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눈 덮인 새벽

in #kr6 years ago

눈 덮인 새벽

도종환

세상을 온통 하얗게 덮어놓고 새벽은
산허리로 물러나 앉은 채 사람들이 깨어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헐벗은 나뭇가지도 텅 빈 들판도
감히 손대기 어려운 고운 풍경으로 바꾸어놓고
고요히 호흡을 가다듬는 초겨울 새벽에는
나도 조건 없이 남을 덮어주고 싶습니다
용서하고 싶습니다
내 마음 눈 덮인 들판처럼 넓고 깨끗해져
그러는 건 아니고 지난 날
용서받고 싶은 일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비틀거리며 걸어온 발자국을
함박눈이 밤새 덮어주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부끄럽게 돌아선 골목길
있어야 할 어려운 자리를 지키지 않고
내내 마음 무겁던 나날들과
지키지 못한 언약들도
눈처럼 다 덮어주었기 때문입니다
용서할 수 없는 것 까지 많이 용서해 준 것은
내가 아니라 그들이었습니다
지난 가을 풀벌레들 사랑의 음성은 전해주고
몸은 가려준 풀숲처럼 나도 그들이
감추고 싶은 것들을 덮어주고 싶습니다
이 아침 내가 많이 너그러워져서가 아니라
실아 오면서 내겐 강물 같고 남에겐 서릿발 같은
날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깨끗하게 지워주고 싶습니다
내가 그럴 만한 자격이 있다면 저 눈처럼
덮어주는 일이 풍요로운 모습이 되고
용서가 빛나는 풍경이 되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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