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8 챔피언스리그 4강 2차전 로마 v 리버풀 후기

in #kr6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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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버풀과 로마의 차이.)

1.

결승까지는 손 하나가 모자랐다.

지난 안필드에서의 대패를 만회하고 또 한 번의 '로마의 기적'을 이루기 위해 로마 선수들은 뛰었다. 그리고 거의 다다르기까지 했다. 그러나 심판의 손이 로마를 잡아끌었다.

물론 로마의 좌절을 경기 내적인 이유로도 설명할 수 있다. 1차전을 너무 지나치게 망쳐버렸고, 심지어 이번 경기에서도 8분 만에 할 말을 잃게 만드는 실수로 치명적인 선제 실점을 허용했다. 거세게 몰아붙인 것에 비해 마무리의 섬세함은 부족했다. 그래서 어쩌라고? 어쨌든 로마는 네 골이나 넣어 4:2를 만들어냈고, 한 골만 더 넣었으면 연장전을 치를 수 있었는데.

누군가는 이렇게 반론한다. 심판 판정에 로마만 피해를 본 것은 아니다. 판정은 전체적으로 문제가 많았고, 리버풀 역시 분명 불리한 판정을 당했으므로 심판이 마치 결과를 바꾸기라도 한 듯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인터넷 공간을 이 같은 여론이 점령했다. 한국에 리버풀 팬이 이토록 많은지는 처음 알았다. 그러나 '확실한 오심 여부'라는 점에서 판단해보면, 그리고 이를 시간대나 분위기 흐름 등과 종합적으로 고려해보면, 누가 피해자인지는 명약관화하며, 심판 판정이 결과를 바꿀 정도의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점 역시 분명하다. 드디어 다시 빅클럽이라 불리게 되었다는 기쁨으로 인해 눈이 멀지 않았다면 말이다.

경기 종료 후, 팔로타 구단주와 몬치 단장 등이 심판 판정에 분노를 터뜨렸고, 더 나아가 UEFA가 VAR을 도입하지 않는 것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다. 물론 VAR 역시 문제가 있음은 이론적으로만이 아니라 실제로도 아는 바다. 적어도 세리에 A는 VAR을 사용하고 있으니까. 그럼에도 없는 것보다는 명백히 낫다.

2.

이번 경기에서 로마를 이끈 선수는 엘 샤라위, 제코, 마놀라스였다. 이 셋은 기술만이 아니라 투지에서도 리버풀을 압도하고 다른 선수들의 모범이 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엘 샤라위는 본래 퍼스트 옵션이 아니다. 그의 포지션인 왼쪽 측면에서의 퍼스트 옵션은 페로티다. 안정적인 볼 운반과 찬스메이킹에서 페로티야말로 로마 최고의 선수고 사실상 유일한 카드기도 하다. 물론 엘 샤라위는 위협적인 슈팅과 공격 위치 선정, 많은 활동량 등 나름의 강점을 갖추고 있다. 그러나 이는 반대쪽 측면에 드리블과 플레이메이킹 능력을 갖춘 선수가 있을 때야 빛을 보는 능력이기에, 페로티와 포지션이 겹치는 엘 샤라위의 기회는 제한될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기회를 받을 때도 그다지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던 엘 샤라위다.

페로티의 부상으로 인해 최근 리그 경기에서 기회를 얻은 엘 샤라위는 활발하고 날카로운 모습을 보여주는 한편, 계속해서 골대만 맞추며 지독히도 운이 없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이는 이번 리버풀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페로티 같은 드리블 능력은 없지만, 간결하고 영리한 움직임으로 공격을 이끌고 리버풀 수비진에 균열을 냈다. 0:1로 뒤지던 전반 14분, 플로렌치의 크로스를 헤딩으로 연결했고 이것이 밀너의 자책골로까지 이어졌다. 전반 34분에 날린 슈팅은 리버풀 선수를 맞고 굴절된 후 골대를 맞고 나갔다. 후반 6분에는 알렉산더아놀드의 헛발질을 놓치지 않고 그대로 파고들어 슛으로까지 연결했고, 이를 카리우스가 막았으나 그 공을 다시 제코가 잡아 마무리했다. 후반 17분에 발생한 이번 경기 최대의 문제 사건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리버풀 페널티박스에서의 난전 상황에서 알렉산더아놀드가 공을 걷어낸다는 것이 쉬크의 몸에 맞으며 위험하게 떴고, 엘 샤라위가 이를 포착하며 발리슛으로 연결했다. 골문으로 향하던 공은 알렉산더아놀드의 손에 맞고 골라인아웃되었는데, 당연히 주어졌어야 할 페널티킥은 없었다. 하여간 엘 샤라위에게는, 페로티와는 다른 자신의 가치를 충분히 보여준 경기였다. 골대 앞에서 굿 한 판만 벌이면 되겠다. 그러면 동향인 살라흐처럼 더 높은 차원으로 도약할 수도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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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 샤라위는 후반 29분에 안토누치와 교체될 때까지 활발하게 로마의 공격을 이끌었다.)
[이미지 출처: 로마 공식 웹사이트]

전반전에 로마의 공격을 이끈 것이 엘 샤라위였다면, 후반전은 제코였다. 팀의 두 번째 골을 넣으며 희망의 불씨를 살렸을 뿐 아니라, 무시무시한 피지컬과 투지로 중앙에서 싸우고 버티며 공격을 이끌었다. 마놀라스는 빠른 발로 로마 뒷공간에서 발생하는 위기들을 잘 처리해냈다. 극단적으로 공격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던 로마였기에 마놀라스에게 가해지는 부담은 컸지만, 그는 훌륭히 해냈다.

그러나 각 영역에서 축이 되는 선수들의 활약에도 불구하고 로마의 공격은 좀처럼 결실을 맺지 못했다. 제코와 발을 맞춰야 할 파트너가 쉬크, 윈데르, 안토누치 같은 핏덩이들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쉬크는 중압감이 클 경기임에도 훌륭한 잔재주를 보여주곤 했지만, 어리벙벙하게 공을 뺏기거나 플레이를 끊는 장면들이 있었고, 무엇보다 유효한 장면을 만들어낼 날카로움은 결여되어 있었다. 윈데르 역시 최정상급 클럽과의 경기, 고도의 집중력이 요구되는 상황에 임하기에는 다듬어야 할 부분이 많아보였다. 이런 핏덩이들을 데리고도 네 골을 넣었으니, 페로티가 부상을 당하지 않고 경기에 뛰었다면 결과가 바뀔 수 있었다는 아쉬움은 당연한 것이다. 그나저나 분명 비싼 돈을 들인 또 한 명의 공격수가 있었던 것 같은데?

날카로운 킥력의 플로렌치는 로마의 주요 공격 루트가 되었다. 또한 활동량과 투지도 돋보였다. 그러나 후반 30분 마네에게 가한 위험한 태클은, 리버풀 팬들이 자기들도 심판 판정의 피해자라는 물타기를 할 빌미를 줄 정도로 악질이었다. 토티와 데 로시에 이어 유스 출신 카피타노의 계보를 이어나갈 선수니, 토티와 데 로시의 나쁜 모습은 절대 배우지 않기를 바란다.

레알 마드리드와 바이에른 간 준결승의 향방을 결정한 것은 하피냐, 톨리소, 울라이히의 치명적인 실수였다. 나잉골란은 그 비극적인 대열에 끼고 말았다. 후반 40분 원더골로 실수를 만회하긴 했지만 내내 표정은 어두웠고, 결국 경기 종료 후 눈물을 보였다. 그 라자 나잉골란이 말이다. 그러나 누가 나잉골란을 욕하랴. 대신 이렇게 말해야 할 것이다. 너는 이 실수를 다음 시즌 더 커다란 공으로 충분히 갚을 수 있는 선수고 또 그래야만 한다고.

3.

이번 경기 리버풀에서 가장 눈에 띈 선수는 살라흐가 아니라 마네였다. 1차전에서는 마무리에서의 문제 때문에 살라흐와 피르미누에 비해 평이 안 좋았는데, 이번 경기에서는 리버풀의 공격을 이끌며 로마를 괴롭혔다.

언제나 가장 열심히 뛰는 밀너는, 하마터면 리버풀 팬들의 원망의 대상이 될 뻔했다. 1차전에서 본의 아니게 페널티킥을 내주더니, 이번 경기에서도 자책골을 기록하며 로마의 희망을 살려주었다. 1차전 핸들링이나 이번 자책골이나, 선수에게 책임을 묻기 어렵다는 점에서, 게다가 가장 열심히 뛴 선수에게 찾아온 얄궂은 결과라는 점에서 기억에 남는다.

4.

멘털을 유지하기 어렵게 만드는 경기다. 지난 경기에 대해 두 가지 의미로 잔인하다고 했었는데, 이번 결과 역시 그러하다. 실패와 좌절의 원인이 로마 선수들에게 있었다면 이토록 심란하진 않았을 것이다. 지금까지의 숱한 실패들이 그러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누구나 감동할 정도로 멋지게 싸웠다. 결승에 갈 수 있었다. 또 한 번의 기적을 쓸 수 있었고 클럽의 위상은 더 높은 차원으로 올라설 수 있었다. 그러나 발이 아니라 손이 문제였다. 그것이 가슴을 아프게 한다. 시간을 아끼기 위해 판정에 항의조차 하지 않던 선수들을 생각하면 더더욱.

그럼에도 시간은 멈추지 않고 잔혹하게 흐른다. 시즌은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이다. 세리에 A에서 남은 3경기 동안, 첫째로는 다음 시즌 챔피언스리그 진출을 확정 지어야 하고, 둘째로는 37라운드에서 유벤투스의 발목을 잡아야 한다. 좌절로부터 무언가를 배우고 성장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수밖에 없다. 물론 잔혹한 축구의 여신이 무슨 괴이한 짓을 벌일지는 아무도 모른다. 챔피언스리그 진출 실패도 끔찍하지만, 남은 3경기에서 심판 판정의 수혜자가 되는 시나리오도 있을 수 있겠지. 이렇게 둥근 축구공에 어떤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까. 그나마 세리에 A엔 VAR이 있다는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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