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style Essay 016 | 흩어졌다 모이는 느슨한 군집

in #kr5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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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분의 1이 된다는 것


우리는 좋든 싫든 태어난 이상 사회의 구성원이 되는 것을 피할 수 없다. 학교에서도 회사에서도 n분의 1이 되어 각자의 몫을 담당한다. 하지만, 모두가 같은 분량을 차지하는 것은 아니다. 드라마에서도 주연과 조연의 분량이 다르듯 각자에게 주어진 n의 크기는 태어난 배경과 성장한 환경, 개인의 능력 같은 복잡한 것들이 뒤얽혀 다른 부피를 만들어낸다.

학교를 졸업하고 할 수 있는 선택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모두가 크고 작은 집단에 소속되어 일원이 되거나, 지극히 개별적인 독립체가 되는 것 말고는. 특히, 집단에 소속되지 않기 위해서는 용기와 결단력, 빛이 나는 수저가 필요했다. 일률적인 프레임에서 벗어나기는 매우 어려우며 독립체가 되어 힘을 발휘하려면 집단의 힘을 빌리거나, 그들에게 선택되는 로또 같은 '운'을 기대해야 했다. 모험을 하기보다는 거대한 집단에 들어가 조금이나마 큰 n분의 1을 가지는 것이 미래를 위한 안전한 미덕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미세한 균열


변하지 않을 것 같았던 규칙들은 오래도록 믿어왔던 가치가 무너지면서 갈라지기 시작했다. 하루의 시간에 틈을 주지 말고 열정을 다해 살아가라고 가르치던 유명인들의 명언은 자신들에게 충성하게 만들기 위한 진정성을 가장한 거짓말일지도 모른다는 의문이 들었다. 그저 앞만 보고 달려오다 멈추고 보니 망가질 대로 망가진 일상을 발견하게 되었고, 무자비하게 덮어둔 더러운 비밀들이 하나둘씩 드러나기 시작했다.

sns 중심의 시대는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대기업과 프랜차이즈가 장악한 시장에 작은 틈을 만들어냈다.

기존의 광고 방식이 통하지 않게 되었으며, 누군가의 뒷받침 없이도 자신을 알리는 기회가 만들어졌다. 나약하지만 개성 있는 독립체들은 서핑하듯 기회의 물결을 타고 세상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시각적인 것이 중심이 된 세상에서 감각으로 승부하는 사람들의 영역이 차츰 넓어지게 되었다.

이와 같은 흐름으로 삶에 있어 다른 가치를 선택하는 사람이 늘어가면서 판도는 바뀌기 시작했다. 어렵게 취직해서 들어간 대기업을 나와 1인 기업의 스타트업을 차리거나, 프리랜서 작가나 디자이너가 되고, 작은 서점이나 카페를 여는 사람들이 늘어가고 있다. 처음엔 그들을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선택하는 번외로 바라보는 시선이 강했지만, 그들의 숫자가 늘어가면서 하나의 사회적인 현상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공유 사무실에서 일하면서 새로운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여러 개의 직업을 가지는 식으로 기존의 경계를 흐리면서 정의할 수 없는 삶의 방식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흩어졌다 모이고, 또다시 흩어지기


처음엔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작은 빵집에 줄이 늘어서고 쇼핑몰의 제품이 불티나게 팔리기 시작하니, 기업들은 젠트리피케이션의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며 그들의 영역을 관음 했다. 그들의 방식과 요령을 빼내기 위해 노력했지만, 이미 덩치가 커져버렸기에 그만큼 움직임도 둔하다. 그래서 직접 나서는 대신 그들을 이용하는 협업의 태도를 취하기도 한다. 그것은 기회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독이 든 사과가 되기도 한다.

여전히 개별적인 독립체들은 불완전하고 불안하다. 하지만, 함께 불안한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그들은 같이 커나가는 상생의 방식으로 이렇게 저렇게 모여가면서 새로운 일들을 벌리기도 한다. 책을 읽지 않는 시대에 독립서점과 독립 서적들은 점점 많아지더니 어느새 하나의 작은 시장이 되었다. 텀블벅은 새로운 시도를 하는 사람들의 모험이 펀딩 되는 플랫폼이 되어가고 있고, 유투버가 연예인을 대신해 tv 프로그램의 화면을 채우기도 한다.

모두가 각자의 방식으로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지만, 뜻이 맞으면 언제든 유연하게 모일 수도 있다. 학연이나 지연 같은 과거의 인맥이 아닌, 같은 방향으로 흘러가는 사람들이 서로를 알아보고 모이는 느슨한 군집의 형태가 되는 것이다. 강한 소속감으로 프레임을 규정하는 것보다 훨씬 더 탄력 있는 '느슨함'이라는 존재는 함께하는 방식을 배우고 스스로 깨달을 수 있게 해 주어 우리를 더 단단하게 만들어 준다.


각자가 더 잘 서서 걸어가기 위해 자유롭게 흩어졌다 모이는 느슨한 군집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P의 라이프스타일 에세이


001 | 현실감각과 관계들
002 | 약속의 굴레
003 | 무색무취의 아이러니
004 | 기록의 양면성
005 | 나를 알아가는 시간
006 | 변하지 않고 변화할 것
007 | 감흥의 기원
008 | 모두의 효율
009 | 결론 없음에 대하여
010 | 반항심으로 피어나는 취향
011 | 경험의 연결고리
012 | 만연한 우울감
013 |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린 이유
014 | 무게 잡기의 종말
015 | 채식 부정기의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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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 글 잘 읽고 갑니다.^^ 이런 글은 리스팀 해야지요~

감사해요. ㅎㅎ :)

SNS 시대에도 여전히 강력한 소수와 집단이 소셜미디어를 잘 활용하곤 하지만, 불안한 개인들이 각자의 개성을 드러내며 미세한 균열을 만드는 모습들이 인상적이에요. 저는 그런 미세한 균열을 내는 분들에게 조금이나마 힘을 보태고 싶은데, 지금 당장은 이 글을 리스팀하는 것이 제가 할 수 있는 일인 것 같아요.

감사합니다. 더 많은 매력적인 소수들의 재미있는 시도들을 만나보고 싶어요.:)

요새 갑갑했는데 P님의 글을 보니 제가 모르던 희망은 늘 옆에 존재했다는 생각이 드네요.
n분의 1이 되지 못해 괴로웠던 미련은 잊고 불안함을 인정하고 유연해지는 방법을 찾아나가야겠죠? 느슨함의 시대 완전 환영입니다.

네네, 우리 모두 느슨하게 흩어졌다 모입시다! :)

p님 잘 읽고갑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지젤님 감사해요. 새해복많이받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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