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롱헤롱 일기

in #kr6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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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망해서 행복한 사람'의 일원이지만 직접 대화해 본 적은 없는, '적당히 허세 있는 백수'(그들 말에 의하면) 정도로 명명할 수 있는 사람과 부산 여행을 마무리했다.

떠나기 전날 저녁, 늦은 시간에 '완전히 망해버린' 오빠에게서 연락이 왔다. 며칠 전 술자리에서 봤던 '적당히 허세 있는 백수'인 오빠가 아침 식사를 대접하고 싶어 한다는 이야기였다.

정작 나는 별생각 없었는데, 불편하면 연락처를 안 알려줘도 된다는 말에 괜히 신경이 쓰였다. 괜찮다고는 했지만, 오빠들 없이 따로 만나도 괜찮을까? 일단 졸려서 빠르게 약속을 잡고 바로 잠들었다.


그 오빠는 약속 시간보다 15분 정도 늦었는데, 전날 네 시까지 술을 먹었다며 미안하다는 말을 계속했다. 나는 네 시까지 술을 먹고 이 아침에 나온 게 더 신기했다. 괜찮냐고 물어보자, 자기는 괜찮은데 술이 덜 깬게 쪽팔리다고 해 크게 웃었다. 자세히 보니 정말 목이 빨갰다.

밥을 먹으러 가는데, 택시를 타자고 했다. 자기는 걸어가는 거리지만, 내가 짐이 많아 힘들 것 같다고 말했다. '완전히 망해버린' 오빠와 함께 다니느라 생각 보다 걷지 못했다. 마지막 날 정도는 걸어도 좋겠다는 생각에 걸어가기로 했다. 해변을 따라 걸으면 더 가깝다길래 같이 해변을 쭉 걸었다. 덕분에 부산에서 처음 바닷가를 걷게 되었다.

걸어가는 와중에, 부산에 사는 고모에게서 연락이 왔다. 내가 부산에 있는 걸 부모님이 말씀하셨고, 그 얘기를 듣고 전화를 하신 것이다. 못 본 지 3~4년은 된 것 같은데... 이미 돌아갈 버스도 예매해뒀지만, 고민 끝에 예매를 취소했다. 고모를 만나는 시간은 KTX를 타는 것으로 벌 수 있었다.

고모를 만나게 되면서 모든 일정이 변했다. 나는 '망해서 행복한', '적당히 허세 있는 백수'인 오빠와 밥만 먹고 헤어질 정도의 시간만 남겨뒀는데, 막상 만나니 함께 있는 시간이 즐거워 한참 뒤의 기차를 예매하게 되었다.


밥을 먹고 여기저기 걷다가 남는 시간에 카페에 앉아 있었다. 떠나기 직전 카페에서 가방을 봤는데, 읽고 있던 책이 눈에 들어왔다. 무슨 정신이었는지 "드릴 건 없고, 제가 읽던 책인데 선물로 드릴게요."라는 말을 꺼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내가 가지고 있는 오선지에 짧은 편지를 써주었다.

그 오빠는 읽던 책은 처음 받아 본다며 웃었고, 나도 읽던 책을 주는 건 처음이라며 같이 웃었다. 책갈피로 쓰던 영화제 티켓을 꺼내려 하는데, 그 오빠는 읽은 부분을 표시해뒀다가 다 읽은 후에 다시 돌려주겠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선 티켓을 빼지 않고 함께 주었다.

그리고는 고모를 만나러 갔다. 고모를 만나고는 KTX를 탔고, 서울에 도착해서는 집에 와 짐만 풀고 바로 레슨을 해야 했다.


돌아와서는 여독인지 뭔지 모를 감기에 시달리고 있다. 다행히 낮에 잡힌 연습이 취소돼 네 시간 동안 낮잠을 잘 수 있었다.

저녁엔 교수님과 식사를 했다. 2년에 한 번씩은 보는 것 같은데, 이번엔 교수님에게서 먼저 연락이 왔다. 교수님께 그간의 하소연을 털어놓았다. 그러다 죽는다며 걱정해주셨는데, 내가 느끼고 있는 몸의 이상 증후를 교수님은 이미 거친 후였다. 관절염이 있어 피아노를 오래 못 친다는 말씀과 쉼 없이 마른기침을 하는 교수님의 모습을 보니 섬찟했다.

오늘은 합치면 열네 시간이나 잤지만, 한숨도 잔 것 같지 않게 피곤하다. 머리도 몽롱하고 몸은 무겁고, 그래서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잘 모르겠다. 다행히 내일은 두 시에 나가면 된다. 두 시까지 빼곡히 자야 이번 주, 다음 주, 멀게는 다다음 주까지 버틸 수 있을 것 같다.


교수님을 기다리는데 '적당히 유명한' 오빠에게서 문자가 왔다. 나무와 풀의 기운을 줘서 고맙다는 말이었다. 같은 말을 몇 번이나 하는지... 그래도 계속 그 얘기를 해주니 기분이 좋다. 진심인진 모르겠지만, 사람들에게 나무와 풀의 기운을 줄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망해서 행복한' 이들은 뜬금없이, 계속, 내용 없는 문자를 보낸다. 그래서 몸은 여기 있는데, 마음은 그 바닷가 근처에 있는 것만 같다.

'망해서 행복한 사람들'에게 다양한 선물을 주고 왔지만, 그중에서도 읽던 책을 준 것이 오래 기억에 남는다. 다 읽은 것도, 안 읽은 것도 아닌 읽던 책... 그래서인지 부산에 무언가를 남기고 온 것만 같다. 같은 책을 사려다 마음을 접었다. 다시 만나게 되면 그 책을 받아야지. 그리고 우리가 함께했던 그 바다 근처에서 마저 다 읽고 와야지.

이렇게 다시 가야 할 이유를 만들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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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징있는 '오빠'들을 두루두루 만나고 계시는구나
싶은 생각이 절로 들면서
건강 잘 챙기시기를...

이 글 읽고 나니깐, 제가 만난 여자들은 저에게 무슨 태그를 붙여놨을지 궁금해집니다. ㅎ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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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사람들이네요.
그리고 좋은 교수님까지...

몸 챙겨야 하실 듯합니다. 생각이 많아서 잠을 자도 자도 피곤한지도 모르겠습니다.

적당히 허세있는 백수
새로운 인물이 등장했습니다^^
나무와 풀의 기운이 뭔지를 한 번 느껴보고 싶네요.
뭔가를 남기고 오는 여행도 좋겠네요.
말씀하신 다시 찾아갈 이유도 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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