 자리에 누워서가 아니다.
그럼 너무 아프니까.
그래서 나는 열심히 하지 않은 편이어야 한다.
열심히 안한 것은 아니지만
열심히 안한 걸로 생각하겠다.
난 열심히 하지 않아서 세상에 나온 거다.
난 열심히 하지 않아서 버려진 것뿐이다.
<미생> 1화 中

드라마 <미생> 1화에서 장그래가 했던 말이 기억난다. 장그래는 소위 흙수저 출신에 바둑 기사를 꿈꿨지만 결국 입단에 실패하고 ‘무스펙’으로 세상에 나와 온갖 모욕을 받는다. 하지만 그럼에도 장그래는 이를 의연하게 잘 버텨내는데, 여기서 그가 진짜 아파하는 건 버려진 세상에서 쏟아지는 모욕이 아니기 때문이다.

‘열심히 하지 않은 것으로 해야’ 하는, 그동안 자신이 쌓아올린 것이 무용해졌다는 그 사실, 자기 자신을 정의하는 그 자체를 스스로 지워버려야만 하는 그 고통이 너무도 크기 때문에 세상의 모욕쯤은 대수롭지 않게 되는 것이다.

장그래와 상황은 좀 다르지만, 그래도 비슷하다면 비슷하다고도 할 수 있는 나도 이제 ‘<미생> 1화’에 발을 들여놓은 것 같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어려움 속에서 문학의 짚불을 부채질하며 여기까지 달려왔다. 작년과 올해, 신춘문예 최종심에서 두 번을 탈락하고 본심에서도 한 번 떨어졌다. 몇 등을 했는지는 모른다. 다섯 명 중 하나라는 거, 여덟 중 하나라는 것만 알뿐이다. 5등은 필요 없으니까.

정말이지 열심히 안 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생각하라니 그렇게 생각하겠다. 다른 이유 때문이라면, 그러면 정말 너무 아프니까. 난 열심히 하지 않아서 버려진 것뿐이다. 그래도 장그래는 젊었다. 나는 장그래보다도 나이도 많다. 나갈 수나 있을까. 장그래처럼, 그렇게 세상에 나가서 의연할 수 있을까. 겁이 난다.

다만 나는 5등도 실패하지 않을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다. 묘비에 끝내 ‘나는 실패자입니다’라고 새기고 싶지는 않다. 나를 위해서도, 그 무수한 5등들을 위해서도 말이다. 장그래는 다른 길을 택했었다. 나도 그렇게 될지도 모르겠다. 어찌됐건, 죽기로 하지 않는 이상 살아남게 될 텐데, 기왕이면 잘 살아남고, 잘 했으면 좋겠다. 다시 누군가를 짓밟고 올라가겠다는 다짐이 아니다. 5등도 살아남을 수 있는 세상을,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게 했으면 좋겠다.

무대 뒤로, 다시 장비를 갈무리하러 간다. 아, 밖에서 국가는 울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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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등의 비애, 공감이 갑니다. 경민님의 다짐처럼 5등도 살아남았다는 산 증거가 되어주세요!^^

그럴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응원 감사합니다 :)

작년과 올해, 신춘문예 최종심에서 두 번을 탈락하고 본심에서도 한 번 떨어졌다.

아~~~~~ 너무 아쉽네요. 다음번엔 반드시 당선될 거예요. 힘내세요~~

당선이 될지 안될지도 모르지만 이제 당선이 돼도 문제일 것 같습니다 그래도 열심히 해봐야죠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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