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멸망의 징조.

in #kr-writing4 years ago (edited)

‘멸망의 징조’

목적지까지는 조금 돌아 가지만, 그 길은 보행자 전용 산책길이라 자동차, 오토바이, 자전거, 전동킥, 그리고 흡연이 금지되어 있기 때문에 언제나 그 길로 걸어간다. (물론 가끔 이런 규칙을 무시한 자전거와 전동킥이 들어오긴 하지만)

짙은 회색 구름이 하늘이 가득 덮었고 바람은 강하게 불어서 길 곳곳에는 인간들이 버리고 간 과자 봉지, 마스크, 비닐 조각 들이 을씨년스럽게 길 위에 굴러 다닌다. 공기가 꽤 무겁게 느껴진다. 세기말 혹은 ‘멸망’의 분위기가 물씬 난다. 이런 날을 꽤 좋아한다.

평소 이 산책길에는 강아지를 산책시키는 사람들이 많다. 날씨 때문인지 오늘은 사람도 개도 별로 없다. 그런데 인적이 드문 이 곳에 비글 한 마리가 혼자서 신나게 여기저기 냄새를 맡으며 이 곳을 뛰어다니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비글은 목걸이는 차고 있었지만 목줄은 없다. 그 주변에는 보호자로 보이는 사람도 없다. 지나는 사람들도 거의 없어서 그 개가 ‘자유’롭고 즐겁게 껑충껑충 뛰어다닐수록, 그 모습이 스릴러 영화의 한 장면처럼 기괴하게 보였다.

이 길 곳곳에 있는 안내판에는 개와 산책할 때는 반드시 목줄을 채워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과태료를 부과한다는 경고 문구가 있다. 이 길을 지나면서 보호자 없는 개가 저런 모습으로 다니는 것은 처음 보았다. 지나가는 몇몇 사람들도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 개를 쳐다본다. 보호자는 어디로 간 것 일까. 저 개는 어디에서 왔을까.

계속 길을 걷다가 또 평소에 볼 수 없었던 기묘한 광경을 목격했다. 바로 앞에 오는 50대 정도의 남자가 담배를 피우면서 ‘걸어’ 오고 있었다. 이 길을 다닌 지 꽤 오래되었는데 길가의 벤치 구석에서 담배를 피우는 모습은 몇 번 봤지만 이 길 한복판에서 ‘걸어가면서’ 담배를 피우는 모습은 처음 보았다.

오늘 이 거리는 뭔지 모르지만 기이하다. 잘 돌아가고 있는 기계가 부품이 하나둘 씩 낡고 부서지면서 서서히 고장 나기 시작하면 여기저기 삐꺽 대는 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어느 임계점에 도달하면 급작스럽게 무너져 버린다. 걷고 있는 이 거리의 공간 전체가 임계점에 도달한 ‘기계’ 같다. ‘보호자 없는 자유로운 개’, ‘길을 걸으며 담배를 피우는 남자’는 임계점이 바로 앞에 와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징조’로 보인다.

‘징조’는 미신 같은 것이 아니라 원인과 결과의 과정 안에 나타나는 실제적 현상이다. 예를 들어, ‘전설의 고향’ 같은 것을 보면, 남편을 전장에 보낸 아내가 면경을 꺼내 머리를 손질하는데 갑자기 쩍 하니 금이 간다. 아내는 이 현상을 ‘불길한 징조’로 받아들이고 남편에게 무슨 일이 났을까 걱정한다. 그 시간에 남편은 전사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남편이 전장에 나가기 전 날, 방 안에서 가볍게 미끄러져 면경 위에 넘어졌는데 등을 약간 삐끗했고, 그 작은 부상의 여파로 인해 적의 칼을 간발의 차로 피하지 못해 죽은 것이었다. 그저 ‘원인과 결과’였다.

작지만 ‘불길한 징조’로 느껴지는 현상은 무언가 잘못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원인이자 결과다. 내가 지금 걷고 있는 이 거리의 공간은 머지않아 무너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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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
가상의 이야기를 쓴 단편 소설입니다.
이 설명이 없으면 가끔 실제 이야기로 오해하시는 분들이 있어서 추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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