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style Essay 011 | 경험의 연결고리

in #kr5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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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남동 작은 책방 '서점 리스본'의 오픈 시간을 기다리며 옆 카페 '티크닉'에서 말차라떼 한 잔을 마셨다. 언젠가부터 새로운 서점을 방문하는 일은 내게 그 어떤 핫플레이스보다 설레는 일과가 되었다. 라디오 작가였던 분이 주인장이 되어 운영한다는 이 책방은 독서모임이나 북토크, 블라인드 북 등 무언가 복작복작 이야기가 가득한 것 같은 느낌을 주어 내게 기대감을 심어주었다. 찬찬히 신중하게 책을 보고 고르려는 마음을 먹었으나, 책방을 들어서는 순간 한눈에 반해 집어 든 책 덕분에 다른 책들은 다음 기회로 미뤄두게 되었다.

따뜻한 그림체가 호기심을 불러일으킨 '내 사랑 모드'는 캐나다의 화가 '모드 루이스'에 대한 글과 그림, 사진이 담긴 책이었다. 평생을 오두막 집에 살며 그림을 그렸다는 이야기와 그녀가 영화 '내 사랑'의 주인공이라는 소개에 이끌려 주저 없이 이 책을 골랐다. 어쩐지 책 한 권 그 이상의 이야기가 담겨있을 것 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영화와 책을 모두 보고 이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림쟁이 '모드 루이스'


캔버스에 그린 그림이 단 한 점도 없다는 모드 루이스는 그림에 대한 교육을 받지 않았고, 제대로 된 도구도 갖추지 않은 채 평생 동안 다 쓰러져가는 오두막 집에서 그림만 그렸다. 그녀가 특별히 민속화를 그린 것은 아니지만, 여러 가지 상황이나 특성상 넓은 의미에서는 '캐나다에서 가장 사랑받는 민속 화가'로 책에서 그녀를 설명하고 있었다. 어쩐지 '화가'라는 말보다는 그림쟁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리는 수식어 같다.

그녀가 본격적으로 그림쟁이로 살아가게 된 건 남편을 만나 결혼하게 되면서부터다. 굽은 어깨와 어설픈 걸음걸이, 불편한 손을 가진 모드 루이스는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유산을 모두 가로챈 오빠로 인해 친척집에 맡겨지게 되는데, 그 무렵 훗날 그녀의 남편이 된 에버릿은 마을 가게에 '함께 살거나 집안일을 해 줄' 여성을 구한다는 광고를 낸다. 그녀는 그 광고를 보고 그의 집에 찾아가는데, 가정부가 된 것인지 여자가 된 것인지 모호하게 그 집에서의 삶이 시작된다. 전기도 수도도 제대로 설치된 것이라고는 없는 다락방 하나뿐인 초라한 집이었고, 남편 에버릿은 평생 가난하게 살며 주변 농가에서 일손을 돕거나 생선을 팔아 생계를 이어갔다. 고생하며 거칠고 고집스럽게 살아온 에버릿의 투박한 성격은 영화에서 매우 실감 나게 표현되었다. 욕심 없이 붓 하나만 주어지면 행복하게 어디에든 그림을 그렸던 모드 루이스와는 정반대의 성향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녀는 주변에 있는 재료로 손에 잡히는 대로 그림을 그렸다. 에버릿이 구해다 준 선박용 페인트를 사용하기도 했고, 집 안의 계단과 창문, 벽지에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그림 속에 표현되는 것들은 어린 시절의 풍경이나, 그녀가 살았던 마을의 풍경이 대부분이었다. 꽃과 나무, 소와 고양이, 나비 같은 것들이 주요 소재로 등장했고, 눈 쌓인 겨울에도 꽃이 피고 푸르른 산을 묘사했다. 기억하는 모든 것들과 바라보는 모든 것들을 평생에 걸쳐서 그려낸 것이 아닐까 싶다. 특별할 것이 없어 보이는 모드 루이스의 그림은 기술적으로 뛰어나다기보다는 오히려 불규칙적이고 자신이 바라보고 싶은 대로 단순화시키는 위트가 담겨있는 듯했다.











"내 인생 전부가 이미 액자 속에 있어요."


그녀는 가게에 가서 옷을 사 입거나, 친구를 만나 식당에 간 적도 없었다고 한다. 오두막 집 앞에 그림을 판다는 팻말을 내걸고 문을 열어놓은 채로 그 앞에서 그림만 그렸다. 그녀의 그림이 마을을 넘어 기사와 방송에 까지 등장하게 되지만, 그녀는 계속해서 춥고 어두운 집에서 자신의 삶을 살았다. 백악관에서 그림을 요청하게 되었을 때 그녀의 반응은 '그림값을 보내주면 그려주겠다.'는 식이었다고 한다. 굳은 신념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 보다 더 초연한 그림쟁이로서의 모습은 지금의 현실에서 바라보자면 너무도 꿈같은 이야기이다.

물론, 돈을 모으기만 하고 쓸 줄은 모르면서 세상에 대한 아내의 관심을 괴로워했던 구두쇠 남편 에버릿도 그녀의 궁핍한 일생에 제대로 한몫을 했다. 책에는 모드 루이스와 에버릿의 삶이 너무 미화되지도 왜곡되지도 않은 채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이야기를 담아낸 랜스 울러버


루이스 모드의 삶의 흔적을 모아 책으로 엮은 랜스 울러버는 그녀와 한 동네에 살던 꼬마 아이였다. 루이스 모드의 그림을 사모으던 아버지의 손을 잡고 작은 오두막집을 찾아갔던 기억은 어딘가 으스스하고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고 한다.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었고 루이스 모드가 그린 그림의 매력도 이해할 수 없었던 랜스 울러버는 어른이 되고 유럽에 머물던 어느 날, 반 고흐의 그림을 보다 잊었던 루이스 모드의 그림을 떠올리게 된다.

그렇게 루이스 모드에 대한 글을 쓰고, '내 사랑 모드'와 '모드의 계절'이라는 책을 펴내고, '그림자 없는 세계'라는 희곡을 써내게 된다. 루이스 모드 만큼이나 그녀의 삶과 그림에 담긴 스토리를 뮤즈이자 원동력을 삼아 작품을 펼치는 랜스 울러버도 흥미롭게 느껴진다. 난데없이 반 고흐에게서 왜 좋아하지도 않았던 루이스 모드의 기억을 발견했던 것일까.








경험의 연결고리


다양한 경험을 해야 하는 이유는 많은 것을 보고 바로 활용도 높은 영감으로 뽑아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전혀 연관 없어 보이는 어떤 것에 계기를 만들어주기 때문이 아닐까. 어릴 때부터 어른이 되기까지 하루하루의 경험은 계속 축적되어 기억의 방에서 어둡고 긴 시간을 보낸다. 잊혀지기도 하고 무의식 어딘가에 자리잡기도 하며, 선명한 기억으로 남기도 한다. 그렇게 쌓인 과거의 경험들은 현재의 시간과 미묘한 연결고리가 생기는 순간 느닷없이 튀어나와 예상치 못한 변주를 만들어 낸다.

그것은 마치 연관성 없이 개별적으로 일어난 일들이 마음대로 꼬여버려 하나의 장면으로 나타나는 꿈과도 비슷해 보인다. 랜스 울러버의 꿈에 느닷없이 등장한 모드 루이스는 나에게도 '경험이 어떤 연결고리를 가졌는지'에 대해 생각해 볼 실마리를 가져다주었다.









P의 라이프스타일 에세이


Lifestyle Essay 001 | 현실감각과 관계들
Lifestyle Essay 002 | 약속의 굴레
Lifestyle Essay 003 | 무색무취의 아이러니
Lifestyle Essay 004 | 기록의 양면성
Lifestyle Essay 005 | 나를 알아가는 시간
Lifestyle Essay 006 | 변하지 않고 변화할 것
Lifestyle Essay 007 | 감흥의 기원
Lifestyle Essay 008 | 모두의 효율
Lifestyle Essay 009 | 결론 없음에 대하여
Lifestyle Essay 010 | 반항심으로 피어나는 취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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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읽고 갑니다!

감사해요! 새해복많이받으세요.

'연결고리'라는 단어가 참 와닿네요 ;)

좋아하는 단어이기도 하고 많이 생각하는 방향이기도 하다보니, 글감이 되었네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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