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후를 만나라? 덕후를 만나지 마라.

in #kr6 years ago (edited)

우리나라 덕후의 역사는 책으로, 아니 논문으로 수십편을 써낸다해도 모자를만큼 많은 내용들이 있다. 개인이 그것을 모두 살펴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글은 단지 그 초엽을 보냈던 사람이 남기는 회고다.


학력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것에 반대하는 사람으로서 학력을 언급하기는 좀 그렇지만, 지금와서 돌이켜보면 어마무시한 고학력자들이 그 문화에 중요한 축을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정확하게는 그들이 유명 대학에 진학하기 전에 이미 덕후였다. 즉, 초창기에 덕후 문화란 일정 수준 이상의 지적 사고 능력이 있어야 접근 가능한 세계였다. 비록 좋은 학교로 진학하지 않았더라도 열심히 활동하던 이들이 이후 전업 평론가가 되거나 잡지사에 취직하거나 기획자가 되는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았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지금의 10대는 모르겠지만. 내 어린 시절에 일본의 만화, 게임, 음악을 수입하는 것은 모두 불법이었다. 그렇다고 한국에 들어오지 않았던 것은 아니고 마치 한국 작품인것처럼(?) 해서 이상하게 바꿔서 들어오곤 했다. 당연히 조금씩 머리가 굵어질 무렵-참고로 내가 말하는 굵어진다는 것은 초등학교 고학년을 말한다. 즉 10~12살. 우리는 모두 조숙했다- 원본을 보고 싶어했다.

그러나 불법이니까, 정상적으로 구할 수 있을리가 없다. 결국 어둠의 루트로 구하는 방법을 어찌어찌 해서 알아내게 된다. 그렇게 마치 비밀결사 같은 모임이 생겨난다. 우라사와나오키의 '20세기 소년'에 나오는 딱 그 분위기, 그 느낌. 그게 당시 일본 만화와 게임을 향유하던 한국의 어린 덕후들의 평균적인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 때쯤, 우리나라에도 PC통신이라는 것이 생긴다. 정말 절묘한 시기. 보통 이러한 덕후 그룹은 머리 좋은 몇 명과 그들이 주도하는 문화를 향유하는 추종하는 이들로 구성된다. 그리고 이 머리 좋은 이들은 PC의 사용법도 빠르게 습득한다. 하이텔, 천리안, 나우누리 등 대형 통신망은 물론 각종 사설BBS까지 만화 동호회 없는 곳은 단 한 곳도 없었다. 그 이유가 이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만화 동호회는 당연히 일본 만화와 아니메가 주류였다. 여기에 Jpop도 사이드로 곁들여졌다. 나의 10대는 이러한 일본 문화에 푹- 빠져 살았던 시기다. 비즈니스 때문에 일본을 방문할 때마다, 일본 회사 담당자들에게 "영혼의 고향에 온 느낌"이다라고 말하곤 했다. 이 말이 빈 말은 아니다.


대학로에서 가졌던 한 번개에서 우리는 밤새, 필립 K딕의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을 꿈꾸는가'가 오시이마무로의 '천사의 알'에서 어떠한 메타포로 담겨 있는지, 이것이 결국 엘빈토플러가 말했던 '권력이동'을, 우리 사회 측면을 말해주고 있는 것 아닌가. 이러한 식의 논쟁으로 밤새 수다 떨곤 했다. 내가 기억하는 덕후문화는 이러했다. 그러나 지금의 덕후 문화는 많이 다른 것 같다. 오늘 글을 쓰게 된 이유는 이 때문이다.


지금 한국의 힙합은 스타일만 남아있고 정신이 사라졌다는 비판이 있다. 스타일은 점점 더 디테일하게, 더 다양한 기교를 보여주면서 세분화되고 발전해나가는데 본래 힙합에서 가장 중요했던 '저항 정신'은 안보인다. 시대의 불의에 맞서 써우며 과감하게 할 말을 하는 것은 어디 간 건지 모르겠다. (물론 그랬다면 지금의 국내 힙합 레이블 대부분은 이명박근혜 때 망했을꺼고, 가수들 대부분은 방송에 출연을 못했겠지. ) 지금 한국의 덕후문화를 보면서 같은 느낌을 받는다.


이러한 얘기를 어딘가에서 했더니, 덕후계의 꼰대란다. 맞는 지적이라고 생각한다.

오늘은 어차피 꼰대로 불리는 김에 더 써보려고 한다.


나 뿐만 아니라, 많은 이들이 국내 신생 애니메이션 회사나 게임 회사에서 일을 했다. 지금은 회사 대표가 된 이들이 그냥 개발자1, 기획자1 이던 시절에 같이 일했거나 옆 회사에서 일하는 동료A이던 시절이었다. 

그 때는 젠더의식이라는 말 자체가 없었던 것 같다. 물론 실제 없었던 것이 아니다. 그냥 우리 모두 무지했었다. 마도카의 생일은 외울 수 있어도 그러한 단어들은 몰랐던 것이 보통의 우리들이었다. 그러나 여성에 대한 인식이 지금처럼 처참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리고 모르는 영역에 대해서 쉽게 재단하지도 않았던 것 같다.


그러다보니 편하게 지내는 여자 동생들에게도 '건전한 취미를 가진 남자를 만나라'고 충고를 해줄 수 있었다. 좀 더 정확하게는 '덕후는 괜찮아'라는 싸인이었다. 우리 시절까지만 해도 이 구분법이 유효했던 것은, 그러한 취미에 돈과 시간을 쓰지 않는 남자는 대부분 술과 성매매에 돈을 썼으니까. 덕질에 돈과 시간을 쓰면 거기에 돈과 시간을 쓸 수 없으니까. 최소한 한 가지 저점은 걸러내는 방법론이었다. 


그러나 메갈낙인을 찍고 비논리적인 얘기를 하면서 오로지 힘의 논리-머릿 수를 모아서 실력행사-로 일을 해결하려고 하는 이들을 보니, 이제는 이러한 충고도 맞지 않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자신들이 비논리적이다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 가장 크다. 지금은 비단 덕후 세계  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사회 영역에서 확증 편향(Confirmation bias)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 같다. SNS와 각종 개인화된 미디어가 사람들의 사고에 다양성을 넓히기보다는 자신들이 보고 싶은 것만 보게 하고 잘못된 생각을 강화하고 있는 것이다.


진짜 꼰대스러운 얘기를 하나 더 하자면. ^^

내 어렸을 때는 힘들게 구했던 영상이나 음악들이 지금은 클릭 몇 번이면 구할 수 있는 시대다. 또한 덕후가 만든 작품을 보고, 덕후가 다시 작품을 만드는. 그러한 것이 몇십년간 누적되어왔으니. 지금은 오히려 라이브러리가 너무 많아서 무엇을 봐야할지 모르는 시대라고도 할 수 있다. 그것이 어쩌면 독이 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하나의 작품을 수십번 돌려보며 그 사유의 세계를 탐구해보려는 노력을 하는 이들이 지금 얼마나 있는지 모르겠다. 더 나아가 그것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인문사회 과학, 자연 과학을 공부하려는 이들은 아예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각 기초 학문의 베이스 없이 작품을 온전히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인터넷 상에서 오가는 글들의 수준이 심각하게 떨어지고 있는 것, 좀 심하게 말해서 하향 평준화되었다는 느낌을 오래전부터 받아왔는데, 이러한 결과는 지금 세대 덕후들의 게으름에서 기인되고 있다고 본다. 


어차피 나도 이제는 옛날 사람이다.

그러나 혹시라도 내 얘기를 듣고자 하는 덕후가 있다면, 아래 얘기를 해주고 싶다.


"말을 하기 전에 생각을 하고

생각을 하기 전에 공부를 해라."


그리고 글은, 설사 짧은 댓글이라도 위 과정을 거친 후에 하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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