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을 살아가다, <엔드 오브 디 어스>

in #kr6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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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에 취하면 세상이 가벼워 보인다. 얼큰하게 취한 밤, 돌이켜보면 낮 동안 전전긍긍했던 것들이 우습게 느껴진다. 취기 속에서 세상은 너무나 가볍게 다가온다. 모든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미 내 세상 같고 성공이 내 손 안에 있는 것 같다. 그간 고민한 일이 바보처럼 느껴진다.


잠들기 전, 내일은 세상을 정복해 버리겠다 다짐한다. 화해 없이 조각난 인연들, 떠나간 여친들, 내가 실수한 사람들, 모두 만나 시원히 오해 풀고 잘 지내야지 마음 먹는다. 그땐 어리석고 어렸다며 아름다운 기억으로 삼자고 말하고 싶다. 그렇게 내일을 기약한다. 난 이 세상의 주인이며 지배자다. 덤벼라 세상아. 친구들아 같이 가자. 콜콜 곯아 떨어져 잠든다.


두통과 함께 아침이 시작된다. 숙취와 쏠림이 전신을 강타하며 전날 품었던 생각에 낯부끄러워 진다. 혹여 카톡이나 전화 등으로 헛소리를 지껄이진 않았나 급히 전화기를 뒤진다. 품었던 헛생각이 너무나 쪽팔려 아무거나 집어 던지고 싶다. 깨어나서 알 수 있는 건, 내가 역시 어리석다는 사실 뿐이다. 역시 난 형편없는 놈이었고 잠깐 술에 속았을 뿐이다.


같은 상황이 수백 번 반복 된다. 무한루프다. 이미 여러번 겪었고, 귀결될 지점을 알면서도 같은 생각을 반복하며 흥에 겨운 것은 무엇일까. 왜 떨어질 것을 알면서도 함부로 화살을 쏘아댈까. 어리석음 때문이다. 사람은 어리석고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그래도 밤에 저지르는 실수가 좋다. 실수투성이 밤이 좋다. 낮만 있는 세상을 상상할 수 있는가. 난 상상할 수 없다. 솔직히 상상도 하기 싫다. 밤만 있는 세상은 어떤가? 상상할 수 있다. 생각만으로 행복하다. 밤만 있는 세상이 왔으면 좋겠다.


주위가 조금 흐릿해지고 가벼워지는 시간, 어둠에 가려 자세히 분간되지는 않는 시간, 사방이 고요해지고 나만 깨어 있는 듯 한 시간, 차분히 지난날을 돌아보며 방해 받지 않을 수 있는 시간, 그런 밤이 좋다. 낮의 환한 세상은 싫다. 낮의 실수는 용서받지 못한다. 낮 세상에 눈부신 환희는 없다. 그저 지루하게 내리쬐는 햇살과 늘어지는 하품만 있다. 환희는 밤에 찾아온다. 착각이라도 그것이 좋다.


공포영화 <엔드 오브 디 어스(Afflicated)>를 추천한다. 화끈하면서 서늘한 영화다. 주인공 데렉은 절친과 클리프와 버킷리스트 실현을 위해 유럽여행을 떠나는데, 방송용 카메라와 함께다. 여행의 모든 순간을 영상으로 찍어 블로그에 공개하기로 한 까닭. 신나게 즐기던 여행 중, 데렉은 프랑스의 클럽에서 정체불명의 여성에게 공격 당하고, 점차 이상하게 변한다. 햇볕에 피부가 타들어가며 파스타도 먹지 못하고 괴력을 쓰는 괴물이 되어간다. 데렉이 인간 아닌 다른 존재가 되어가는 기록들이 스릴 있게 나열 된다. 공포물이 익숙지 않다면 다소 혐오스럽겠지만, 여름 밤에 추천할만한 작품이다.


뱀파이어인지 드라큘라인지 흡혈귀인지 뭐라 부르던간에, 밤의 세상에서 살아가는 전설 속 존재들이 있다. 낮의 햇빛은 이들의 피부를 불태운다. 그래서 낮에는 숨죽이다 밤에 깨어난다. 밤은 이들의 세상이며, 천국이다. 해가 비추는 낮엔 이들의 자리는 없으며 그 시간은 지옥이다. 나에게도 그렇다. 그래서 빌고 싶다. 제발 날 물어서 밤인간이 되게 해달라고. 영화에선 변해간다는 공포와 저항이 그려지지만, 나에겐 행복해 보였다. 내 로망을 담은 멋진 영화였다. 밝은 뱀파이어 영화를 원한다면 <뱀파이어에 관한 아주 특별한 다큐멘터리>(https://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119296)를 추천한다.


낮은 논리가 통용되는 세상이다. 분명하며 앞뒤가 맞는다. 밤은 논리가 흐려지는 세상이다. 분명치 않고 앞뒤가 맞지 않으며 몽롱하고 어둡다. 그런 밤의 규칙이 좋다. 밤의 세상을 살아가고 싶다. 흡혈귀가 내 방문을 똑똑 두드리길, 그럼 나는 들어오라 허락한 후 목덜미를 내어줄 것이다. 참고로 나는 B형이며 유전병이나 당뇨는 없다.


어쩔 수 없이 낮을 살아가야하는 아픔을 어떻게 달랠까. 너무 노골적인 제목이지만, 이 곡을 첨부하며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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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에 낭만적이고 즐겁고 행복하기만 한 것은, 낮이 있기 때문이 아닌가요?

물론 말씀처럼 생각하실 수 있겠죠ㅎㅎ 대부분에겐 그게 맞겠지만..
전 야행성인지 밤만 있는 세상이 왔음 좋겠어요.

밤만 있는 세상이 왔으면 좋겠다.

작년인가 인스타에 비슷한 멘트를 쓴 적이 있습니다. <엔드 오브 디 어스>는 저도 재미있게 본 영화네요.

논리보다 감성이 충만해지는 시간이라 밤이 좋은 것 같습니다. ㅎㅎ
엔드오브디어스 정말 재밌는 영화죠~ 크게 알려지지 않아 아쉬워요.

앤드 오브 디 어스 한 번 봐야겠네요~^^

정말 재밌는 뱀파이어 영화에요~ 강추합니다. ㅎㅎ

어둠은 우리에게 두려움을 주지만 한켠으론 매력적으로 다가오기도 하죠.
그때문에 어둠의 주민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되는 것 같아요.

맞는 말씀입니다ㅎㅎ 저도 태생이 어둠의 자식인데..
그런쪽에 끼어들 자리 없나 기웃기웃 하는 중입니다. ㅎㅎㅎ

밤이 없다면 끔찍하군요..
좋은 영화같지만 전 안 볼래요 ㅎㅎㅎ

공포영화는 정신건강에 해롭습니다. ㅋㅋㅋ
방문과 댓글 감사드립니다~~

짱짱맨 호출에 출동했습니다!!

매번 감사드립니다. ㅋㅋ

공포영화라고 하시니 전 볼 일이 평생 없겠지만... 한때(?) 밤을 사랑했던 1인으로서 콜드빅님의 밤 사랑에 적극 동감합니다. ㅎㅎ

저는 밤과 새벽이 좋아요~
이성도 감성도 꽤나 컨디션이 좋거든요~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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