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국의 아버지는 이승만이 아닌 장면이고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틀렸다

in #kr6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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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대한민국 건국의 아버지는 우파에서는 이승만 전 대통령을 꼽는다. 하지만 필자 생각에 진정한 건국의 아버지는 장면 박사라고 생각한다.
이승만만이 대한민국을 세운 사람이라고 착각하는 것은 역사에 대해 무지하고 장면 박사의 업적을 몰라서라고 밖에 볼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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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면은 프랑스 파리에서 열릴 제3차 유엔 총회(1948년 12월)에 대표단의 대표로 지명되었고(1948년 9월), 9월 9일 대표단의 수석 대표로 선출되어 파견되었다. 파리로 출발하기 전 장면은 은사 패트릭 번 신부를 방문했는데, 패트릭 번은 프랑스 파리 주재 교황청대사와 유럽·중남미 국가의 가톨릭국가 대표 및 가톨릭 지도자들에게 보내는 소개장 10여 장을 작성해 주었다.[8]:79 동시에 패트릭 번은 교황 비오 12세에게 “유엔 총회에 참석하는 한국 대표 장면을 적극 도와달라”는 내용의 편지를 교황 앞으로 보내기도 했다.

파리로 돌아온 장면은 유엔 총회 의장으로 선출된 오스트레일리아 외무장관인 에버트를 만나려 했지만 실패하였다. 1948년 12월 대통령 바티칸 특사로 임명되어 로마 교황청을 방문하였고, 바티칸의 로마 교황 비오 12세를 알현하고 한국에 대한 정신적 후원을 청하여 승락을 받았다. 교황 비오 12세는 제3차 유엔 총회 당시에 한국 대표단을 지원하라는 지시를 교황청에 내렸는데, 허 교수는 “장면이 유엔총회에 파견된 것은 바티칸의 영향력을 활용하려는 대통령 이승만의 정치적 복선이 작용한 것이었다”고 평가했다. 초기에는 한국은 어디에 있는 나라이냐며 냉담한 반응을 보이던 각국 대표자와 관계자들은 패트릭 번 주교의 소개장을 받고:79 적극적으로 대표단 일행을 도와주었고, 총회 의장 에버트도 만나게 되었다.
실제로 교황 비오 12세는 일본에 체류 중인 전 평양교구장 번(Byrne, J. Patrick) 주교를 이미 1947년에 교황사절로 한국에 파견했다. 교황청의 사절파견은 국제공법과 외교관례상 한국이라는 국가의 존재를 외교적으로 승인한다는 의미가 있었다. 이후 50여개 국 대표를 돌아가며 대한민국 정부를 승인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1948년 12월 7일부터 12월 12일에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제3차 유엔 총회에 한국 수석 대표단으로 참석하였다. 대표단은 장면 이외에도 장기영, 김활란, 조병옥, 정일형, 전규홍, 모윤숙, 김우평, 김준구로 구성되었다. 장면은 유엔 총회에서 신생 대한민국 정부의 승인을 요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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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하는 의장 각하, 회원국 대표 여러분! 본인이 유엔총회 본위원회에 참석하신 회원국 대표제위 앞에서 발언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된 것을 광영으로 생각합니다. ...(중략)... 이 자리에 참석하신 세계자유 애호국가 대표 여러분은 우리의 정당한 주장을 양심상 거부할 수 없으리라는 확신을 갖고 본인의 연설을 이로써 끝내려 합니다. 최후로 본인은 1947년 11월 14일 유엔 총회에서 결의한 바 있는 한국정부가 곧 본인이 대표하는 대한민국 정부 임을 재확인하고 우리 정부를 이 자리에서 공식으로 승인하는 동시에 모든 회원국가들이 또한 개별적으로도 승인하도록 권장하여 주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 12월 7일 샤이요 궁에서 개최된 유엔 제3차 총회 제1(정치)분과위원회에서
한국독립문제에 관하여 대한민국 수석대표 장면이 행한 연설
소련의 반대와 반발 인도 등 중립국의 외면이 있었으나 그는 각국의 대표를 찾아다니며 대한민국 정부가 유일의 합법 정부임을 주장, 정부 승인을 해줄 것을 설득하였다. 제3차 유엔 총회 결과는 찬성 48개국, 반대 6개국, 기권 1개국으로 대한민국의 승인을 얻는 데 성공했다. 유엔의 대한민국 정부 승인은 곧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확보하는 기반이 되었다. 바티칸과 각국의 천주교 지도자들이 그를 도왔고, 유엔 총회에 파견된 자국의 대표자를 설득하기도 하였고 일부의 부정적인 시각에도 대한민국 정부는 유일의 합법정부라는 승인을 얻을 수 있었다.
회의를 마치고 다시 바티칸으로 가서 12월 22일 로마에서 예수회 총장 방문·면담하고 한국에 예수회 대학 설립을 건의하였다. 이 부탁은 뒤에 성사되어 1960년 4월 서강대학교 설립에 바티칸의 지원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로마 방문을 마치고 1948년 12월 말 장면은 미국 뉴욕으로 건너갔다.
12월 27일 미국 방문 중 현지에서 주미 한국대사에 임명되었고, 재외공관 설치작업을 서두르게 된 이승만은 장면으로 하여금 미국에 그대로 머물러 주미 대사관 창설 작업을 착수하도록 지시했다. 12월 29일 미국 맨해튼 대학교에서 명예 법학박사 학위를 수여받았다. 이듬해 1949년 1월 1일 장면은 미국 체류 중 미국 대통령 해리 트루먼으로부터 미국은 한국 정부를 승인한다는 성명을 접하였다.
대한민국이 1948년 12월 12일 유엔 총회에서 투표에 참여한 55개 회원국 중 찬성 48, 반대 6, 기권 1표로 국제사회에서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 정부로 승인을 받는 데 바티칸이 결정적 역할을 한 것으로 드러났다.
미국은 1948년 9월 21일에서 12월 12일까지 열린 UN 총회를 통해 회원국들이 대한민국 정부를 승인하기까지 공식 승인을 미루고 있었을 뿐 아니라 1948년 8월 한국에 부임한 존 무초조차도 대사가 아니라 대표였으며 주한 미국대사로 임명된 것은 1949년 4월의 일이었다. 다만 당시 미 공화당 정치고문으로 UN에 파견돼 있던 존 포스터 덜레스(훗날 미 국무장관)는 주한특사 무초를 파리로 불러들여 한국 승인 외교를 지원토록 함으로써 대한민국 정부 승인을 받는 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것으로 나타났다.
바티칸은 그 이전인 1947년 8월 초대 주한교황사절로 패트릭 번 신부(1949년 4월 17일 가제라 명의 주교 임명)를 임명하고, 그해 10월 19일 그의 입국과 동시에 '한국을 한반도의 합법적 독립국가로 인정한다'고 발표, UN 승인 이전 유일하게 대한민국을 정부로 인정함으로써 대한민국이 국제사회에서 승인을 받는 데 결정적으로 이바지했다.
http://www.cpbc.co.kr/CMS/newspaper/view_body.php?cid=467508&path=201308

1948년 8월 11일 유엔총회 파견 수석대표로 선출된 장면이 한국 대표단을 이끌고 유엔총회 기간인 9월 21일부터 12월 12일까지 유엔회원 58개국 대표들을 찾아다니며 한국 정부 승인의 당위성을 역설했다고 보고했다. 한편 그 배경에 미국의 지원과 장면에 대한 바티칸의 호의가 있었다고 발표했다. 교황 비오 12세는 제3차 유엔 총회 당시에 한국 대표단을 지원하라는 지시를 교황청에 내렸다.
1950년 6월 3일 부인 신병 치료차 자녀 2인을 동반하여 출국, 미국에 건너갔다. 6월 25일 미국에 체류 중인 새벽에 한국 전쟁이 발생하자 대한민국 정부의 긴급훈령을 받아 미국 국무성에 알려 사태의 절박성을 전하였다. 6월 25일 저녁 이승만과 통화 후, 미국의 상·하원을 찾아다니며 한국 파병을 역설하였고, 이후 UN과 국제사회에 북한군의 남침을 알리고 한국 전쟁에 참전해줄 것을 설득하여 미군과 UN군의 한국 파병을 이끌어냈다. 1950년 6월 25일 유엔안전보장이사회에서 연설하였다.
6월 26일 백악관으로 미국 대통령 트루먼을 만나 미군의 한국 파병을 요청하였고, 6월 27일의 미국의 대북한 선전 포고와 UN에 대한민국에 대한 지지를 호소하여 UN군의 한국 전쟁 참전결정을 이끌어냈다.
유엔 승인을 받은 대한민국은 현재 북한 괴뢰군의 불법 공격을 받고, 이에 대항하여 고전 분투하고 있다. 북괴군의 대규모 침공은 우리 대한 민국 정부를 전복시키고, 북한 괴뢰 정권 치하에 몰락시키려는 야망에서임 이 분명하다. 이런 불법 공격은 인도와 민심을 거스르는 죄악일 뿐 아니라, 국제 평화와 안전에 대한 명백한 위협이니 만큼 귀 안보 이사회에서 침략자들로 하여금 일체 공격을 즉각 중지케 하고, 38선 이북으로 철퇴하도록 강력히 조처해 줄 것을 호소한다.
6월 27일에는 UN안전보장이사회에 참석하였고 다음날인 6월 28일 서울은 조선인민군에게 함락당하였으나 장면은 ‘미국의 소리’(Voice of America) 방송을 통해 유엔 결의 사항 등을 본국에 방송하였다. 1950년 6월 말 장면은 병석에 있는 서재필에게 서신을 보내 입원 중인 서재필의 빠른 완쾌를 비는 한편, 당시 전쟁 상황을 전하며 “지금 상황이 좋지 않더라도 반드시 승리 할 것이다”라는 것과 “자유로운 분위기 내에서 제2대 총선거가 진행되었음”을 전하였다. 그러나 서재필은 휴전을 못보고 사망했다. 한국 전쟁 직후 미국의 정치인들 중에는 대한민국의 서울이 3일만에 점령당하여 가망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장면은 미국내 정치인들을 찾아다니며 한국에 파병해줄 것을 설득하였다. 소련과 중국이 안보리에 불참하는 동안 그는 줄곧 UN안보리 이사회에도 참석하여 회의 내용을 청취하였다. 전쟁발발 15일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인 7월 10일, "38선은 의미를 상실했으며 전한국의 해방과 통일은 필수적"이라고 주장하였다.
8월 1일, 안보 이사회의 8월 의장국인 소련 대표 말리크가 이사회에 출석했다. 의장석에 앉은 소련측 대표 말리크는 한국 사태에 대한 안보 이사회의 그동안의 모든 결의가 모두 무효임을 선언하였다. 이에 장면은 “안보 이사회의 상임 이사국인 소련이 불참한 가운데 또 상임 이사국으로서 당연히 참석해야 할 중공 대표가 없는 동안에 통과된 결의안은 하나도 인정할 수 없다” 고 주장했다.
장면은 8월의 유엔 안보리 회의에도 옵서버 자격으로 자리 잡고 앉으려고 대기하고 있었다. 그러나 말리크는 끝내 장면의 착석을 거부했다. 또한 말리크는 “6‧25 동란은 북괴군의 남침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고, 반대로 한국군의 북침”이라며 “미국이 한국군을 배후에서 조종했다”고 주장하였다. 소련측 대표의 이런 역선전을 미리 예상한 장면은 미국측 대표 오스턴과 짜고 한국 전선에서 노획한 소련제 소총 한 정을 증거물로 제시하고 반박하였다. 말리크는 “이번 싸움은 한국 사람끼리의 싸움이지 소련은 전혀 아랑곳이 없다”며 “소련군은 이미 1947년에 완전히 북한에서 철수했고, 이번 동란에 소련서는 총 한 자루 보내 준 일이 없다”고 단언했다. 미국측 대표 오스틴은 장면이 한국 전선에서 가져온 ‘1950년 소련제라는 철인’이 찍힌 소총을 증거물로 제시하였고, 남한의 북침 주장과 소련의 불개입 주장은 논파당하였다.
9월에 열린 UN안보리 이사회에도 참석하였고 영국이 안보 이사회 의장국이었다. 9월 1일, 글랜드윈 접 영국측 대표가 안보 이사회의 사회를 맡자 장면은 착석과 발언권을 달라고 미리 요구했다. 의장은 “당사자국인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장 대사에게 착석을 허한다”고 선언하 여 무난히 착석하였다. 의장으로부터 발언권을 얻은 나는 “그동안 갖은 모욕을 당하면서도 나는 할말을 못하고 참아 왔다”고 말문을 열어 소련을 공박하였다. 소련 대표 말리크는 “규칙 발언!”이라며 그의 발언을 제지하려 들었다. 이어 말리크는 그에게 “도대체 저자가 누군데 무슨 자격으로 저 자리에 감히 앉아서 발언을 하는 것이냐?”며 “저자는 이승만 도당의 괴뢰”라고 마구 욕설을 퍼부었다. 장면은 말리크의 욕설에 대해 취소하라고 항변하였다.
대한민국에는 이승만 도당이라는 것은 없고 나는 헌법에 의해 합법적으로 당선된 대통령의 임명을 받아 대한민국 정부를 대표해 이 자리에 의장의 초청으로 착석했노라.
약 40여 분간 그는 공산권의 남한의 북침 주장과 한국민들끼리의 내란이라는 주장을 반박하는 연설을 했고, 이는 국제사회에 생방송으로 중계되었다.

물론 장면 본인 회고록등에 의해 공적이 과장될수 있지만 UN에서 남한 정부 인정과 유엔 안보리에서 유엔군 파견등 거의 모든 한국의 중요한 문제를 장면 박사가 거의 다 한 것이다. 따라서 건국의 아버지는 초대 대통령 이승만이 아니라 배후에 장면 박사가 되어야 마땅하고, 장면박사가 오히려 외교의 달인에 가깝다고 볼수 있다.
미국은 남한을 승인해주지 않으려고 했지만 장면 박사가 교황청과 협조해 중남미 카톨릭 국가를 움직여 유엔에서 남한을 인정하게 만들었고 남한을 최초로 국가로 인정한 나라는 바타칸으로 알고 있다.
물론 이승만 박사도 말년에 미국에 토사구팽되어 에버레디 계획(Plan Ever ready)으로 제거가 되게 된다. 4. 19 혁명도 배후에 미국의 칼에 피 안뭍히고 차도살인하는 계책이 담겨져 있다.

벤자민 프랭클린이 만든 '뭉치지 않으면 죽는다'라는 문구는 식민주 주민들의 대영제국을 상대로 한 투쟁에서의 통합의 중요성을 설파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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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뭉치지 않으면 죽는다'(Join, or Die)는 미국 건국의 아버지이자 계몽주의 사상가인 벤자민 프랭클린이 만든 유명한 정치 카툰 중 하나로, 1754년 5월 9일 프랭클린이 직접 운영했던 펜실베니아 가제트에 처음 실렸다.
이 카툰은 미국 독립전쟁 중 식민지 주민들의 자유를 향한 상징이 되었다.
이승만 박사의 유명한 성대모사를 하는 사람들을 보면 떨리는 목소리로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습니다. ’란 말일 것이다.
필자가 의문으로 생각한 것은 이승만 박사가 물론 반공은 옳았지만 북한과 타협하지 않아 분단을 고착화한 사람으로써 뭉치면 산다는 말을 할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물론 반공으로 뭉치면 남한이 산다였겠지만 말이다.
또한 과거에는 병력이 집중해서 많은 군사로 각개격파를 하면 승리함은 자명하다. 하지만 현대 전술에서 뭉치면 오히려 폭격기나 화력으로 집중 포화를 당해 오히려 병력은 뭉치지 않고 게릴라전술로 흩어져야만 살게 된다고 본다.
투자도 마찬가지이다. 계란을 한 바구니에 담지 말라는 올인과 몰빵 금지 투자의 신화처럼 분산 투자가 생명 시기이다.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하니 권력도 마찬가지이다. 즉 모든 것은 뭉쳐져 있으면 죽고 흩어져야산다. 물론 기가 풀리지 못하고 뭉쳐져 있으면 한의학적으로 기가 울체, 울결되어 불이 되니 화병이 생기기 쉽다. 또 기가 아주 흩어진 상태를 죽음이라고 보는 경향도 있다.
아무튼 권력은 총구가 아닌 화폐 발권력 미국의 기축통화 달러에서 나온다. 하지만 이 권한이 민간의 탐욕인 월가 금융가 미 연방준비은행에 위임되어 너무 통제가 안되기 때문에 문제이다. 또 권력이 집중화 중앙화 뭉쳐져 있기 때문에 99%가 월가 점령 시위를 해도 꿈쩍도 하지 않는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비트코인 암호화폐가 탄생했다.
결국 자본주의에서는 돈이 사람을 움직이며 미국이 세계를 장악하는 것도 진짜 골드가 아닌 기축통화 발행권력이기 때문에 이 독재 독점을 무너뜨리지 않고 정의가 바로설수 없는 것이다.
2009년 사토시 나카모토가 비트코인의 제네시스블록 (처음 블록) 을 만들었을때 다음의 메시지를 삽입했다.
"The Times 03/Jan/2009 Chancellor on brink of second bailout for banks"
이는 2009년 1월 3일 타임지에 소개된 챈슬러 은행의 2번째 구제 금융 기사를 제네시스라고 불리는 첫 블록에 기록을 남겼다.
세계 통화는 미국 페트로 달러로 대동단결해 뭉치면 안되고, 오히려 위엔화, 엔화, 한국 원화, 유로화등 다양한 가치가 존재하고 석유도 자유롭게 거래하게 해야 한다. 또한 암호화폐를 거래하고 만드는 사람은 정부에 순종하는 개가 될 것이 아니라 늑대의 야성으로 똘똘 뭉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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