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바람의 나날 26steemCreated with Sketch.

in #kr6 years ago

"여행은 즐거웠겠지? 귀찮은 놈이 하나 있어. 정말 성가신 놈이야! 그 놈을 죽지 않을 정도로만 만들어 놔.”

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장현태 부장은 사진 한 장과 주소가 적힌 쪽지를 건네주었다.

나는 두려운 마음으로 사진과 쪽지를 받아들었다. 드디어 태풍의 눈 속에 들어왔다는 실감이 들었다.

"가능한 한 빠른 시일 내에 처리하도록 해.“

이유를 묻지 않았다. 그것이 금기라는 것을 알고 있을 뿐더러 설사 묻는다고 해서 장 부장이 설명해 줄 리가 없으므로. 그 또한 이유를 알고 싶지 않았다. 오히려 모르는 것이 더 속 편할 거라는 막연한 생각이 들었다.

다음날 아침, 오전 강의는 빼먹고 해치울 사내가 사는 아파트로 차를 몰고 갔다. 구석진 곳에 차를 세우고 주위를 눈여겨보았다.

어떤 일이든 사전 준비가 철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곳의 지리를 익히고, 일을 처리한 후에 도주할 코스도 반복해서 연습해보고, 어떤 방식으로 일을 처리해야 할지도 스스로 결정해야만 했다. 나는 차안에서 주위를 열심히 살폈다.

차는 동해에서 올라오니, 장 부장이 마련해놓고 있었다. 차가 있어야 일을 수행하기가 쉬울 거라는 말을 덧붙이면서.

나는 운전석에 깊숙이 누운 채, 라디오에서 나오는 노래를 들으며 편안한 자세로 사내가 사는 아파트 입구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사내의 사진을 들여다보며, 사내의 얼굴을 눈에 익혔다. 사내는 이마가 다소 넓은 편이었고, 한쪽 입가가 약간 위로 찢겨져 올라가 있었다. 눈은 작은 편이었고, 광대뼈가 유난히 툭 튀어나와 제법 강인한 인상을 주었다.

정오가 되자, 나는 차를 돌려 자혜가 기다리는 카페로 갔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멋있네요.”

자혜의 단짝 친구 소정이 배시시 웃으며 자혜에게 살짝 눈을 흘겼다. 소정은 이미 대학을 졸업해 대학원에서 신문방송학을 전공하고 있었다. 자혜는 어머니의 병간호 때문에 일 년을 휴학했기 때문에 소정보다 두 학기가 늦어 있었다.

"여행하다 만났다죠? 어머, 부러워라. 나도 여행이나 해볼까? 혹시 강재 씨 같이 멋진 남자라도 하나 줍게 될지…….”

소정은 정말 샘난다는 투로 자혜와 나를 번갈아 쳐다보며 재잘거렸다. 나이답지 않게 발랄한 모습이 어쩐지 마음에 들었다. 여자치고는 말이 없는 편인 자혜와는 대조적으로 소정은 쾌활하고 구김살이 없는 아가씨였다.

"얘, 봐? 줍다니? 강재 씨가 길에 흘린 분실물인 줄 아니?”

자혜가 소정의 팔을 꼬집으며 야무지게 대꾸했다.

나는 자혜가 그렇게 농담을 던지는 게 신기하기까지 했다. 역시 친구가 좋다는 생각을 하며 지금도 산사에서 고통 받고 있을 재호의 얼굴을 언뜻 떠올렸다. 나는 두 여자의 말장난이 우스워 소리 내어 크게 웃었다. 오랜만에 경험하는 즐거운 자리였다.

케익으로 간단하게 식사를 끝낸 다음 교외로 드라이브를 갔다. 좁다란 국도를 타고 잎 진 가로수 길의 전송을 받으며 서울을 빠져나갔다.

이대로 계속 달리다 보면, 어딘가에 마음의 공허함을 메워 줄 무엇이 있을 것 같은 애매한 기대감에 젖어 액셀러레이터를 힘주어 밟았다. 그러나 길은 끝없이 이어졌고, 더 공허해진 마음에 차를 세운 곳은 어느 이름 모를 계곡이었다.

겨울의 초입에 들어선 날씨는 매우 싸늘했다. 계곡 물에 손을 담그다가 차가운 감촉에 깜짝 놀랐다. 계곡은 한 발 먼저 겨울에 접어들고 있었다.

우리 세 사람이 어깨를 맞대고 좁다란 길을 말없이 걸어 올랐다. 나는 산길을 걸어 오르며 결코 잊을 수 없는 그 가을의 회상에 젖어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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