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ul essay-야자 시리즈] 야간 자율 방문

in #kr6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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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년 가을, 당시 함께 근무하고 있던 교장선생님께서 나를 부르셨다.

 “선생님, OO고등학교 출신이죠? 거기서 선생님 한 분을 추천해달라기에 마침 선생님이 그 학교 출신이기도 해서 선생님을 추천했어요.”
 “추천이라면, 무슨… 일로요?”
 “나도 자세한 건 잘 모르겠어요. 그쪽에서 아마 곧 연락이 올 거예요. 거기서 윤리 가르치는 OOO선생님 알지요? 내 친굽니다.”

 그 윤리 선생님을 떠올려 보았다. 말투가 나긋나긋하고 학생들에게 큰 소리 한 번 내는 법이 없었던, 선비 같은 선생님이셨다. 나도 그 분께 윤리 교과를 배웠었다. 졸업한지 20년 가까이 됐는데, 아직 같은 학교에 계셨다. 교사들이 주기적으로 이동하는 공립학교와 달리, 사립 고등학교의 선생님들은 한 번 채용되면 중간에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그곳이 거의 평생직장이 된다.

 지난 20년은 나에겐 변화무쌍한 시기였다. 고등학교 졸업을 하고, 대학을 가고, 군 복무를 마치고 다시 수능 시험을 쳐서 다른 대학엘 갔다. 대학을 졸업하고 선생이 되어 아이들을 가르치고, 결혼을 해서 아이도 낳아 기르고 있다. 내 인생에선 계속 새로운 고개를 넘어 왔는데, 고교 시절 나를 가르치셨던 선생님들에게 그 20년은 한 곳에 뿌리박은 가로수처럼 비슷한 시간에 비슷한 걸 보고, 비슷한 일을 하는 일상이 반복되는 시간이었을 것이다. 고등학교 선생님을 떠올리며, 같은 시기에 보낸 20년 시간의 의미가 이렇게 다를 수 있다는 걸 생각한다. 지금 내가 보내고 있는, 그리고 한동안 보낼 시간들은 그 선생님들이 20년 동안 보낸 시간들과 비슷한 무늬를 남길 것이다. 한 곳에 뿌리박고 비슷한 일을 하며, 아이들을 키우는 그런 삶 말이다. 가장 크게 달라지는 건 커가는 아이들과 늙어가는 내 모습 정도겠지.

 교장 선생님과 그 얘기를 나눈 뒤 하루도 지나지 않아서 고등학교 윤리 선생님께 전화가 왔다. 선생님의 목소리는 예전 그대로셨다.

 “OO고등학교 교사 OOO입니다. OOO선생님인가요?”
 “네, 선생님 반갑습니다. 말씀 편하게 하세요.”
 “그래 반갑네. 교장선생님께 어디까지 말씀을 들었는지 모르겠는데…….”

 윤리 선생님께서 학교의 교사 한 명을 추천해달라고 하신 건, ‘전문 직업인 특강’을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그 즈음 시내 고등학교들은 유행처럼 여러 분야의 전문 직업인들을 학교로 초청하여 진로 교육 특강을 진행했다. 내 모교는 가을의 어느 날 야간자율학습 시간에 그 특강을 진행할 계획이었고, 나는 전문 직업인 특강 강사 중 한 명으로 근 20년 만에 모교를 다시 찾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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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강 시작 시간은 8시였고, 30분 전에 학교 도서관으로 모이게 되어 있었다. 난 변화된 학교도 둘러보고, 고3때 담임 선생님을 찾아뵙고 인사를 드릴 작정으로 7시쯤 미리 학교로 갔다. 학교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근처에 오가다가 우연히 들렀던 것도 거의 십년 전의 일이었다. 변화는 교문에 들어서면서부터 체감할 수 있었다.

 그 옛날 흙먼지 날리며 농구나 축구를 하던 학교 운동장은 그 사이 인조잔디가 깔려 있었다. 가장 큰 변화는 인조잔디나 몇 가지 조경의 변화가 아니었다. 내가 다닐 때 남자 고등학교였던 것이 남녀 공학으로 바뀌어 있었던 것이다. 몇 년 전, ‘자율형 사립고’로 지정되면서 여학생도 입학하게 되었다. 때때로 어둠 속에서 정신 교육을 받던 선배들의 신음 소리와 땀이 서린 이 학교에 여학생이 걸어 다닌다니. 여성 후배가 생기다니. 이런 놀라운 일이!

 오랜 기간 동안 남학생들의 체취가 가득했던 이곳에서, 성별의 구성 변화는 아마도 쓰나미처럼 기존의 체계와 분위기를 흔들었을 것이다. 선생님들도 여학생의 입학과 함께 ‘남학생’을 다루어 왔던 투박하고 카리스마 넘치는 방식의 일대 변화를 맞게 되었을 것이다. 같은 교사의 시각에서 생각해보자면, 지도 대상에 여학생을 추가하는 일은, 단순히 다른 지도 방식 하나를 추가하는 문제가 아니다. 그건 기존의 지도 방식의 재설정을 요구하는 일이다. 남학생의 특성, 여학생의 특성을 고려해야 할 뿐만 아니라, 남학생과 여학생이 함께 일으킬 수 있는 복잡다단한 일들도 고려해야 하고, 한쪽 성별을 지도할 때 다른 성별의 학생들이 지켜보고 있다는 것도 고려해야 할 요소가 된다. 지도 시 유의해야 할 수많은 경우의 수가 생기는 것이다. 이제 선생님들의 지도 대상은 ‘남학생’에서 ‘사람’이 되었고, 지도 방식 또한 새로운 좌표 설정이 필요하게 되었을 것이다. 이후 강사 간담회에서 교감 선생님은 그 극적인 변화를 한 마디로 표현하셨다.

 "터미네이터 선생님, 산적 선생님 모두 아주 부드러워지셨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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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발 우리 학년에만 배정 안 되기를 소망하던 터미네이터 선생님이 부드러워지셨다니. 많은 선배들의 신음소리를 양산했던 그 선생님이, 여학생들 앞에서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미소를 보내는 모습을 잠시 상상해보았다. 그 상상 속 선생님을 보고도 순간 움찔했다. 시간은 모든 걸 변화시킨다. 터미네이터 선생님도 그 변화를 피하지 못하셨다.

 인조 잔디 위에 저녁이 내려 어둑해진 교정을 가로질러 본관 건물을 향해 걸었다. 본관 건물의 모든 교실은 불을 밝히고 있었다. 쉬는 시간에 나와서 바람을 쐬던 발코니도 여전했다. 본관에 들어서자, 남학생과 여학생이 자연스레 복도를 오갔다. 나는 복도를 걷다가 어떤 학년의 교사 연구실을 지나게 되었다. 보통 담임 선생님들은 학년 연구실에 자리를 잡고 계셨다. 내 고3때 담임 선생님을 찾기 위해서는 담임을 맡고 계신지, 어느 학년인지를 먼저 알아야 했다. 20년의 세월동안 교무실의 위치가 바뀐 것인지, 내가 잊은 것인지를 모르겠으나 교무실의 위치를 찾을 수 없었다.

 지나가는 학생에게 물어 교무실로 들어서니, 거의 대부분의 선생님이 퇴근하셔서 형광등도 드문드문 켜져 있었다. 마침 들어오시던 선생님께 인사를 드리고 고3때 담임 선생님이 어디 계신지 여쭤보았다. 그 선생님은 내가 학교를 다닐 때도 계셨는데, 한 번도 수업은 들은 적이 없는 분이셨다. 그 선생님은 내 고3담임 선생님이 이미 퇴근하셨다며 자리를 알려 주셨다. 난 조금 서운하면서도, 한편으론 다행이라는 양가적인 기분을 느꼈다. 20년 동안 열심히 늙어온 서로의 모습을 보며, 선생님이 나를 편하게 느끼지 않으시면 어떡하지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어쩌면 안 계신 것이 잘 되었다는 생각도 들었다. 담임 선생님 자리에 들고 갔던 음료수 한 박스만 두고 나왔다. 담임 선생님을 기억하는 제자가 그냥 지나치지 않고 들렀다는 사실에 흐뭇한 마음만 느끼시길 바랐다.


다음 에세이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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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들이 저를 기억 못 하실 거 같아요. 워낙 조용했던 아이라..

저도 마찬가지입니다ㅋ 별로 존재감이 없었지요ㅎ

남고가 공학고등학교로 바뀌었군요
야자 시간에 진로교육이라니~ 뒷이야기도 궁금합니다

네 시커먼 남자들만 있었는데, 남녀공학 된 거 보고 깜짝 놀랐지요ㅎㅎ

1.소울메이트님이 남자셨군요. 여자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습니다만.

  1. 고교 윤리샘이셨네요. 의외입니다. 일반 직장인일거라 짐작했네요. 이래저래 제 짐작은 다 꽝이네요.
  2. 출신교에 가면 너무나 많은 상념이 들끓어서 가볼 생각이 안나는데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집니다.

숫자를 메겨 봤더니 제 폰으로는 이상하게 보입니다. 1이 두번이네요. ㅋ

ㅎㅎ 고교 윤리샘에게 연락을 받은 것이고, 전 초등학교에 있습니다^^ 모교에 이런 기회가 아니면 가볼 일이 없었을 거 같아요. 선생님 한 번 찾아뵈어야지 해도 막상 가려면 발걸음이 안 떨어지거라구요ㅎ

아... 헛 읽었네요. 초등학교샘.... ㅎㅋ

모교에 교사란 직업을 설명하러 가다니 ...특이한 경험이네요 ^^
후편이 기대됩니다.

네 특이한 경험이지요. 흥미로운 일이었어요^^

책상 위에 놓인 주스를 보고 선생님이 반가워하셨을 것 같아요
솔메님의 글을 보니 피천득의 인연이 떠오릅니다

네 다음 날 문자 보내셨더라구요. 강사 명단 확인하시고 저를 기억하시고 연락주셨어요. ^^

멋지십니다!. 저도 학교에서 선생님들 찾아뵙고 싶네요

마음처럼 안 되는 일 중 하나인 거 같아요^^

20년만에 모교 방문이라..
다양한 기분이 드셨을 것 같습니다.

네 여러가지 생각과 감정이 들었답니다ㅎ

야간자율 시리즈 가을과 잘 어울려요. 담임선생님이 안계셔서 서운하면서도 다행이라는 양가적 감정이 뭔지 알 것 같아요.

그동안 많이 변했겠어요. 솔메님도 학교도

야자하면 가을 야자인가요ㅋ 소심증 때문에 늘 양가적 감정 사이에서 갈팡질팡하지요.
변화는 모두에게 찾아오더라구요,,ㅎ

ㅋㅋㅋㅋ야자하기 가장 괴로운 계절 중 하나일 것 같아요. 나가 놀고 싶은 단풍들의 유혹 물론 사계절 내내 야자하는 건 곤혹이겠지만요

지금도 계절의 유혹을 이겨내며 야자를 하는 새파란 청춘들에게 박수를!ㅎㅎㅎ

제가 다니던 고등학교는 없어졌습니다. 없어졋다기 보다 통폐합 되어서 다른 학교에 흡수되었죠... ㅎㅎ

씁쓸한 일이네요,, 가볼 일이 없더라도 학교가 있는 것과 없는 것은 큰 차이가 있을 듯 합니다.

특강주제는 야자 탈출하는법 아닙니까??? ㅎㅎㅎㅎ

입이 근질했습니다ㅋㅋ 자리가 자리인지라,,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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