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ul's daily] 자, 작품을 감상해볼까요

in #kr6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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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wifi님께 선물 받은 대문 중에 처음 쓰는 작품이다. 이 대문은 일상의 기록을 남길 때 쓰려고 한다. 쓸리고 금가고 깨진 흔적들이 있는 벽 사진이 배경이다. 벽의 흠집들은 시간의 풍화 작용으로 인한 흔적들 같다.

 나의 일상도, 긁히고 쓸리고 금 가기를 반복하며 앞으로 나아간다. 이 사진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세월의 흔적과 흠집은 시간이 갈수록 더해가지만, 굳건한 벽처럼 버티고 서서 세파를 헤쳐가는 한 사람이 보인다. 흠도 많고 갈라진 곳 투성이지만, 언제나 그 자리에 서서 누군가의 기댈 벽이 되어 주기도 하는 그런 인간 말이다.

 내 삶 깊숙이 현미경을 들이대어 배율을 높여 보았을 때, 이런 벽을 만나게 되기를 소망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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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들과 미술을 했다. 수채화 물감의 번지는 기법을 활용한 작품을 그려보았다. 저마다 자신이 좋아하는 동물을 주제로 표현해보았다. 처음 해보는 방법이라, 대부분 의도한 만큼의 결과는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몇몇 작품은 내게 영감을 주기도 했다. 몇 작품의 제목을 붙이고, 감상을 적어보려고 한다.



* 감정 공기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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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장 마음에 든다. 색의 조화에 감각이 있는 여학생의 작품이다. 색을 표현할 때 방법에 미숙해서 한 가지 색만 시범을 보여주었다. "아하." 하더니, 감을 잡았다는 듯, 색을 표현해갔다. 애초에 2-3가지 색 정도만 사용하라고 권했는데, 더 다양하고 온도가 다른 여러 색을 비교적 조화롭게 사용했다.

 그림 속 개는 고독해 보인다. 그리고 개를 둘러싼 배경의 다채로운 색은, 마치 개의 내면을 보여주는 것 같다. 개는 외로운 자세로 앉아서 이런 저런 다양한 감정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잠시 그런 상상을 해보았다. 우리가 속으로 느끼는 감정이, 우리 주변을 다양한 색으로 물들인다면? 우리가 어떤 감정을 느낄 때마다 우리 주변의 공기의 색이 달라진다면? 사람들은 지금 나의 감정을 훤히 알게 될 것이다. 그것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의 판단은 유보.



* 봄, 곰, 그리고 죽음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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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곰처럼 생긴 남학생의 작품이다. 이 작품을 보는 순간, 마음에 저릿한 슬픔이 느껴졌다. 어떤 생각으로 이런 색을 썼는지 아직 물어보진 않았다.

 곰의 주변을 둘러싼 파란색, 그리고 가장자리부터 파란색으로 번져 들어오는 화사한 연두빛. 난 이 색의 조화가 '지구 온난화로 인해 죽음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는 북극곰'을 보여준다고 느꼈다. 북극의 곰에게 생존을 의미하는 얼음과 냉기가 파란색으로 표현되었고, 곰의 생명을 위협하는 온기는 연두빛으로 표현된 것이다.

 봄은 모두에게 생명을 주고 활력을 준다. 하지만 북극의 곰에게 봄이란, 죽음의 계절과도 같다. 곰에게 봄이 가까웠고 그만큼 죽음과도 가까워진 것이다.



* 보아뱀 속을 걷는 코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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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물 도안을 준비해오지 않은 학생들에겐 미리 준비해둔 코끼리 도안을 주었다. 같은 모양의 코끼리지만, 배경에 따라 다른 이야기가 만들어진다. 이 코끼리 그림을 보고서는, 어린 왕자에서 나왔던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이 떠올랐다.

  코끼리는 평소처럼 사바나를 걷고 있었다. 파리가 눈으로 달려들어 잠깐 눈을 감은 사이, 코끼리는 앞에서 입을 크게 벌리고 있던 거대한 보아뱀의 입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코끼리는 자신이 보아뱀의 입 속으로 들어간지도 알아채지 못한다. 보아뱀의 길고 거대한 뱃속을 걷고 또 걷는다. 언젠가 코끼리는 결국 막다른 길에 다다를 것이고 그곳이 보아뱀의 뱃속이라는 걸 알아차리게 될 것이다. 알아차렸을 땐 너무 늦었다. 우리네 삶에서도 가끔 이런 일이 일어난다.



* 코끼리, 벽을 통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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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끼리는 길을 걷는다. 뒤는 돌아보지 않는다. 후회도 유혹도 다 떨치고 나아간다. 코끼리 앞엔 도달해야 할 목표만이 있을 뿐이다.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거대한 벽을 지나야 한다. 코끼리의 간절함 앞에서 벽은 흐물흐물한 젤리로 변한다. 벽을 앞에 두고도 코끼리는 주저하지 않는다. 코끼리가 새로운 세상을 만나기까지 벽의 반쪽 거리만 남았다.

 이 그림을 그린 아이에게, 배경의 세 가지 색은 무엇을 뜻하냐고 물었다. 아이는 코끼리가 여행 중인 걸 표현하려 했단다. 세 가지 색은 세 지역을 의미한다. 이 코끼리는 색이 다른 여러 곳을 여행중이다.

 내 해석과 아이의 의도 속 코끼리는 비슷한 모습이다. 원래 코끼리의 한계를 넘기 위해 도전하고 있는 것이다. 글이든 그림이든 작가의 손을 떠난 작품은 독자에 의해 새로운 의미를 획득한다. 이 작품 속 코끼리는 나를 만나 벽을 젤리로 만든 우직함을 얻게 된 것이다.



* 청량 코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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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예진, 한지민, 문채원의 뒤를 이어 코끼리 한 마리가 포카리 스웨트 메인 모델로 발탁되었다. 코끼리는 음료의 청량감과 해방감의 느낌을 표현해야 한다. 감독이 코끼리에게 최대한 청순한 표정과 자세를 요구한다.

 코끼리는 난감하다. 고심 끝에 코끼리는 이렇게 말한다.

"제가 청순함을 표현할 수는 없지만, 비가 공기와 온 대지에 번져드는 청량감 속에 녹아들 수는 있어요. 전 아무 것도 새롭게 만들어낼 순 없어요. 하지만 자연이 선사한 그림의 온전한 일부는 될 수 있지요."
"그거면 충분해. 레디 액션!"

 그렇게 코끼리는 아무 것도 표현할 수 없었지만, 청량감과 해방감을 훼손하지 않는 방법으로 감독이 요구한 모든 것을 표현할 수 있었다.




3

 미술 활동을 공유해주신 선생님의 샘플 작품의 완성도에는 한참 못 미치는 작품들이 나왔다. 하지만 좀 모자란 작품이라도 그것에서 어떤 의미를 느끼고 마음이 움직였다면, 완성도를 떠나서 그건 특별한 작품이다.

 난 아이들의 작품들을 보면서 여러 가지 감정을 느꼈다. 그림 속 동물의 하얀 실루엣이 수줍게 말을 걸어오는 것 같았다. "저 말이에요, 전 코끼린데요 그냥 코끼리가 아니고..."

4

 작품이든 사람이든, 그 대상을 어떻게 봐주느냐에 따라 평범해질 수도 있고, 특별해질 수도 있다. 나의 자존감이라는 것은, 평범하기 그지 없는 나를 특별하게 보아준 고마운 분들로 인해 획득할 수 있었다. 어릴 적엔 부모님이, 자라면서는 주변의 친구가, 커서는 우연과 필연의 쳇바퀴 속에서 만났던 많은 지인들이 나를 세워주었다.

 내게 있는 좋은 것들은, 대부분 원래 내가 가진 것이 아님을 알고 있다. 어쩌면, 원래 내 것이라는 건 존재하지 않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우린, "넌 특별하다. 넌 괜찮은 녀석이야." 하는 진실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를 듣는다. 그런 이야기를 들으며 특별한 척 하고 괜찮은 사람인 척 하다가 진짜로 그런 사람이 되어가는 건지도 모르겠다.

 계란의 반숙처럼 한 쪽은 설익은 채로, 다른 일부는 익은 채로 우린 살아간다. 프라이팬 위의 계란을 젓가락으로 헤집어보기 전에는 어떤 상태인지 볼 수 없듯, 우린 설익은 면을 적당히 감춘 채로 서서히 완숙이 되어 간다. 언젠가는, 어쩌면 죽기 전까지도 볼 수 없을 그 '완숙'을 꿈꾸며 오늘도 설익은 부분을 끌어안고 코끼리처럼 묵묵히 걸어가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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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학년 학생들의 작품인가요?
도안이 같아도 배경 색의 조합에 따라, 작품을 만들어낸 아이의 감성에 따라 다른 분위기가 나는 것이 신비롭게 느껴지는 듯해요.
덧붙여진 솔메님의 이야기도 좋구요!

5학년 아이들 작품입니다ㅎ
작품의 분위기는 아이의 감성보다 재료를 다루는 수준에 좌우되는 경우가 많지요. 왜 그 색을 골랐니 물어보면 그냥 칠했다는 답이 젤 많아요. 이야기를 떠오르게 하는 작품들이었어요^^

아... 제가 딱 5학년 수준이네요 ㅎㅎ

쏠매님 순정만화의 주인공 포스가? ㅎ

후문 그림이요~ 실물도 순정만화 삘이 나긴 납니다ㅋ 순정만화의 전형적인 모습과 거리가 멀긴하지만요ㅎ

청량 코끼리 개인적으로 마음에 드네요

네 청량코끼리 마음으로 드리겠습니다ㅎㅎ

다 아이들이 그린 작품인가요? 저보다 훨씬 실력이 좋은것 같은데요!!
예술적 감각도 유전인가봐요!! ㅎㅎ

네 가르치는 아이들이 그린 것들입니다^^ 때론 어른들은 못 나타내는 걸 표현하기도 하지요ㅎ

영화 Molly's Game이 생각나는 내용입니다. 저도 그렇게 무소의 뿔처럼 살아가고 싶었으나. 종종 폭 주저앉고 맙니다.

영화를 잠깐 찾아보니 흥미로운 내용이네요ㅎ 희망에 대한 얘기인 거 같네요. 기회가 되면 봐야겠어요.

첫번째 그림의 색감은 저희집 안방에 걸려있는 그림과도 비슷해요. 조화롭게 사용할 수 있는 그 능력이 부럽네요 :)
북극곰 이야기도, 여행중인 코끼리도 잘 보고 갑니다. 저도 듣고싶은 미술수업이예요.

안방에 걸려있다는 그 그림도 궁금해지네요. 다양한 색의 조화가 흥미롭죠. 아이들의 작품에서 이야기가 떠오르는 즐거운 경험을 종종 한답니다^^

오 색의 조화가 정말 비슷하네요ㅎ 어딘가 강아지가 숨어있을 거 같은.

각각 그림의 덧붙여진 이야기가 좋네요. 이래서 미술감상은 설명이 필요한가봐요.ㅎㅎ 개인적으로는 여행하는 코끼리가 마음에드네요!
by효밥

짧은 이야기 잘 봐주셔서 감사합니다ㅎ
효밥님이야말로 뚜벅뚜벅 묵묵히 여행하는 코끼리 같다고 할 수 있겠네요^^

대문의 돌에 대해 풀어가는 이야기가 좋네요.ㅎㅎ

만드실 때 의도하신 거죵?ㅎㅎ

아이들 작품들이 저마다 넘 멋져요 !!! 다 맘에 드네요:)

금손 라나님이 맘에 드는 작품이니 진짜 좋은 작품들이 맞군요ㅎㅎ

색감에 따라 여러가지 의미로 해석이 가능하네요
많이 어려워 보이지는 않아서 한번 시도해보고싶습니다 ㅎㅎ

네 하는 방법은 어렵지 않아요.ㅎ 동물 도안을 도화지에 연필로 그리고, 나머지 배경에 아주 옅은 색으로 붓에 물을 듬뿍 묻혀 바른 다음, 2차로 좀 더 진한 색을 발라주면 색이 번지면서 묘한 배경이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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