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말과 11월 초 어딘가 중간쯔음의 기록

in #kr3 years ago (edited)

COLETTE KERBER.JPG

마지막으로 인터뷰한 마레지구의 Colette Kerber 서점 외관.


  1. 눈이 컴퓨터 화면 밖을 벗어나는 순간, 엉덩이가 의자에서 떨어지는 순간, 책을 덮는 순간엔 늘 잠자고 있던 문구가 떠오른다. 쓸만은 하지만 그러나 과연 읽혀질까 하는 의문이 드는 그런 문구들이. 몇 분동안 머리 속에 둥둥 떠다니다가 결국 쓰이지 않을때, 점차 사라진다.

  2. '리프트'는 타동사로 기분을 복돋우다/올리다 하다 란 뜻을, 자동사로는 (안개 등이) 걷히다, 사라지다 란 뜻을 갖고 있는 영단어다. 나는 이 단어를 학생들과 근황을 나누는 대화 속에서 종종 써왔다. "I hope the result from the last exam gave you a real lift." 지난 시험 결과가 기운을 복돋아주었길 바래. 또는 또는 "It's alright, my depression started to lift." 괜찮아, 우울한 기분이 좀 사라지고 있어. 라 식으로. 어제의 나는 "I'm desperately in need of a small lift." 라는 말을 친구에게 건넸다.

  3. 월과 일의 순서 적는 방향을 자주 헷갈려 한다. 절대적인 기준이라 생각했던 가치는 늘 내 안에서 끊임없이 흔들린다. 이를 성장의 발판으로 여기면 다행이게, 내 안의 약함으로 자책하기 시작하면 나의 하루는 물 먹은 솜뭉치처럼 조금씩 가라앉게 된다. 그래서인지 자주 내 안에 있을 나침반을 더듬거리며 찾는다. 보이지는 않지만, 어딘가 견고하게 늘 있을 마음의 나침반. 이는 여태까지 읽고 새긴 현자들의 글과 말이였고, 부모님의 사랑이였으며 친구들과의 추억, 연인들과의 연서였다. 나는 자주 고장나지만, 그래도 이렇게 쌓인 나침반을 손에 쥐면 늘 왠지 모르게 든든했기에 버텨낼 수 있었던 것 같다.

  4. 요새는 예전과 달리, 부쩍 책상 앞에 앉으면 기력이 달린다. 의자를 당겨 꺼내고 엉덩이를 붙이고 앉는 순간부터 배터리가 급속도로 닳는 느낌이다. 맑은 정신의 상태를 장시간동안 유지할 수 없어 이상하게 책도 잘 읽히지 않는다. 여러 친구들에게로 부터, 출판사에서, 편집장님께서 보내주신 책들이 속속들이 도착해 책장 한 켠에 꼽아두었는데, 이걸 언제 전부 읽을 수 있을까 싶은... 일단 처음 손이 가기만 하면 며칠이 걸려도 완독하는 것은 크게 어렵지 않지만.

  5. 이런 불안한 나를 잡아주는 나침반은 무형의 형태로, 과장을 하자면 매 계절, 아니 매 순간 바뀌는 존재이기도 하다. 어떤 때는 책의 존재가, 글이 주는 위로에 매달려 살기도 한다. 어떤 때는 친구에게, 연인에게 또는 가족에게 한 없이 매달린다. 나침반 고장난 배 같은 나는 방향을 잃고 늘 몰두할 대상을 탐구한다. 그 과정에서 '사랑'과 '성찰'이란 키워드를 끄집어내 약간은 긴 호흡으로 퇴고한 작업물이 바로 <주파수 맞는 사람> 이였다. 목차를 만드는 과정에서 더할 것은 딱히 없었지만 뺄 것은 많았기에 힘을 들이지 않고 빠르고 간결하게 작업했다. 이만큼 진솔하게 나를 글로 드러내는 경험을 거치고 나니, 왠지 모르게 한층 더 글쓰기가 좋아졌다.

  6. Reconfinement 재봉쇄령에 갇혔다. 노엘까지 전시와 공연이 모두 취소되었다며 한숨쉬는 친구들. 이 총체적 난장은 역사속에 고이 쓰일 것이며 공부되겠지. 프랑스 정부는 마치 폭주하는, 그러나 고장난 기차같다.

  7. 한달 동안 준비한 인터뷰는 기획한 의도와는 100% 어긋났고, 책을 생각하고 기획하는 무게에 눌려 흔들리는 우선순위들을 순서대로 처리하지 못했다. 그중 그나마 잘 성사된 몇 일들은 헤프닝에 불과할 정도로 -물론 놀랍게도 결과는 너무나 좋게 나왔기지만- 사전조사와 답사는 불만족에 가까운 끝을 냈다. 한 권의 책이란 언제나 즐거운 여행이라는 말은 대체 누가 한걸까. 머릿속에 펼쳐지는 만큼 따라와 주지 않는 것들에 대해 난 이토록 절망적이고 아쉬운데 말이다.

  8. 지난 10월 15일 일요일, 유럽의 썸머타임이 종료되었다. 이는 며칠 전 부터 알고 있었지만 당일 시계와 핸드폰 속 숫자가 가리키는 시간이 다름을 눈으로 보면서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손목 시계는 열두시를 가르키고 있었지만 실상 시간은 열한시였다. 친구가 제대로 된 시간을 알려줬기에 망정이지, 모든 강의를 한 시간 늦게 들어갈 뻔했다. 올 겨울의 시작이 한시간 빨라진 것도 모른채 그렇게 한 시간을 잃어버렸다. 한 시간 동안 할 수 있는 일은 많진 않겠지만, 왠지 억울했다.

  9. 용서는 나를 위해 하는 것임을 다시 한 번 배울 계기를 딛고 일어섰다. 아주 힘겹게. 누군가를 미워하는 데는 엄청난 에너지가 들기도 할 뿐더러 나에게 좋지 않은 잔상을 남겨 태도와 생각에 영향을 미친다. 부정적인 마음이 들더라도 그렇게 먹지 않으려 애쓰며 버둥거렸다. 걸러내고 싶은 이 나쁜 기분을, 내 마음 언저리로 계속 밀어냈다. 내가 선택한 것이 나를 힘들게 할 것이라는 어디선가 들은 문구에 그래, 이것 또한 나임을 다시 생각한다. 내가 선택한 친구가 나와 싸울 친구고, 내가 선택한 애인이 나와 헤어질 사람이라는 것.

  10. <예술하는 습관>을 읽으며 간단히 기록한 부분. 생활비를 벌려고 쉬지 않고 레슨과 글쓰기 수업을 병행해왔다. 책 출판이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아 일을 계속해야 했다. 하루 최소 7000 단어를 목표로 잡고 썼다는 전기 작가 클라인처럼은 아니더라도, 얽히는 생각의 실타래를 어느정도는 생산적으로 기록해 내는데 성공해왔다. 쓰는건 문제가 아니였다. 나에겐 ‘어떻게 쓰는가’ 가 늘 더 중요했으니까. 나의 하루는 무엇으로 채워지는가, 필사는 어느정도 하는가. 이런 질문을 이 책의 도입부에서 찾아냈고, 나에게 적용해본다. 누구나 제한된 에너지를 갖고있기에 나의 욕구는 어디서 초래하고 어떻게 쓰이는지 잘 파악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떠오른 생각 또한 또한 귀퉁이에 적어두었다.



03.11.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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