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별을 본다. 외롭지 않으려고. / 002

in #kr6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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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 the writer







   혹시 자신은 죽더라도 세상은 영원할 거로 생각하는가? 천만에. 우리가 흔히 세상 하면 떠올리는 지구만큼 유한의 강력한 증거는 없다. 지난 46억 년 동안 이미 수많은 생명체가 나타났다가 사라졌으니 태양계의 공동묘지라 불릴 자격이 충분하다. 지구 자체도 언젠가 어떤 식으로든 사라질 거고 그 주범은 우리가 무궁토록 타오를 것이라 여기는 태양이 될 수도 있다. 태양이 소멸의 절차를 밟기 위해 적색거성으로 팽창할 때 보기 좋게 한 입 거리로 집어삼켜 지는 정도가 영원불멸로 우리를 속여온 창백한 푸른 점의 최후일 것이다.

   우주는? 과거에도 있었고, 현재에도 있으며, 미래에도 있을 그것은 과연 말처럼 그렇게 될까? 지구나 우주나 다를 건 없다. 모두 유통 기한 딱지가 붙은 산물이고 언젠가는 어떻게든 될 운명이다. 영혼은? 영적 세계는? 누군가 그렇게 반문한다면 나는 할 수만 있다면 콧방귀를 뀌었을 것이다. 사후 세계는 일단 제쳐놓고 영혼만 보더라도 그런 말은 얼마든지 깔아뭉개줄 수 있다. 일반적인 의미로 영혼은 곧 정신이다. 저열한 육신과 분리해서 취급해야 마땅한 고차원적인 존재. 썩어 문드러지는 육신과 달리 영원불멸을 보장받은 존재. 그러나 우리가 영혼이라고 믿는 정신은 결국 뇌의 작용이다. 새로운 패러다임의 시대에서 정신이 물적 작용이라는 건 이제 상식이다. 사고와 감정이 시냅스와 호르몬의 복잡하고 복합적인 활동의 결과물이라는 걸 우리는 안다. 오랫동안 마음의 병으로 여겨졌던 우울증도 세로토닌이니 멜라토닌이니 하는 호르몬들이 관여한 물적 차원의 병에 불과하다는 걸 이제 우리는 안단 말이다. 많은 이들이 신비의 영역에 남겨두길 원하는 사랑, 특히 남녀 간의 불꽃 튀는 강렬한 사랑도 예외는 아니다. 몇몇 호르몬들로 조제된 칵테일에 뇌가 흠뻑 빠진 것에 불과하다는 것도 더는 비밀이 아니다. 누가 그걸 밝혀냈는가? 현대의 진정한 마법사인 위대한 과학자들이다.

   그들 중 하나가 TV에 나오고 있다. 적당히 곱슬곱슬한 까만 밤색 머리칼을 보기 좋게 넘겨 훤히 까발린 얼굴. 그 얼굴이 윗니를 드러내며 활짝 웃고 있다. 활력과 자신감 넘치는 저 미소. 그게 매력적이라는 걸 스스로 잘 알고 있는 저 미소. 그것으로 하여금 사람들을 무장 해제시키려는 의도가 담긴,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되는 저 미소를 나는 증오한다. 그 미소에 홀린 미모의 여자 리포터가 사심이 담긴 눈빛으로 박사에게 질문한다. 박사는 적당히 좋은 중저음의 목소리로 전문적인 설명을 늘어놓는다.

   됐다. 더 듣고 싶지 않으니 생각을 해야겠다. 아까 하던 얘기로 돌아가 보자. 그래, 영혼. 뇌가 손상을 입으면 제아무리 똑똑한 사람이라도 이전과 같은 사고 활동을 할 수 없다. 고차원적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 그래서 저열한 육신과 따로 떼어 취급하고 싶은 정신이란 게 고작 그 정도로 약한 존재란 말이다. 영혼과 정신은 다르다고? 이런 생각을 해본 적 있는가. 여기, 태어날 때부터 뇌에 문제가 있는 아이가 있다. 이 아이는 성인이 되고 중년이 되고 노인이 될 때까지 지능이 일곱 살 수준이다. 이 아이가 일곱 살에 죽으면 정신과 육신이 그럭저럭 잘 조화를 이루겠지만 일흔 나이에 죽었다고 치자. 노인의 얼굴에 어린애의 지능이라니. 이 아이, 아니 이 사람은 계속 그런 부조화 상태로 영원불멸해야 한단 말인가?

   영혼은 생애 가장 아름다운 때로 돌아가는 거라고 믿는 사람들도 있다. 대체 어떤 교육을 받아야 그런 생각을 하게 되는지 그 의문은 제쳐놓고 한번 생각해 보자. 생애 가장 아름다운 때가 대체 언제인가? 이팔청춘? 천국 구성원의 다양성을 위해 어떤 이는 젊음 그 자체가 매력인 20대로, 어떤 이는 완숙미를 자랑하는 40대로 돌아간다고 하자. 거기까지는 그럴싸하다. 문제는 다른 데 있다. 한창때 이룩한 그 모습이 자신이 끌어낼 수 있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일까? 어쩌면 그들은 훨씬 더 좋은 상태를 만들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더 균형 잡힌 식사를 하고, 더 열심히 운동하고, 더 크게 웃을 수 있는 일들이 많았다면. 그것으로 끝일까? 시대마다 미의 기준이 다른데 그건 어떻게 해결할 건가. 그 역시 다양성을 위해 간단히 무시하면 그만일까? 그렇다고 치자. 아예 영혼을 육신의 형태고 뭐고 없는 존재로 만들려는 시도도 있으니까. 그에 비하면 차라리 이쪽이 더 그럴싸하다.

   결국, 영혼은 정신이라는 말인데 이는 앞서 언급한 문제로 돌아간다. 정신이 영혼이면 태어날 때부터 아예 사고 기능 자체가 정지된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가? 인간으로서의 고등 사고 작용이 아닌 동물적인 수준의 사고만 할 수 있는 불운한 이들은 어떻게 되는가? 그 안에 고귀한 영혼이 갇혀 있다고 말할 텐가? 좋은 시도다. 이런 문제는 어떨까? 정신을 한마디로 정의하면 생각하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생각의 근원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접하고 느낀 것이다. 어느 시대 어디서 어떤 신분으로 태어나 무엇을 배우고 겪느냐가 굉장히 중요하게 작용할 수밖에 없다. 고대의 노예가 어찌 자신을 왕과 동일한 인간으로 여기겠는가? 중세의 소작농이 어찌 신을 부정하는 생각을 하겠는가? 이들은 죽어도 생전의 틀을 바꾸지 못한다. 이런 차이조차 천국의 다양성을 위해 무시하겠는가? 그렇다면 지능은 어떤가. 생각하는 능력은 어쩔 수 없이 지능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게 된다. 아무리 좋은 시대에 좋은 신분으로 태어나 좋은 교육을 받는다 해도 지능이 떨어지면 공부에 한계를 보이고 생각의 지평을 넓힐 수 없다. 저능아 수준을 간신히 면할 정도의 지능으로는 절대 깊은 사유에 도달할 수 없다는 얘기다. 역대 철학자나 사상가 중에 지능이 낮은 경우를 본 적 있나? 그렇다면 대체 그런 이들의 영혼은, 정신은 대체 무어란 말인가? 좋은 유전자를 물려받지 못했다는 죄로 멍청한 상태로 영원토록 불멸해야 한단 말인가?

   그것이 내가 사후세계를 못 믿는 이유는 아니다. 내가 물리 영역을 넘어서는 모든 걸 부정하게 된 건 단순한 이유에서다. 내가 이 모양 이 꼴이 됐으니까. 마음속으로 수천수만 번도 더 빌었건만 여전히 내 몸뚱이는 깨어날 생각을 안 하니까. 굴하지 않고 정-도미니크 보비처럼 역작을 남겨 보기 좋게 한 방 먹이고 싶지만 그러기에는 아까 말했듯 난 너무 어린 나이에 환자가 됐다. 풍파를 이겨낼 단단한 몸통과 껍질을 갖기도 전에 싹을 밟혀 버린 것이다. 많은 이들, 엄마와 형을 비롯해 친구들, 그들의 부모들, 선생님, 사탕 가게 아주머니, 만화 가게 아저씨, 일면식도 없는 지역 주민들까지 기적을 부르는 중얼거림에 동참했으나 그들이 믿는 초월적 존재는 귓등으로도 안 들은 거 같다.

   희박한 가능성으로 존재할 그 존재를 원망할 생각은 없다. 따지고 보면 기도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잘못된 것이다. 사람들이 하는 기도란 게 얼마나 하찮은 것인지는 차치하고, 이런 문제는 어떤가. 어떤 축구팀을 응원하는 이들이 있다. 그들은 자신이 응원하는 팀이 상대편을 이기기를 기도한다. 그들의 믿음과 기도를 수치화했을 때 100의 힘을 가진다고 하자. 상대편에도 그들을 응원하는 이들이 있다. 그들의 믿음과 기도 역시 100의 힘을 가진다. 이 경기는 무승부가 없는 경기다. 승부차기를 해서라도 결판내게 돼 있다. 그럼 그 절대적 존재는 누구의 손을 들어줄까? 이런 반론도 가능할 것이다. 그렇게 단순한 믿음과 기도 대결이 아닌, 마치 배심원단처럼 모든 인과를 고려해서 신중한 판단을 내리게 되는 일이라고. 하하. 아니 대체 애초에 왜 신이 그딴 문제를 신경 써야 한단 말인가?

   TV에서는 여전히 활짝 웃고 있는 박사가 한 남자와 우정 어린 어깨동무를 하고 있다. 남자는 귀 언저리를 제외하고 시원하게 벗겨진 머리로 한창때의 존 말코비치 같은 인상의 소유자다. 말코비치는 주체할 수 없는 감격으로 함박웃음을 지은 다음 다소 얼떨떨한 얼굴로 인터뷰에 응하고 있다. 감금증후군이 자기를 얼마나 무력하고 절망적으로 만들었는지 토로하며 자신이 다시 일어난 것에 신께 감사드린다고 한다. 아니 자기를 치료한 장본인이 옆에 있는데 왜 신께 감사를 드리나? 내 비난을 듣기라도 한 듯 말코비치가 곧바로 옆에 서 있는 박사에게 말한다. 더불어 이런 기적의 약을 만들어줘서 진심으로 고맙다고, 노벨상 위원회에 수백 통의 편지 폭탄을 보내겠다는 농담까지 덧붙인다. 아니, 진담인가?

   감금 상태에서 풀려난 사례가 없었던 건 아니다. 그럼에도 이번 케이스가 공식 회견까지 열린 데는 이유가 있다. 감금증후군은 보통 뇌간의 손상으로 생기는 증상이다. 다른 경우는 색전이나 혈전 때문에 기저 동맥이 막히거나 해서인데 수술 등의 방법으로 치료할 수 있다. 운동 기능이 완전히 회복되지는 않으나 그럭저럭 재활은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번에 개발된 치료법은 나처럼 뇌간의 손상으로 더 어떻게 손쓸 수 없는 환자를 대상으로 한 거다. 손상된 뇌간의 기능을 약물로 대신한다나 뭐라나. 그것도 이전과 같이 신체가 제대로 작동하는 상태로 돌려놓는다는 것이다. 플래시 세례를 받으며 상기된 얼굴로 웃고 있는 저 말코비치 씨처럼.

   장면이 바뀌어 이제 박사의 개인 이력에 관해 나오기 시작한다. 연구실에서 일하는 모습, 일어나기 전의 말코비치와 의사소통하는 모습 등이 나오더니 갑자기 어린 시절 모습이 나오기 시작한다. 일란성 쌍둥이 동생과 함께 찍은 사진과 홈비디오 일부다. 박사가 감금증후군 치료법에 매진한 이유가 바로 같은 증상에 시달리는 동생 때문이라는 설명이 나온다.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달리 말하면 박사는 동생을 위해 타인을 상대로 실험한 게 아닌가. 멍청한 놈. 그런 건 끝까지 숨겼어야지. 그런 불순한 동기로 마구 실험한 걸 정부와 학계에서 가만 놔둘 거 같아? 사람들이 퍼부을 비난의 화살은 또 어떻고?

   그런데 그런 비난은 나만 보낸 모양이다. 박사가 자신의 일터인 패터슨 기념 의학 연구 & 치료 센터로 나를 데려갈 때까지도 그런 비난의 목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박사가 나를 데리러 직접 왔을 때 병원 사람들 모두가 박사를 환영하고 엄마와 내게 격려의 말을 건넸다. 박사는 이미 새크라멘토 출신 중 최고의 영웅으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빌어먹을 닥터 해든. 빌어먹을 내 쌍둥이.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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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점 재미있어지네요. 마지막 한 줄이 임팩트 있는데요. :)
주인공에 대해서도 조금은 더 잘 알게된 거 같고..

브리님 오셨군요. 감사합니다. 전체 이야기 중 제일 지루한 부분을 넘긴 거니 앞으로 더 재미있어질 겁니다 :)

1편부터 잘 보고 있어요 ㅎㅎ 화이팅!

감사합니다 :D

독설을 퍼부은 그 과학자가 사실은 주인공의 쌍둥이였군요... 세상에...

가족이기에 더 모진 소리를 하게 되지요 보통...

와...소름 쫙 돋았습니다!ㅜㅠ
말이 필요 없네요. 너무 잘 보고 있습니다!!!

늘 감사합니다! 해리슨님 :)

오....이런 전개가....
문장력도 대단하십니다.

감사합니다. 다음 편도 함께 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

장 도미니크 보비(왜인지 모르겠지만 구글 검색은 이름을 이렇게 적어주네요. 외래어 표기법 때문일까요)가 잠수종과 나비 작가였군요. 언젠가 그의 일화를 읽은 적이 있어서 한층 이야기에 빠져들었어요. 일란성 쌍둥이인데 이렇게 삶이 달라져버리다니 마음이 좋지 않네요. 저라면 더욱 심하게 비뚤어졌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네. 외래어 표기법 때문입니다. 불어 표준 읽기법으로는 '정'이 맞습니다. 뒤에 하이픈은 반드시 넣어줘야 하구요.
사이좋은 형제자매는 부모의 한결 같은 바람이지만 정작 아이들에겐 반드시 도움이 된다는 보장은 없는 것 같습니다. 오히려 없느니만 못한 사이가 많지요. 가족이라는 작은 공동체에서부터 어렵습니다. 인간의 삶이란...

오늘은 내용이 심오하네요.
오늘도 무언가에 홀린 듯 작가님에 블로그에 잠시 발길이 머뭅니다. 현대 과학이 발달하면서 인간의 상상력이 서서히 문이 닫히고 있네요. 영혼조차 과학적 근거에 의해 존재하지 않음을 증명 당하니 말이죠. 하지만 인생을 표현하는 기쁨, 슬픔은 모두 구체적이지 않고 추상적인 표현이니 인간이 인간으로써 존재하기 위해 구체적인 과학도 필요하지만 추상적이고 과학적이지 않은 부분들이 공존해야 되지 않은가 생각 됩니다.

인블리님 오셨군요. 감사합니다. 하락장은 잘 버티고 계신가요?ㅠㅠ 댓글 다는 사이에 살짝 반등하고 있긴 합니다만... 아차 여긴 코인 포스팅이 아니죠ㅋㅋ
예전에는 인간 고유의 것으로 여겼던 것들이 사실은 그렇지 않더라는 걸 다른 동물들에서도 찾을 수 있죠. 거기에 뇌과학의 발달로 인간의 감정까지 측정하고 작동 원리를 설명할 수 있는 시대이니 낭만이 좀 떨어지긴 합니다. 다행히 우리는 그런 복잡하고 어려운 부분은 과학자들의 몫으로 돌리고 즐겁게 감정을 나누며 살면 되겠죠😂

과연 해든의 치료에따라 '나'는 일어날 수 있을까요..
다음편 기대합니다~!

일어나야겠죠?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다음 주에 만나요~

이제 감금해제되는 건가요? 게다가 쌍둥이!!! 우와! 기대되욧!

밀어서 잠금해제...! 다음 주에 확인하시죠 :)

흠, 쌍둥이었다니...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

재미있게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 주에 뵙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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