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인한 아내를 짓눌러 버린 단 한 글자

in #kr6 years ago

저의 아내는 참 강한 사람입니다. 거기다가 마음 씀씀이도 넓은데다가 어떨 때는 너무나 쿨해서 소심함의 끝판왕을 달리는 저와는 아예 양 극단에 서있는 그런 사람이라고 느껴질 정도입니다. 생일, 결혼기념일, 발렌타인 데이 같은 날들조차 단지 일년 중의 다른 하루와 무에 다른가 하여 그냥 스쳐 지나가는 걸 아무렇지 않게 생각할 정도입니다. 이런 담대한 아내이고 제가 아는 가장 지혜로운 사람의 하나이기에 여러가지 살아오면서 당면하는 많은 문제에 대하여 내리는 아내의 결정에 무한 신뢰를 보내고 이를 따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2주전 점심시간을 조금 남긴 시간에 직장으로 걸려온 전화 속에서 들려온 아내의 목소리는 평소의 대담함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자기 병원에서 검사결과가 나왔는데 꼭 보호자랑 같이 오라고 하는데 지금 병원으로 올 수 있어?

아내의 말투 속에 떨림이 느껴졌습니다. 다행히 병원에서 회사가 멀지 않아 급히 달려가서 아내와 함께 먼저 맞이하게 된 간호사에게 아내는 참지 못하고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집니다.

보호자랑 같이 오라고 하는 것을 보니 좋은 소식은 아니겠네요.

여기는 미국이고 간호사도 미국사람인지라 영어로 대답을 해주는데도 별도의 해석 과정이 필요없는 것처럼 귓속 깊숙히 와서 선명하게 대답이 꽂힙니다.

녜, 좋은 소식은 아니예요. 의사 선생님이 오시면 더 자세히 말씀해 주실 거예요.

유방암 검진을 위해 정기검사의 하나로 실시한 2D/3D 마모그램에서 나올 수 있는 나쁜 소식이란게 도대체 무엇인지 유추하지 못할 사람이 어디 있을까요. 곧 이어 아내의 주치의가 들어오고 검사결과 DCIS (Ductal Carcinoma In Situ, 유관상피내암) 이 발견되었다고 바로 암전문의 팀들과 진료약속을 잡아야 할 거라고 얘기를 해 줍니다. 나중에 아내에게 듣기로는 이 때 의사가 얘기해 준 내용들이 하나도 귀에 안들어왔다고 합니다. Breast Cancer(유방암)이라는 단어에 워낙 압도가 되어버려서요. 이래서 그렇게 간호사가 보호자와 함께 와야 한다고 당부를 한 모양입니다.

이때가 2018년 2월 15일 목요일.

이 날 이후 아내는 물론 저의 삶을 바라보는 시각은 그야말로 이럴 수 있을까 싶게 달라져 버렸습니다. 그토록 강인한 여성이었던 아내는 눈에 띄게 심적으로 나약해 졌습니다. 나중에 별도의 포스트로 소개할 기회가 있겠지만 3인의 팀으로 구성된 앞으로의 치료 전과정을 팀을 짜서 이끌어줄 의사들이 모두 다 완치율이 95에서 99%가 될거라고 강조를 함에도 불구하고 아내에게는 크게 위로가 안되는 모양이었습니다. 다만 아주 가깝게 지내고 저희 근처에 사시는 한국인 이웃분이 암전문의(Radiological Oncologist) 라 그 분에게 별도로 만나서 우리말로 자세하게 아내가 처한 상황에 대하여 들었던 설명은 너무나도 큰 도움이었습니다. 이럴 때 이런 분이 가까이 계시다는게 얼마나 다행이었던지..

정말 불행한 소식 중에 다행한 소식은 아내의 상태가 유방암 0기, 소위 말하는 아주 초기에 발견된 케이스라는 겁니다. 이름조차 생소한 DCIS 라는 불과 0.5cm 크기의 세포안에 갇혀있는 조직은 아직 암으로 발전하지 않은 상태이며 수술에 의해 완전 제거 및 치료가 가능하다는게 큰 위로가 되었고 상대적으로 매우 작은 도시임에도 최고의 시설을 갖춘 독립된 Breast Cancer Center (유방암 센터)가 있다는 것은 저에게는 정말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아내에게는 그닥 큰 위로가 되지는 않는 듯 합니다).

평소에 혼자서 조용히 시간을 보내기 좋아하는 아내가 이제는 혼자 있는 시간을 싫어해서 제가 항상 곁에 있어주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이 제일 큰 달라진 모습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매주 주말 토/일요일 양일간 저만의 시간을 보내기 위해 지하실에 박혀있던 저의 생활패턴을 이제는 아내 옆에 딱 붙어서 다른 특별한 일을 하지 않더라도 함께 있는 걸로 바꾸었습니다. 아내도 이제는 제가 옆에 종일 있을 수 있는주말이 좋다네요.

가만 놔두면 암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높은 DCIS 를 제거하는 수술을 이번주 금요일(3월 9일)에 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상처가 아무는 한달 후에는 방사선 치료가 5주 정도 이어질거고 그 후에는 5년간 재발방지를 위한 Tamoxifen 이라는 약을 계속해서 복용하게 되는 길고 긴 일정이 이어집니다.

내게 있어 가장 강인한 여성의 상징이었던 아내를 단번에 짓눌러 버린 단 한 글자, . 너무나 감사한 의학기술의 발전으로 인한 조기발견과 조기치료가 아내의 인생에서의 경험치를 엄청나게 올려놓는 결과로 마무리 되겠지만 짧지 않은 여정 내내 마음을 조아릴 아내에게 큰 힘이 되어주고 싶습니다.

이제 겨우 2주가 지났을 뿐이군요. 참 길게도 느껴지는 시간들이었었는데...

이 글을 읽고 계실 여성분들께 여러분 연령에서 권장되는 주기의 마모그램 검사 절대로 놓치시지 말기를 이 기회에 다시 한번 강조드리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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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분의 쾌유를 바랍니다.
이번에 산정특례 연장했으니 벌써 5년이네요. 제 스스로가 희귀난치병 확진받았을 때가 생각납니다. 남들보다 예후가 좋고 잘 관리하면 남들보다 오래 살 수 있다지만 마음의 병으로 옮는데는 부족하지 않았었지요. 가족의 자리가 큰 위로가 힘이됩니다.
머지않아 이 글이 웃으며 읽을 수 있는 추억이 될겁니다.
시간은 잘가고, 인간은 강한 존재랍니다^^

@goldenman 님 어디가 아프신가 해서 지나간 포스트를 찾아서 [회상] 으로 쓰신 글을 읽어보았습니다. 그런데 2편을 찾지 못해서 1편만 읽어보았습니다만 여러가지로 짐작만 해봅니다. 이렇게 격려 댓글 남겨 주셔서 감사합니다. 특히 가족의 자리가 큰 위로가 힘이 된다고 해 주시니 더욱 제 자리를 잘 지켜야 하겠다 다짐을 하게됩니다.

인간이 강한 존재라는 말씀 또한 감사합니다.

사시는 곳이 어디신지 긍금합니다. ^^. 한번 만나 이야기도 듣고 싶고 그래요 ㅎㅎㅎ ^^

킹빗님, 혹시 저 말씀이신가요???
수원이에요 ^^ 언제든지 스팀챗 주세요~

@goldenman 님 수원에 계시는 군요. 미국에 오기 직전에 저도 수원에 4년이나 살았답니다. ^^

가슴이 미어집니다. 얼마나 떨리고 놀라셧을까요. 와이프분께 큰 힘이 되어주세요. 저도 요즘 나이를 조금씩 먹어가니 매우 조심스럽고 걱정도 많이 됩니다...

같이 공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내는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큰 힘이 된다고 얘기해 줍니다. 그동안 못들었던 이야기들도 아내에게 많이 듣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반갑습니다 글 잘읽었어요~
팔로우&보팅하고 갑니다~^^
시간나시면 맞팔 부탁 드릴께요!

저와 같은 캐릭터를 프로필로 쓰시니 더 반갑습니다. 팔로우 했습니다. 방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조기에 발견이 되고 치료가 잘 되신 것 같아 정말 다행입니다. 마모그램 검사 챙길게요. 감사합니다^^

아직 진단만 받았고 치료는 시작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한걸음씩 가야지요. 의학의 발달로 정말 많은 사람이 혜택을 받을 수 있게 된 것 같아 기쁜 마음입니다. 따뜻한 댓글 감사합니다.

조기에 발견해서 천만다행이네요.
서로의 사랑이 더욱 깊어지는 시간으로 생각하고
감사하며 살다보면 암따위는 싹 사라질거라 믿습니다.

저도 조기에 발견된 것 정말 천운으로 생각합니다. 특히 올해 처음으로 3D 마모그램을 했거든요. 말씀하신 대로 요즘 저희 부부의 사랑은 어느때보다도 깊습니다. 많은 대화도 나누고 있구요. 말씀해 주신 대로 감사하며 살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요즘 의학기술이 대단하네요. 유방암 위험 요소를 미리 찾아서 제거하다니.. 근데 당사자들에게는 아무리 0기라도 충격이 될 수 있으니 기술
발전이 좋은건지 아닌지 저도 헷갈립니다.

길게 보면 좋은 일이겠죠?

요즘 '윗쪽으로 떨어지다(Falling Upward)'라는 미국 신부님 책을 읽고 있는데요, 인생 후반전에는 추락하는 경험이 중요하다는 얘기에요.

저도 요즘 개인적인 일로 조금 힘든 시간 보내고 있는데 몇해 뒤면 좋은 경험이었다고 얘기할 날들이 될거라 생각하며 버티고 있습니다.

정말 지적하신대로 0기라는데 아내의 정신적 충격은 상당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기진단이 중요하니 발견이 되어야 하겠지요.

장독대에쌓인눈님께서 해주신 말씀이 딱 제 마음입니다. 먼 훗날 오늘을 돌아보며 미소 지을 수 있을거라고 믿습니다. 이제 이곳에서 글을 쓰게 되어 살짝 외로웠었는데 이렇게 알고 지내던 분이 격려해 주시니 정말 좋네요.

그 입장이 안되어보면 그 누구도 그 마음을 이해하기는 힘들것입니다. 모든것이 마음에서 오는데 마음을 잘 헤아려 주셔서 잘 극복하시기를 기원합니다.

딱 아내 마음이 @gaeteul 님 말씀입니다. 막상 자기 자신에게 그게 닥치고 보니 아내의 정신적인 데미지가 상당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더 열심히 보살피는 중입니다. 함께 어려운 시기를 헤쳐나간 경험이 있기에 이번에는 더 잘해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형수님의 빠른 완쾌를 기원하겠습니다.

저도 한국나이로 40대가 된지 벌써 몇년째인데.. 아직 한국 보험공단에서 무료로 해주는 암검진을 계속 미루고 받지않고있습니다. 올해는 꼭 시간내서 해야겠어요. 첫째도 건강 둘째도 건강인데...

ssaiya 님 반갑습니다. 어서 당장 받으셔야지요. @ssaiya 님이 기둥 아니시겠습니까? 이번 일로 인하여 정말 많은 생각을 하게 되네요. 항상 건강하세요. 제가 마음속 깊이 기원하겠습니다.

늘 돈 없다고 50원도 아껴야 한다던 짠돌이 아버지께서...엄마 이빨이 아프다고 하니 당장 큰 돈을 아무 말 없이 내놓으시더라구요....

아껴둔 님의 사랑을 다 꺼내주시고 계시니
아내분께서 분명 잘 이겨내실 겁니다.

아내분에게만은 항상 밝게 웃어주세요....

그리고 스티밋에선 힘든 표정 지으셔도
다른 스티미언분들이 웃어주실겁니다.

잘 이겨내시고 함께 편안한 주말을 맞이하는
두 분만의 가장 행복한 한 주 되세요.

방금 리스팀된 ystory 님의 글을 읽고 왔는데 @ystory 님께서 댓글을 주시니 한결 더 반갑습니다. 따뜻한 말씀 감사합니다. 최근에 있었던 일이라 아내에게 많이 당혹스러웠던 것 같은데 시간이 지나면서 잘 이겨내리라고 믿고 있습니다.

이제 스팀잇에 옮겨온지 얼마 안된지라 저를 아는 분이 얼마 없기에 오히려 편안하게 개인적인 이야기를 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이야기 저의 블로그에는 못 쓰는 이야기거든요.

감사합니다.

글 읽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래도 주변에 좋은 분들과 시설이 있고 초기에 발견되셔서 다행이에요. 수술과 이후의 치료과정이 순조롭기를 잠시 두 손 모아봅니다.

함께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동네에 있는 도시 크기에 걸맞지 않은 Breast Cancer Center 를 보면서 저기 취직하면 좋겠다 생각하면서 바라보기만 했는데 이렇게 도움이 될 줄을 몰랐습니다. 자신의 일처럼 걱정해 주시는 @gyedo 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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