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력의 한계

in #kr6 years ago (edited)

#1
배트맨에게 조커가 어려운 상대였던 이유는 그가 다른 빌런에 비해 강하거나 똑똑했기 때문이 아니라 원하는 것이 예측불가였기 때문이다. 돈으로 귀결되는 그 어떠한 것들, 돈을 수단으로 해서 취할 수 있는 모종의 것들, 또는 돈 그 자체 모두 아니었다. (바로 앞 문장이 자연스럽게 읽혔다면 '대부분의 사람이 돈에 관련한 것(결국 돈)을 원한다'는 사실을 수긍한 것이다.) 또한, '모든 인간은 죽음을 두려워한다'는 진리에 가까운 명제조차 조커에게는 성립하지 않는다. 상대가 원하는 것과 두려워하는 것을 알면 그 누구라도 상대할 수 있는 배트맨이지만 조커에게는 이 두 가지가 명확하지 않다. 아니 남과 다르다. 조커가 무엇을 원했는지는 스포가 될 수 있으니 지금이라도 다크나이트를 처음 보거나 다시 보기를 추천한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기발하고 화려한 그 어떤 극적 장치와 트릭, 복선, 반전을 준비해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악당이 돈을 원한다는 점이다. 백지수표든, 추적이 불가능한 계좌로의 송금이든, 비트코인이든, 숙명적 은원관계나 병적인 집착 증세 정도를 제외하면 악당이 악행을 하는 이유는 대개 돈이다. 악당의 지향점이 돌고 돌아 돈이라는 사실은 뻔하다고 욕을 먹을 가능성만큼이나 개연성도 높다고 인정되기 때문에 이 부분에서 작가는 굳이 무리를 할 필요가 없다. (물론 다 그렇지는 않다. 앞으로 나를 추적하지 말고 가족과의 평온을 보장해 달라는 악당의 바람도 어디에선가 본 듯 하다.)

#2

잘 지내(냐)

는 인사에 어떤 궁금증이 담겼는지 알고 있다. 연락이 일정 기간 단절됐던 관계에서 가장 흔하게 쓰이는 첫 대사이고 구체적인 대답을 원하지 않는 관용어임도 알지만 내가 받는 저 것은 조금 다르다. 질문자에 따라서 대답에 어느 단계의 진실을 섞을 것인지 고민한다. 상당수는 내가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궁금해 한다. '나는 나를 아는 사람들에게 꽤나 궁금증을 자아내는 존재이기 때문에 내가 없는 자리에서 나를 아는 이들이 여럿 모이면 내 근황에 대한 이야기가 자주 나온다' 고 한다. 또한, 내 친구A가 교정때문에 정기적으로 방문하는 치과에서 우리와 초등학교 동창인 간호사 한 명은 "가든이와 아직 연락하지?"라고 A에게 묻고, 소방서에 근무하는 친구 B에게 우리와 같은 중학교 선배 하나는 "너 예전에 가든이랑 친하지 않았냐? 걔 뭐하고 지내냐" 이렇게 묻기도 한다. 보통 질문을 받는 이들은 실제로 나랑 친한 아이들이거나 질문자의 시선에서 그나마 나랑 친해보이는 아이들인데 대답은 같다.

몰라

전자는 내가 백수임을 숨겨주려는 의도인 듯 하고 후자는 정말로 모른다. 이런 상황에서 나에게 '잘 지내냐'는 연락이 오는 이들은 그래도 나랑 한 시기를 함께 하여 나랑 친하다고 스스로 여길 수 있는, 물론 나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조차도 내가 뭘 하는지 궁금해 한다. 이는 내가 지속적으로 대답을 회피해서가 아니다. 예를 들어 현재의 경우, 주로 하는 일이 어딘가에 글을 쓰는 일이라고 하면 자신들의 임의대로 이 것을 핵심정보이거나 팩트라고 보지 않고 다른 정답을 들으려 한다. 그래서 "어, 그냥 아무것도 안 해"라고 해야 수긍안도한다.

나는 그들의 수긍안도을 꽤나 즐기는 편인데 스타트업 관련 활동을 할 때도 같은 수법을 사용했다. 런칭할지 안할지도 모르는 서비스, 얼마 되지 않는 투자금, 그 일을 이루기에 부족한 자기확신 등을 종합 했을 때 굳이 창업 관련 개인적 업적(?)을 설명하는 일은 의미 없을 뿐 아니라 청자에 따라서는 허세라고 느낄 소지가 다분했기 때문에 "별 거 안 하고 헤매고 있다고"고 했다. 내게 사회적 명칭이 없다는 사실에 안심 하면서도 한편으로 의아해 하는 부분은 '백수'라는 선언 이후에 자기반성(또는 자기비하)과 향후 계획이 따라오지 않는다는 점이다. 응당, 지금까지의 생활을 자조하는 말과 함께 무언가를 시도해 볼 것이란 얘기가 나와야 하는데 나오지 않으니 답답해 한다. 하지만 나는 그런 설명까지 남의 암묵적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서 털어 놓는 사람이 아니다. 그리고 그들도 실제로 묻지 않는다. 나를 믿는 이들은 믿기 때문에, 나를 믿지 않는 이들은 믿지 않기 때문에

#3
결국 그들이 궁금해 하는 것은 내가 무슨 일로 '돈을 벌고 있는지'이다. 나는 돈을 벌고 있지 않다. 내가 살고 있는 집세, 내 핸드폰비, 내가 사고 싶은 옷과 신발과 가방에 대한 구매비용, 파마든 염색이든 하고 싶다면 할 수 있는 돈, 놀러가고 싶다면 놀러가는데 필요한 돈까지 전부 부모님이 주신다. 나는 이러한 생활이 익숙하다. '그러면 안 된다'고들 하지만 뭘 그러면 안된다는 것인가? 빌붙어 살면 안 된다는 것인가, 사회적 역할이 없어서는 안 된다는 것인가, 너만 편하게 살면 안된다는 것인가, 그렇게 살다가는 미래가 없어서 안 된다는 것인가?

나는 언제나 돈이 없어서(또는 백수라서) 괴로워하고 있을 것이라는 친구들의 기대나 목표에 비해 형편없는 대학에 갔으니 그저 그런 직업을 가지고 평범하게 지내고 있을 것이라는 지인들의 바람이나 20대를 그렇게 허비했으니 지금쯤 쪼들리고 있을 거라는 누군가의 확신을 배신한다. 또는 모두의 기대와 바람과 확신에 완벽하게 보답한다. 악당이 돈을 원한다는 것쯤은 당연히 알 수 있듯이, 돈을 벌지 않는 이가 불행한 것쯤은 부연 설명이 필요없어 보인다. 명확한 상상력의 한계증상이다.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행복하다'는 말을 하고 싶지는 않고 수입이 없는데 그럭저럭 지내는 이 생활에 만족하고 있지도 않고 내가 비상하기를 바라지 않는 친구들을 미워하지 않는다. 굳이 원하는 것이 있다면 꾸준히 글을 쓸 수 있으면 좋겠고 곧 방송을 시작할 수 있으면 좋겠다. 나는

CPU i7-7700K
GPU NVIDIA GeForce GTX 1080ti
RAM 32GB

이 사양의 컴퓨터를 올 해 2월(인 줄 알았는데 샤워하면서 생각해보니 작년 12월)에 샀는데 이걸로 배그는 한판도 안 하고 글만 썼다.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내가 이 컴퓨터로 글만 쓸 것이라고. 인간의 상상력은 물질이나 돈과 결부되는 순간 너무나 하잖아진다.

자존심이 그리스 전체의 패배보다도 중요한, 아니 그것과 비교조차 불가한 아킬레우스, 동생이 한 눈에 반한 유부녀를 배에 숨겨 도망쳐 나오고 그것 때문에 조국이 망하게 생겼는데도 동생의 불법보쌈행위를 다시 보쌈하여 감싸주고 반신인 아킬레우스와 싸우다 죽는 헥토르, 아킬레우스가 입던 갑옷 가지려고 온 힘을 다해 (말로)싸우던 아이아스와 오디세우스. 위대한 서사시 일리아스 정도 가면 비현실적인 상상이 그 안에서 현실이 된다. 비현실이 실현되기를 꿈꾸지는 않지만 돈을 빼고 생각할 수 없어 빈약해져가는 누군가의 상상력을 안타까워는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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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출에 감사드립니다! 즐거운 스티밋하세요!

네, 언제나 감사합니다!!

저는 도서관 컴퓨터로 열심히 스팀잇에 글을 쓰고 있습니다.ㅋㅋ

어디서든, 무엇으로든 글을 쓰게 만든다는 것이 스팀잇의 장점인 듯 합니다. 도서관 컴퓨터로 글을 쓰는 모습을 상상해보니..부럽습니다. 저도 대학생 시절에 스팀잇을 알았다면 분명히 그렇게 했을 겁니다! 지금 도서관을 가기에는..외모가 너무 아재라서..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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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 한 잔 할래요?

정재영.PNG

어디로 가면 될까요??

ㅋㅋㅋㅋㅋ귀여워!!!!!
(나 잡아봐라~~ㅋㅋㅋ)
--->뭐라고 댓글 달지 엄청 기대하고 댓글 썼음.ㅋㅋㅋㅋㅋ

저 달리기 엄청 빠른데요, 발견 되시는 순간부터 저 표정으로 계속 따라갑니다 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상상해버림)
ㅋㅋㅋㅋㅋㅋ

다른 사람의 인생에 대한 상상이 한계가 있는 건 당연할 듯합니다.
각자의 인생은 그 사람 수 만큼이나 다양하고, 그가 자신의 인생에서 느끼는 상황도 또 그 만큼 다양한데, 우리가 상상하는 결론은 행복하다, 불행하다. 즐겁다, 힘들다, 성공했다, 실패했다. 부자이다, 가난하다 정도로 몇가지 되지 않기 때문이겠지요.

내가 내 인생은 상상하는데 있어서 한계가 없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내 인생을 너무 협소한 결론으로 상상하다 보면 얼마든지 다양하게 펼쳐질 수 있는 자신의 인생을 한두 군데에 얽매일 수 있으니까요.
가령 미래의 성공한 삶에 초점을 맞추면 현실이 뻔해지지 않을까요?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하고 싶은 것을 최대한 도전해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설령 그것이 백수로 아무것도 안하는 것일지라도요.^^

따뜻한 댓글에..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던 제 마음까지 따스해집니다. 구구절절 맞는 말씀을 해주셨군요. 응원(이라고 받아들여도 되겠지요) 감사합니다! 내세울 것은 없고 대단치 않지만 지금 하고 있는 것들에 조금 더 최선을 다 해 보려고 합니다. 스팀잇에서 알게 된 분들의 이해와 격려에 신이 납니다! 좋은 하루 보내셔요^^

좋으네요, 저도 한계 없이 제 인생을 상상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 하는 데까지 노력해봐야지요 ㅎ

며칠전에 대기업 물류회사에서 담당자가 수백억원 대의 허위 매입세금계산서를 주고받으며 겨우 수천만원을 착복했다는 기사를 보았죠. 참으로 대단한 상상력과 실행력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

그런 일이 있었군요.. 요즘도 장에 들르시곤 하시나요? 요즘 할머니와 장에 가는 일을 통 못 했습니다. 자꾸 햇볕 아래 걷는 일을 탈진 할까봐 두려워 하셔서요.. 좋은 사진들.. 늘 잘 보고 있습니다. 오늘도 들러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제가 Walking General Hospital 이라서, ... 선거전에 춘천 샘밭장을 다녀왔습니다. 막걸리라도 한잔 걸치려고 장에 나와서 어적거리는 해맑은 영혼들이 수북한 ^^; 7천원짜리 수박을 2개 살까, 15천원짜리 수박을 하나 살까 고민하다가 7천원짜리 수박을 하나 사가지고 왔다가 딸들에게 구박을 받았던 .... 어제는 이제는 걷지 못하시는 장모님이 사위 건강을 걱정하고 애쓰셔서 ... 참으로 민구했습니다. ...

매일 폰으로 일기를 적지만,
역시
글은 쓸수록 더 쓰고싶죠.
고사양 컴퓨터라고 꼭 게임해야할 이유도 없죠.

우린 동갑내기 래빗띠의 절친이기 때문에 가즈아가 아니라도 반말을 써도 된다규! (강요 하진 않겠엉) '-^

ㅋㅋㅋㅋㅋ윙크한거야?지금?ㅋㅋㅋㅋㅋㅋㅈ

웅! ㅋㅋㅋㅋㅋㅋㅋ 나 저 이모티콘 좋아함 ㅋㅋㅋㅋ!

웅이라니ㅋㅋㅋㅋㅋ
ㅋㅋㅋㅋ지금 애교부린거야?ㅋㅋㅋㅋㅋㅋ

내가 여사친이 많은데.. 걔들이랑 카톡할 때 원래 그런 말투를 써서 그래.. 좀 자제해야겠다.. 크흠 ㅋㅋㅋㅋㅋㅋ

좋은데뭘ㅋㄱㄱㅋㅋㄱ ㅋㄱㅋㅋ 아줌마도 여자라니 고맙넼

이렇게 글을 잘 쓰는데 뭘!^^
가든님, 어떤 방식으로 삶을 살든 응원할게요.
건강하게만 자라주세요.ㅎ

앗..마담님의 치명적인 댓글에 제 마음이 녹습니다. 글을 썩 잘 쓰지는 않지만.. 주로 제 이야기를 하다보니 진솔하게 보이고 싶은 마음은 있습니다. 지금 건강하지만..왠지 더 건강해지고 싶게 만드는 댓글입니다. 운동하고 지금 들어왔는데 다시 나가야겠습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

가든님은 사랑입니당

ps.제가 20대에 가든님같았다면? 하는 생각이드네요. 제 친구들은 저를보고 非凡하다는 의미가 아니고 괴상한 외계인이라고 부르곤 했지요. 자신의 삶에 自足하는 삶도 힘들지만 더욱 힘든것은 의미를 찾는거겠지요. 저는 20대에 그거 둘다 못했어요. 지금은? 그냥 이해하는 정도인거 같습니다. 받아들이는거는 나중문제...

시바

사바세계(娑婆世界)에 조예가 깊으신 피터님, 저는 피터님과 많은 부분에서 동질감을 느낍니다. 그래서 격려해주심이 다른 응원이 천 배 정도 힘이 됩니다. 너무나 감사합니다 '-^

상상력의 한계가 어디 돈과 관계란 일 뿐이겠어요. 자기 한계에 갇혀서 자기애로만 살아가는 사람들의 상상력이란 다 그렇죠뭐. 그중 한사람인 저의 상상력 한 번 맛보실래요?’
당신은 혹시... 로얄 패밀리?

상상력의 한계가 어디 돈과 관계된 일 뿐이겠어요. 자기 한계에 갇혀서 자기애로만 살아가는 사람들의 상상력이란 다 그렇죠뭐. 우리엄미도 그런 사람. 고생하며 타국에서 애키우고 살림하는데 집에 갈때마다 하는 말. 니 아직 집에서 노나?! 본인의 입장에서 경제적인 활동을 하지 않는 사람은 다~ 노는 사람. 멀쩡한 직장 때려치고 그런데 갔다고 아직도... 10년째 컴플레인중이요 호

누님은 매순간 가장 좋은 선택을 하신 겁니다. 시간이 흐르면 모두들 수긍할 날이 올 거라고 생각합니다. 스스로에게 엄격하고 타인에게 관대했으며 뜨거운 가슴과 냉철한 이성으로 살아 오셨으니까요, 누님의 글들을 읽으며 제가 그렇게 느꼈습니다. 언제나 응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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