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중독 23. 불편한 시위들

in #kr5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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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6월, 이한열 열사가 시위 도중 최루탄에 맞아 피를 흘리며 끌려나갔다.


시위는 시민의 권리이지만 일부 시위가 불편하게 보이는 까닭은 왜일까. 내 생각에 그것은 이타성의 부재 때문인 것 같다. 전태일과 이한열이 열사로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은 그 시위의 목적이 자신의 이익을 늘리는데 있지 않기 때문이다. 적정 근로시간과 휴일의 보장, 민주주의 가치 수호 등은 한 개인이나 집단의 일익보다는 사회 전체에 이익이 전달된다. 그러한 가치들은 대개 본인에게 이익이 없거나 설령 이익이 된다 하더라도 한 개인이 체감하지 못할 정도로 작다. 대가가 없는 희생은 분명 개인에게는 해악이 될 수 있다. 불리함을 알면서도 행한다는 것은 그런 행동을 해야할 이유를 찾을 수 있을 정도의, 높은 식견과 경지를 지닌 사람만이 가능한 것이니까.

그래서 내 이익을 담보로 하지 않은 헌신은 고귀해 보인다. 그러나 내 이익을 위해 혁명의 기치를 올리는 순간 혁명의 동력은 힘없이 주저앉는다. 왜냐하면 혁명의 목표가 그들의 이익이지, 그를 지켜보는 이들의 것은 아니니까. 자신의 이익을 담보로 혁명을 부르짖으면,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다. 생각해보라. 나라에 전쟁이 났는데 장군의 구호가 ‘우리의 조국을 지키자’가 된다면 모두 들고 일어서 싸울 테지만, ‘내 집을 지켜라’라고 한다면 아무도 싸우지 않을 것이다.

대기업 노동조합의 노동쟁의가 항상 근로자 전체의 이익으로 귀결된다면 아무도 ‘귀족노조’와 같은 소리는 하지 않을 것이다. 대기업 노동 시위의 현장에서 파업 뒤에 임금 협상이 체결돼 상황이 종료되면 그 부담은 회사도 노조도 아닌 하청업체에서 진다. 더 열악한 환경에서 근무하는 하청업체 직원들의 월급을 깎아 본사 근로자들에게 쥐어주는 꼴이지만 아무도 항의하지 않는다. 너무 배불러서 혹은 너무 힘이 없어서 말이다.

님비, 핌피 현상 같은 것도 같은 맥락이다. '나의 이익'을 위해 반대 혹은 찬성한다. 이 지경에 이르면 이제 시위라기보다는 이기주의의 맥락으로 흐르게 되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가 문제로 변질돼 버린다. 요즘 사회 각계각층에서 벌어지는 시위의 문제점 역시 그 자신의 이익을 챙긴 이후엔 동류를 외면하고 침묵한다는데 있다.

물론 모든 문제가 자신의 이익을 따른다고 해서 반드시 무시할 것은 아니다. 비록 자신의 이익뿐일지라도 노예처럼 침묵하는 것보다는 그렇게라도 외치는 편이 낫기 때문이다. 모든 시위는 어떤 종류건 간에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니까.

그러나 기왕 혁명의 기치를 들었으면 보다 근원적인 것에 집중해서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쪽을 생각하는 것이 어떨까. 나는 지금 혁명의 깃대를 만지작거리는 후배들이 있다면 부디, 내가 아닌 타인을, 이곳보다는 저편의 굴레를 함께 보라고 권하고 싶다. 같은 처지의 사람들을 외면하지 말고 손을 이끌어 함께 더 큰 의지로, ‘내 집’이 아닌 ‘내 나라’를 지킨다는 커다란 맥락으로 나아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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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조의 투쟁에서 '혁명'을 읽을 수 있을지부터가 의문이니다. 전태일과 이한열의 시대는 아예 겪어보지도 못한 입장에서 대기업 노동조합의 투쟁과 전태일, 이한열의 투쟁 사이에는 어떤 공통점도 찾기 어려운게 현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습니다. 따지고보면 이제 투쟁이라는 단어조차 어울리지가 않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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