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style Essay 015 | 채식 부정기의 나

in #kr5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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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식주의를 트렌드가 아닌 진지하게 나의 영역으로 바라본 적이 있었던가. 유명 연예인의 채식주의자 선언도 그 사람 참 힘들겠다 싶었고, 멋있어 보였지만 그뿐이었다. 비건 레스토랑이 늘어간다는 소식도, 발리의 어느 비건 카페를 찾아갔을 때도 목적은 환경이나 동물에 대한 선순환적인 책임감이 아닌 지극히 이기적으로 나에게 돌아오는 힙한 것들의 향유였다. 미안하지만 고기는 너무나 맛있었고, 육식을 하지 않는 삶에 대해서 고려해본 적은 없었다. 공장식 축산 과정이 동물들을 얼마나 힘들게 하고 그것이 인간에게 다시 돌아온다는 것도 어느 정도 인지하고 있긴 했지만, 입에 배어버린 고기 맛을 떨쳐버릴 만큼 걱정하지는 않았었다.

수많은 주제를 다룬 책 중에서 채식주의에 관련된 책을 읽어본 적은 없었다. 주요 관심사가 아니었고 어차피 채식주의자가 될 마음의 여지가 없으니, 따분한 내용들이 열거되어있을 것이 분명해 보였다. <아무튼, 비건>이라는 책도 김한민 작가의 책이 아니었다면, 구매했을 리가 없다.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는 작가님의 책은 이번이 세 번째인데, 살아가면서 우리가 쉽게 놓쳐버린 지점들에 대해 담담하지만 너무도 명료하게 써 내려가는 이야기에 완전히 팬이 되어버린 참이었다.






아무튼, 비건


이 책은 나와 구별되는 남에 대한 이야기로부터 출발한다. 나, 우리, 그리고 우리가 아닌 남. 그 남에게는 그 어떤 자비도 공감도 베풀지 않으면서 이해관계의 울타리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삶이다. 집 안에서 키우는 애완견은 '우리'가 되지만, 식탁 위에 올라오는 가축은 그저 육식일 뿐인 '남'이 되는 이야기. 우리가 당연하게 느끼면서 누려왔던 많은 것들에 당연한 것은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땐, 이미 망가질 대로 망가진 자연과 부메랑처럼 돌아온 절망을 마주해야 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엄습했다.

어렵지 않게 풀어낸 이야기들은 자신이 어떻게 채식주의자가 되었는지 그 시간의 흐름을 같이 하는 듯했다. 진실을 알게 된 후 결심하고 실전에 돌입하는 과정들은 마치 채식주의자가 되는 지도에 친절한 길잡이가 되어주고 있는 듯했다. 그리고 누군가 채식주의에 대해 가질 수 있는 무작위적인 편견과 의문들에 대해 조목조목 답을 해주고 있다.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은 후 나는 유투브에서 몇 편의 영상을 찾아보았다. 점심식사 시간이 다 되었을 때쯤이라서 밥을 먼저 먹고 영상을 볼까 싶은 간사한 생각도 들었다. 나는 나에게 충격요법을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을까. 아니면 보고 난 후 죄책감이 두려웠던 것일까.






채식 부정기


그 어떤 충격에도 채식을 결심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한 번 다짐하게 되면 스스로의 약속을 지켜나가는 것이 중요하고, 일상생활에 많은 제약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나의 이기적인 욕심과 동물들을 생각하는 마음 사이에서 끊임없이 갈등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정말 고기가 먹고 싶지 않았지만, 스스로 얼마나 갈까 싶기도 했다. 매년 1월에 사람들이 새로운 다짐을 하는 것에서 착안해 해외에서는 Veganuary(Vegan+January) 활동을 펼치기도 한다던데, 나도 우선 되는 만큼은 해볼까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채식 부정기'는 채식주의를 하고 싶지만 인정하지 않는 나의 갈등기를 대변해주는 말인 것 같다. 원래 '입덕 부정기'라는 신조어에서 생각해 본 말인데, 주로 연예인이나 애니메이션과 같은 덕질 대상에 비유해서 쓰는 말이다. 입덕 초기에 느끼는 좋아하지만 아닐 거라고 스스로를 부정해보는 감정. 빠지게 될까 봐 두려워 스스로를 안심시키는 행위라고 해야 할까. 이러한 감정이 결은 다르지만 무언가를 결심하는 데에도 비슷하게 적용될 수 있는 것 같다.

영원히 육식을 참을 수 있을까에 대한 자신 없음과 누군가에게 말했을 때 주변의 따가운 반응들, 그리고 그것을 지키지 않았을 때 돌아올 비웃음들까지 상상하게 되면, 벌써부터 어깨가 무거워지고 피곤해져서 엄두도 못 내게 된다. 하지만, 완벽한 소수의 채식주의자가 되기보다는 다수의 채식주의적인 식문화가 훨씬 더 효과적이라는 점에서 좀 더 즐기면서 편안하게 채식을 즐기는 사람이 되고픈 욕망이 마음 한 구석에 꿈틀거리고 있다. 놀이가 되고 매력적인 문화가 될 수 있다면, 못 즐길 이유가 없다.






무겁지 않은 놀이


우선 나는 소극적이고 치사한 방식으로 식생활을 완벽한 채식주의가 아닌, 채식주의적인 방향으로 바꿔볼 생각을 하고 있다. 이미 냉장고에 있는 고기는 먹고, 추가 구매는 하지 않기로 했다. 외식을 할 경우엔 나의 의지로 고기를 먹는 일을 만들지 않고, 여러 가지 요리를 파는 식당에 갈 경우엔 최대한 채식 메뉴를 선택할 생각이다. 건강을 위해서라도 가공육은 완전히 끊을 생각이며, 우유는 이미 끊었다. 하지만, 모든 빵과 케이크에도 우유가 재료로 사용되니, 간접적으로는 어느 정도 우유 섭취를 하고 있는 셈이다.

채식주의라고 말하기도 민망할 정도의 느슨한 기준이지만, 가족들에게 적용해보면 그 조차 쉽지 않은 문제다. 특히나, 강요할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되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가족들과는 더 맛있는 채식 레스토랑을 찾아가고, 제철 채소를 이것저것 사서 함께 먹어보는 정도를 시도해볼 생각이다. 좀 더 채식 위주의 식생활을 나도 가족들도 천천히 함께 즐기면서 조금씩 방향을 선회해볼 생각이다.

리사이클과 관련된 브랜드에 좀 더 관심을 갖고 비건 페스티벌의 행보를 지켜보면서 다른 책도 읽어보는 방식으로 나의 관심사를 옮기고 이 주제에 흥미를 가져보면 어떨까. 일상을 넘어서 문화가 될 수 있다면, 더 많은 사람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라이프스타일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채식을 부정하지 않는 채식 부정기의 과정을 즐겨보고 싶다.

채식에 입덕하는 그날까지.









P의 라이프스타일 에세이


Lifestyle Essay 001 | 현실감각과 관계들
Lifestyle Essay 002 | 약속의 굴레
Lifestyle Essay 003 | 무색무취의 아이러니
Lifestyle Essay 004 | 기록의 양면성
Lifestyle Essay 005 | 나를 알아가는 시간
Lifestyle Essay 006 | 변하지 않고 변화할 것
Lifestyle Essay 007 | 감흥의 기원
Lifestyle Essay 008 | 모두의 효율
Lifestyle Essay 009 | 결론 없음에 대하여
Lifestyle Essay 010 | 반항심으로 피어나는 취향
Lifestyle Essay 011 | 경험의 연결고리
Lifestyle Essay 012 | 만연한 우울감
Lifestyle Essay 013 |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린 이유
Lifestyle Essay 014 | 무게 잡기의 종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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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슨 스프링필드라는 게임을 하고 있는데 이런 대사가 있어요. "신이 전지전능하다면 왜 야채에서 고기 맛이 나지 않는 것인가!" ....

채소에서 고기맛이 나면 너무 느끼하지 않을까요.ㅋㅋ전 당근이나 무의 흙맛을 좋아합니다.

저도 한 때 채식에 관심이 있었는데, 알러지가 생겨서 강제로(?)하게 될 줄은 몰랐어요. 처음엔 소고기 돼지고기만 못먹다가 어느새 양고기도 안됐고, 한창 컨디션 안 좋을 땐 가금류나 우유도 냄새가 역겨워서 못먹겠더라고요.

윤리적으로는 채식에 찬성하지만, 저는 채식이 맞는 반면, 몸이 찬 분들에겐 차가운 샐러드 보다는 데친 채소가 낫고, 오히려 고기가 필요하신 분들도 있는듯 해요. 채식이 자신의 몸에 맞는지가 제일 중요한 것 같아요.

여튼 새로운 도전 화이팅입니다!

고기 알러지가 있으시군요. 사실 전 우유말고는 먹고나서 크게 불편한 음식은 없어요. 저도 몸에 더 좋은 방향으로 채식 위주의 식습관을 가지려고해요. 그런데, 제가 집에서 아무리 고기를 끊어도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약속을 잡고 외식을 하다보면, 고기를 완벽히 피하는 건 거의 불가능하더라고요. 천천히 방향을 틀어보려고요. :)

저는 야채도 엄청 좋아하지만 고기도 엄청좋아해서 전 불가능 할 것 같아요.~~~
채식부정기가 성공하기를 바랄게요^^

저도 고기의 맛은 그 누구보다 좋아합니다. 완벽하게 끊는다기 보다는 식습관을 바꾸고 방향을 틀어보려는 정도에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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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겐 참 어려운, 그 길을 가시는군요. 강박보단 즐거움으로 자연스럽게 입덕하시는 그 날이 오길 응원합니다 ㅎ

ㅎㅎ응원감사해요. 어차피 억지로 참으면 몇 달 못가게 될거라고 생각해서 채식 위주의 식단을 즐기면서 천천히 시도하고 있어요. :)

미안하지만 고기는 너무나 맛있었고,

제 말이요.. -_- 그래도 자주 먹지는 않으니까.. 라고 변명해 봅니다.

ㅋㅋ 오랫동안 익숙하게 먹었던 만큼 한번에 바꾸긴 쉽지 않은 것 같아요 ㅎㅎ 저도 빈도수를 현저히 줄이는 방법을 택하고 있습니당 ㅎㅎ

채식이 체질적으로 맞는 분이 있는 거 같더라고요. 아는 분도 몸에 하도 병치레가 많아 식단을 채식으로 바꿨는데 몸이 많이 좋아졌다고. :)

네 저도 소화기능이 좋은 편이 아니라 특히 가을, 겨울에는 자주 체하는 편인데, 그래서 저한테도 채식은 어느 정도 도움이 되는 것 같아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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