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수부대와 해병대

in #kr6 years ago

“공수부대와 해병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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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부마항쟁에 관한 구술사자료들을 보고 있다. 아니 정확히는 듣고 있다. 부마항쟁의 초기 폭발력에 관한한 바로 1년 후인 광주항쟁을 훨씬 능가하는 것이었다. 부마항쟁은 1979년 10월 16일 부산대, 동아대 등 학생들의 반유신, 반박정희 시위로 촉발되었다. 학생시위대는 교문에 방어선을 구축한 전경들의 방어선을 돌파하며 가두시위에 돌입했다. 이에 일반 시민들이 대거 가세함으로써 부마항쟁을 걷잡을 수 없는 격렬한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16일 첫날에만 약 5만 명이 시위에 참여했으며 당시 집권당인 공화당사, 파출소 등 주요관공서와 어용방송사들이 불타올랐다. 다음날인 17일에도 시위는 더욱 거세게 지속되었고, 18일에는 인근 마산으로까지 확산되었다. 이에 박정희 유신정권은 18일 자정을 기해 부산에는 비상계엄령을, 20일에는 마산에 위수령을 발효한다.

유신체제 선포이후 그간 별다른 위기 없이 철저한 통제를 자랑하던 박정희 정권에게 분명 부마항쟁은 직, 간접적인 충격이었다. 계엄령 선포이후 시위진압군으로 부산시내에 진입한 병력들은 특전사 공수 1, 3여단과 해병대 3여단이었다. 공수부대 1단장인 박희도와 3여단장인 최세창은 전두환의 군부 내 사조직인 ‘하나회’멤버들로서 일 년 후 광주민중항쟁에도 등장하는 인물들이다.

그런데 이상한 점은 시위진압방식이 구술자료 구술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공수부대와 해병대가 전혀 달랐다는 점이다. 먼저 투입됐던 공수부대들의 시위진압방식은 광주민중항쟁 때의 방식처럼 무자비하고 잔혹하기가 짝이 없었다고 한다. 골목길들로 민가에 숨은 시위용의자들을 끝까지 추격, 체포하여 곤봉으로 내리쳐 곤죽을 만들어버리거나, 일반시민들이 버젓이 보는 앞에서 연행자들에게 가혹한 폭행을 자행하는 것이 다반사였다고 한다.
그런데 해병대의 시위대응 방식은 달랐다고 한다. 해병대는 공수부대의 강경진압과는 달리 시위 진압 시 학생들과 시민들이 던진 벽돌과 돌멩이에 맞아 피를 흘려도 묵묵히 ‘무력(無力)행진’으로만 시위대를 밀어냈다고 한다. 공수부대와 해병대의 시위 대응방식의 차이는 관련 증언뿐만 아니라 부마항쟁에 대한 여러 기록물에서도 확인된다. 물론 해병대가 공수부대와는 달리 시위진압훈련을 받은 적이 없고, 여단장인 박구일 대령이라는 사람이 시위대와 시민에 대한 ‘절대무력행사금지’라는 명령을 내렸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대목이다. 박구일은 훗날 지금 새누리당의 전신인 민자당에서 국회의원까지 했던 인물이었다. 무엇보다 명령에 죽고 사는 철저한 위계체계의 상명하복의 철칙이 관철되는 곳이 군대조직이 아니던가. 또한 때는 서슬 퍼런 박정희 유신독재시대로 군은 권력의 강력한 보루이자 홍위병들이었다.

혹자들은 특전사 공수부대와 해병대의 특성에서 그 이유를 찾는 사람들이 있다. 하사관 이상의 간부중심으로 ‘개인’단위의 목숨을 담보한 작전수행을 주로 해야 하는 공수부대의 어쩔 수 없는 적에 대한 ‘살기’와 일반 사병중심으로 ‘집단’단위로 상륙작전 시 내던졌을 때 서로 상호간의 결속, 의지할 수밖에 해병대와의 특성의 차이라는 것이다. 최근 특전사 공수부대원들의 가상 포로훈련 때 사고로 2명의 대원이 사망했을 때 어느 진보적 성향의 모 신문의 기사도 특전사의 조직과 훈련방식을 비판하며 그런 논조였다고 기억한다. 그러나 그 특성의 차이 역시 명확한 설명이 되지 못한다. 10.26 당시 ‘시위대를 탱크로 깡그리 밀어붙이면 그만이다’라는 말을 예사롭게 지껄이던 박정희와 차지철이 아니던가.

어쨌든 해병대의 시위대응방식이 효과가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부산에서 약 1000여명, 마산에서 약 500여 명이 연행될 정도로 격렬하게 전개되었던 부마항쟁은 급속히 진정되어갔다. 앞서의 해병대의 고유한 특성을 언급했던 사람들은 해병대의 진압방식 때문에 시위가 진정국면에 이르게 되었다는 식으로 설명하지만 오히려 해병대를 ‘영웅화’, ‘신비화’ 할뿐 충분히 납득이 될 수 있는 내용이 아니다. 그 폭발력은 강렬했지만 애초 자생적, 비조직적 투쟁일 수밖에 없었던 부마항쟁의 근본적인 한계가 더 이상 시위가 확산되지 않았던 주된 이유가 아니었을까. 그러나 비슷했던 광주항쟁은 또 다르지 않았던가. 해병대의 온건한 대응방식이 시위확산을 막았다면 그건 해병대의 특성과도 일정한 상관성도 부정할 수 없겠지만, 박정희 유신체제의 철의 통치에 그 첨병이었던 군부내부에 균열이 존재했음을 시사해 주는 것이 아닐까.

부마항쟁 당시 공수부대와 해병대는 왜 다른 대응방식을 취했으며, 그 근본적인 이유는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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