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닝썬 논란 단상

in #kr5 years ago
  1. 페북에 도는 여러 글들을 보았다. 김용민의 글이야, 일관성 있는 그의 모습에 별로 놀랍지도 않고 언급할 필요조차 느끼지 못한다. 오히려 '버닝썬 논란의 본질'이란 글을 보며 여러 생각이 들었다. 사건의 경과가 잘 정리된 글이었는데, 결국 사건의 본질이 정준영이란 연예인의 혐오스런 행각이 아니라, 공권력마저 유착된 버닝썬, 아레나에서 범죄행각을 했던 다른 거물들이 누구인지를 찾는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런 시각에 대해 나는 이렇게 얘기하고 싶다. "당신이 생각하는 본질도 중하지만, 당신이 물타기라고 생각하는 것도 사소하지 않다." 많은 이들이 정준영과 그에 얽힌 연예인들이 누구인지 이목을 집중하지만, 여전히 이 사안과 관련된 여러 중요한 이슈들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다. 관심 자원이 한정되어 있다고 해도, 그걸 핑계로 엉뚱한 음모론을 펼치는 것도 경계해야 한다.

  2. 정준영 카톡방 사안이 사소하지 않은 이유. 난 남중 남고 공대 군대를 나왔다.(어디서나 아싸였는데, 아싸의 수준이 그래도 군대에서 제일 낮았다) 특히 남중 남고란 남초 커뮤니티에서 겪은 여성혐오 문화는 지금 생각해도 황당하고, 내 아들이 저런 커뮤니티에서 성장하길 절대 원하지 않는다. 여성을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절대 할 수 없는 얘기들이 일상적으로 만연한 문화였다. 그걸로 웃고, 그걸로 자랑하며 남성성을 과시하고, 그냥 그게 일상적이란 말로는 제대로 표현이 안 될만큼 그 때 그 공간의 공기를 꽉 채우고 있었다. 정준영 카톡방 속의 대화가 그냥 일상화된 문화라고 보면 된다.

  3. 돌이켜보면 그때 그 문화의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이들은 교사였다. 내가 다니던 남중 남고엔 여학생은 당연히 없었지만, 여교사조차 거의 없었다. 여성은 가정 과목의 교사 뿐이었고, 졸업에 가까운 시기부터 조금씩 여교사들이 들어왔다. 거의 대부분의 남자 교사들은 수업시간에 음담패설을 했다. 성적 호기심이 왕성한 아이들에게 야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 무슨 대수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그냥 야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너무 오래 전이라 그 발언들이 기억나지 않지만, 사실상 성폭력에 가까운 음담패설들이었다. 절대 여성을 인간으로 생각하면 할 수 없는 이야기들.. 기억나는 장면이 하나 있다. 수련회로 어딘가로 가서 학생들이 나름대로의 콩트 같은 것을 했는데, 그 내용이 대부분 강제적 성행위를 묘사하는 장면이었고, 그걸 교사를 포함한 대다수가 깔깔대며 오락으로 소비했다.

  4. 왜 남자의 성적 담화에는 (여성) 인간멸시가 단골 메뉴일까. 남자나 여자나 성을 즐기고 향유할 수 있다. 여기서 넘지 않아야 할 선이 있는데, 상대 성의 인격을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여성들의 음담에 참여한 적이 없으니 잘은 모르지만, 여성들이 쓴 관능적인 글에는 남성을 비하하거나 혐오하는 내용이 담겨있는 사례를 보지 못했다. 하지만 남성들의 음담에는 여성비하, 인간멸시가 거의 빠지지 않는다. 어찌보면 성적 담화에 사용되는 여러 어휘들 자체가 여성혐오적인 내용을 담고 있어서일 수도 있다. 간음할 간(姦)의 한자 자체가 계집녀를 세 개 엮은 것처럼 말이다. 중고등학생들은 교사들이 허용하고 조장한 여성비하, 인간멸시 문화를 자신들의 성놀이의 일부로 삼았고, 계속 그런 커뮤니티 안에서 히히덕 거리던 사람들은 성인이 되어서도 그런 농담을 일삼는다. 가끔 여성 앞에서 조심해야 한다고 느낄 뿐이다.

  5. 한국의 남성 커뮤니티에서 그런 여성비하, 인간멸시 문화를 지적하는 이들은 '이상한 놈' 취급을 받아왔다. 모든 남성들이 여성비하적 성발화를 즐겨하진 않지만, 대다수가 저런 발언이 만연한 곳에서 정색하지도 않는다. 이런 상황인데도 정준영 카톡방 이슈가 물타기라고? 정준영 카톡방은 앞으로 저런 문화에 정색해야 한단 것을 일깨워주는 사안이다. 한국에서 "남자들끼리 하는 말인데"로 시작하는 발언은 모두 헛소리라고 보면 된다. 정준영 때문에 거악 척결을 못하는 게 아니라, 진짜 거악은 정준영 카톡방과 같은 문화를 지속하자고 하는 것이다. 버닝썬, 아레나에 유착, 연루된 이들을 단죄하고, 장자연 사건의 진상을 밝히는 것은 그와 별개로 중요한 사안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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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끼리 하는 말인데' 라는 헛소리를 사회에서 꽤나 오랫동안 들어왔던 터라, 이렇게 단상위로 올라온 그 많은 혐오문화중 일부분이 좀 반갑기도 합니다. 아주 오래전부터, 곳곳이 침투되어있는 혐오를 '연예인'이 까발려 줬으니 이슈가 되는 것은 당연한게 아닐까 생각해요. 버닝썬, 장자연 등 각각 중요한 사항들이니 모두 묻히거나 넘겨지는 부분 없이 다뤄졌으면 좋겠네요. (남중남고 공대셨군요..! 그때 이야기들을 시리즈로 들어보고 싶단 생각도 해봅니다. ㅎ) 좋은 글 감사합니다.

페북에 어이없는 글이 수천건 공유되서, 좀 황당해서 쓴 글이에요. 조금씩이나마 인식이 바뀌어야 할텐데요.. 요즘 학교는 어떨런지 참 걱정이에요. 남중남고 시절은 우울하고 괴로웠던 시절이어서 그런지, 기억이 희미해요. 그땐 정말 학교 다니기 싫다를 매일 속으로 백번 되뇌던 시절이었어요..

동의합니다. 조개해일얘기가 자꾸 재생산되고 있네요 ㅠㅠ

조개해일 얘기를 방금 검색해서 첨 알았네요. 유시민이 나중에 그런 말 한 적 없다고 억울하단 기사까지 있네요;;;

그런 맥락이 아니라고 해명하긴 했지만 해명을 봐도 표현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그런 의도의 발언은 한 것으로 보입니다 ㅎㅎ

"당시 개혁당의 최고의결기구인 집행위원 회의에서 당내 여론에 대한 회의를 했는데 임박해 있는 여러 일정을 제쳐두고 당내의 작은 일로 회의 시간이 소모되는 것에 대해서 (본인이) '우리가 해변에서 조개껍질 들고 놀고 있는 아이와 같다'고 했는데 그게 어느 분에 의해서인지 모르겠으나 왜곡된 것에 대해서 속이 상하다"

http://m.ohmynews.com/NWS_Web/Mobile/at_pg.aspx?CNTN_CD=A0000309195#cb

오 이런 빼곡한 댓글! 고맙습니다 ㅋ

양성평등의 문제가 아니라 기본적인 인간존중의 문제라 여겨집니다.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부터 지킨 이후에 양성평등 논의가 시작되야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게 현실이죠.. 육아하는 대디셨군요ㅋ 팔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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