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단상] 내셔널갤러리에서의 한 경험

in #kr5 years ago

현지 시각 어제 오후(2019년 7월 5일)에 런던 내셔널갤러리에서 있었던 작은 에피소드 하나를 기록해 둔다.

오전에서 이른 오후까지 테이트브리튼 관람(반고흐 특별전이 있었다)을 마친 후, 숙소에 돌아와 잠깐 쉬고 나서, 이번엔 여행의 목적지 중 하나인 내셔널갤러리에 갔다. 먼저 19세기 말~20세기 초반 화가들의 작품을 보았는데, 22년 전에 느꼈던 그런 압도적인 느낌은 적었다. 아마 오전에 고흐와 베이컨을 보았기 때문이려나.

보는 내내 사람들은 왜 이런 짓을 할까, 하는 의문이 계속 다가왔다. 그림을 그리고, 그것도 예쁘게도 그리고, 괴상하게도 그리고, 정성을 다해 그리고, 대충 그리고, 서로 다르게 그리고, 서로 같게 그리고, 같은 것을 그리고, 다른 것을 그리고, 왜 그런 짓을 계속 해왔을까? 예술 본능이라는 게 있는 걸까? 그래서 거기에 압도당하는 걸까? 예술 본능은 그렇다면 뭘까? 게다가 그걸 하는 사람은 뭐고 또 이렇게 보러 오는 사람은 뭐란 말인가? 정말 내셔널갤러리에서는 모든 나라에서 온 모든 연령층의 인간을 만날 수 있다. 아마 다른 어느 곳보다 더 그럴지도 모른다. 내 말은 미술관을 말하는 거다. 게다가 미술관에서는 다른 사람을 관찰하는 것도 크게 무례한 일이 아니다. 뭔가 미술관을 보는 행위 중 하나에 속하기 때문이며, 비슷한 속도로 함께 이동하는 다른 누군가가 꼭 있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왜 여기에 오는 걸까? 단지 인증샷을 위해서는 아닌 게 분명하다. 뭔가 보고, 이야기를 나누고, 사진을 찍고, 오래 보며 생각하고, 앉아서 쉬고, 다시 보고, 걷고, 보고. 저 노인은 왜 그 나이에 다른 곳 아닌 여기에 굳이 온 걸까? 서로 자리를 만들어 가며, 보는 위치를 정하고, 미세 조정하고, 앞으로 뒤로 옆으로 아주 천천히 하지만 때론 재빠르게 자리를 바꿔가면서, 서로 뭐가 그리 미안한지 '미안'을 연발하면서, 흐름과 운동을 만드는 걸까? 도대체 예술 창작은, 작품은, 감상은 인간에게 무슨 의미일까? 외계인인 본다면 이 사람들을 하나하나 구별할 수 있을까? 성별, 지역별, 종족별, 인종별로 구별하려 할까? 아니면 들판의 스프링복이나 열대 바다의 물고기떼처럼 그저 '인간'으로 바라보기 바쁠까?

이런 단상들 속에서 갑자기 6시 30분부터 7시 30분까지 특별 콘서트가 열린다는 거다. 미술관에서 개최되고 있는 스페인 화가 '세로야(Joaquin Sorolla, 1863~1923)' 특별전을 계기로 마련한 미니 피아노 콘서트. 방 번호 따라 이동하다 보니 시작 직전에 콘서트가 열린 8번 방 근처에 있었던 거고, 안내원의 호의로 가까스로 들어갔다. 음악가 겸 음악감독 Marta Espinos가 세로야에서 영감을 받은 작곡가들의 곡을 피아노로 연주했다. 나한테는 Jacquin Rodrigo(1901~1999)의 곡(Quatro Estampas Andaluzas ; Four Andalusian Vignettes)이 인상적이었는데, 한국에 가서 찾아보고 싶다. 곡들을 들으며, 곡과는 별도로 다른 상념들도 간간히 떠올랐다. 정말 전 세계에서 온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을 함께 모으는 이 힘은 무엇일까? 음악이 주는 안심됨은 또 무엇일까? 내가 다른 사람들과 달리 오해하며 듣는 건 아니라는 확신은 무얼까? 미술관의 이 편안함은 말이 필요 없기 때문일까? 수시간을 같이 있어도 서로 전혀 불편하지 않은 이 군상은 무엇일까? 그렇게 나는 안달루시아 지방의 풍경과 정감에 젖어들었다.

한국의 미술관에서 이런 이벤트를 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다가, 금세 그건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우리가 영국처럼 식민지를 개척해 다채로운 문물을 약탈해 온 과거가 없기 때문에 사람을 모을 유인이 많이 떨어진다. 그렇다, 최소한 런던은 '문화관광' 덕으로 먹고 살고 있으며(브렉시트의 이유도 이 자신감에 있는데, 물론 이는 19세기적-제국주의적 발상에 불과하다), 문화재 반환 소송에서 그리스가 승소하면 타격이 클 것이다(물론 내 상상에 불과).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이틀 머문 짧은 소견으로 런던은 통신 인프라가 절대 부족하다. 지하철에서 lte도 터지지 않는다. 내 생각에, 관광객은 가이드북을 사고 현지인은 책을 읽으라는 지방정부 정책의 일환인 것 같다. 내 말인즉슨, 촛불혁명을 비롯해 한국인이 최근 집단으로 이룬 성취 중 상당부분은 통신망에 기초한다는 생각이며, 최소한 한국은 빠른 변화를 감당하려 하고 있다는 점이다. 4차산업혁명(전 세계에서 한국만 쓰는 용어라고 해서 앞으로 많이 쓰기로 했다)의 중핵에는 통신이 있다. 그런데 런던은 2차산업혁명과 그 연장선(제국주의, 문화관광=약탈문화재팔이)의 후광에 앞을 보지 못하는 느낌이다. 아, 물론 한국 정부도 과거 제국주의 경험이 있었따면, 미술관과 박물관 입장료는 무료로 해서 주변 상권(숙박, 요식, 교통, 공연, 관광 등)을 부흥하는 대대적인 경제정책을 쓸 수도 있었을 테지만. 조상이 후져서 고작 식민지나 겪고 전쟁으로 온천지가 폐허가 되고 오랜 독재로 인재는 씨가 마르고 맨땅에서 다시 시작하는 지금 그래도 얼마나 많은 진도를 뽑았는가 말이다. 이제 발상을 획기적으로 바꿔야 한다. 남들이 하지 않은 거라서 못할 게 아니라, 바로 그렇기 때문에 해야 하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에 근거만 주면 된다. 남들을 밟고 이기는 것이 아니라, 남들이 한 적 없기 때문에 자연스레 남들보다 앞서 있을 수 있는, 그런 일을 하면 그만이다. 분명 싹은 많이 보인다.

내셔널갤러리는 그 자체로 수많은 상설 전시물이 수많은 관람객을 세계 각처에서 매일같이 끌어모으고 있으니, '시드'(종자, 마중물)가 워낙 고퀄이라 한국의 그 어떤 미술관이나 박물관도 흉내내는 게 불가능하다. 그런데도 계속해서 미술+음악, 미술+강연 등의 이벤트를 기획하고 있으니, 한심하기가 현상유지에 급급한 정도이다. 몇 가지 가능성은 광주비엔날레나 부산국제영화제 같은 수준과 규모의 행사를 더 강화하는 것 아닐까? 상설은 아니라도 일정 기간 세계에서 관광객을 모아 서비스를 제공하고 모두가 함께 즐기는 그런 성격의 행사. 저 조무라기 지방자치행사는 다 묻어버려라. 21세기에 어찌 18세기로 퇴행하려 하는가? 남한은 전체로 보아도 일본 도쿄 규모의 인구에 겨우 비견할 만한데, 어찌 지방이 존재한다 말하는가? 부산도, 광주도 다 인천처럼 서울의 위성도시(?)일 뿐이다. 도쿄권역 인구가 4천만 명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육로로 3시간이면 간다는 걸 잊어서는 안 된다. 다른 접근이 필요한데, 결국 새로운 모델을 창출하는 수밖에 없다. 내셔널갤러리 모델은 애초 한국에 불가능하다. 그런 관광 산업을 만들려 해서는 안 된다. 한국이 강한 건 통신, 교통(물론 위성도시 내부는 좀 개선될 필요가 있다), 음식, 속도 뭐 이런 것들이 아닐까? 한국이 약한 건 자신감, 자부심, 부족적 다양성, 차별과 편견, 낯선 것 혐오, 평가할 용기 뭐 이런 것들인데, 이런 건 성장 과정에서 길러지는 능력이며 해 보기 전에 쫄지만 않으면 금세(?) 갖출 수 있다. 내셔널갤러리에서 본 17세기 플랑드르 미술만 해도 그 질과 다양성에 혀를 내두르게 되는데 그 바탕에 민주주의, 부와 군사력, 그리고 그에 걸맞은 스피노자 같은 철학자(물론 데카르트도 여기에 망명해 살았다)가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네덜란드가 그 당시 어떻게 세계 패권을 잡았는지 깊은 연구가 필요하며, 한국에 좋은 모델을 줄 것이라 확신한다.

생각이 길어졌는데, 오늘은 대영박물관을 정복할 것이다. 지금 시간 6일 오전 8시. 오전엔 어제 다 못 본 내셔널갤러리를 마저 보고, 이어 제국의 군사력이 식민지의 문화를 어떻게 침탈했는지, 그래서 지금 어떻게 벌어먹고 사는지 맨눈으로 똑똑히 목격하는 시간을 가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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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런던 오셨군요. 런던만해도 말씀하신것처럼 상설전시만으로도 볼게 많지요. 좋은 시간 되시길 바랍니다.

생각이 길어졌는데, 오늘은 대영박물관을 정복할 것이다.

"대영박물관"이란 표현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요즘은 영국박물관으로 부르더군요. 전 크게 신경 쓰진 않습니다. 아큐 식 정신승리인 걸요. 브렉시트 주제에, 뭐...

^^ 제가 말씀드린 포인트는 영국은 스스로는 그냥 British museum이라고 칭하는데 아시아쪽에서 굳이 대영박물관이라고 부른다는 것입니다.

사실 Great Britain이나 대한민국 같이 생각하면 명칭일뿐 굳이 신경쓸 필요가 없을수도 있고 그냥 이미 굳어지다시피한 이름을 굳이 바꾸어야하는지, 그렇게 치면 굳어진 표현은 정말 큰 문제가 없으면 안바꾸는것이 늘 정당화되는것인지 복잡한 문제같더군요^^

예를들어 영국박물관이라 하면 영국의 박물관 같은 의미와 혼동의 여지가 있으니 그냥 "브리티시박물관"이라고 칭하기도 합니다. https://www.museum.go.kr/site/main/archive/post/archive_3189

사실 메트로폴리탄 뮤지엄을 굳이 번역하지 않는 것처럼 애초에 이렇게 했으면 문제가 없었을텐데 일본, 중국 표기를 따라하다보니 굳어져버린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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