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를 떠나며...

in #kr-writing6 years ago (edited)

2018년 7월 15일은 아마도 내가 오래오래 기억하게 될 날 중 하나가 될 것이다.
그 날이 일요일이었다는 것도 아마 잊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오늘 15년을 다닌 회사의 내 책상을 정리하고 오래 사용했던 내 물건들을 정리하여 집으로 옮겨왔다. 예상으로는 조금쯤 슬프고, 허망한 느낌이 들려나 싶었는데, 실제로는 너무나도 아무렇지 않게 담담했다. 도와주겠다는 주변 직원들도 마다하고 그냥 하나하나 내 손으로 담고 버렸다. 그간 회사안에서 자리를 옮겨 앉을때 마다 그렇게도 많이 버리고 정리했다 생각했던 내 짐들은 박스로 세개나 되었다. 커다란 박스로 한박스 만큼의 버려야 하는 것을 만들었는데도 여전히 세박스나 되는 양이었다.

더 이상은 누군가가 살고 있다는 흔적이 없어진 책상, 그리고 그 옆에 덩그러니 놓여진 세개의 박스. 그것이 내가 15년을 일하고 남긴 흔적이었다.

누군가는 말했다. 어짜피 버티는 놈이 이기는 거라고, 그러니 버티면 된다고 재미가 좀 없어지면 어떻고, 비전이 좀 없어지면 어떠냐고. 나도 그렇게 생각을 했었다. 그래서 긴 시간을 내 두번째 회사인 이곳에서 그렇게 무던히도 잘 버텼다. 엔지니어에서 스페셜리스트로 팀장으로 수석부장으로 그렇게 남들보다 한발짝 씩은 빠르게 그렇게 성취라면 성취로 조금은 식상해지고, 정열이 사그라들어도 버텼다. 하지만, 모든 일에는 시작이 있는 것 처럼 끝도 있다.

주어진 대로 살았고 그 안에서 나름의 행복도 찾으려 애쓰며 살았다. 내가 바라보고 이루고자 했던 일들에 대해서 노력했고, 작으나마 성취도 이루었다. 그런데 그 동력을 그만 잃어버리고 말았다. 더 이상 앞으로 나가지지 않을 것 같은 벽이 가로 놓이고, 나를 움직이게 만들었던 일자체가 주는 순수한 즐거움이 사라졌다. 내 스스로 나를 일으켜 세울 힘을 발견할 수 없을때, 나는 그만 방향을 잃었다. 가슴이 뜨거워지는 일을 쫓을 만큼 젊은 나이는 아니지만, 좀비가 되어 거리를 떠도는 자신을 용납할 수 없음이다.

그만두겠다고 선언을 하고서 술자리에서 마주 앉은 이제는 절친이 된 나의 동료는 말한다. '그래도 우리 그렇게 미친듯이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놀았던 기억이 있어서 참 다행이지 않냐?' 참 여전히 좋은 이야기를 잘 하는 친구다. 과연 그렇다. 내게 남은 것은 승진해서 월급이 올랐던 기억도, 일을 잘했다고 상을 받았던 기억도 아니다. 과장 차장 시절에 '나라 구하겠다'는 소리 들어가며 정말 신나서 미친듯이 뛰어다니며 열심히 일했던 기억이다. 그런 기억이 남을 수 있는 것이 여전히 내겐 큰 행운이다. 젊은 날의 큰 한토막을 집어 넣었는데도, 여전히 뜨거웠던 기억이 없다면 인생의 도가니가 너무 쓸쓸하지 않겠는가.

이제 나는 놀것이다. 무엇을 할것인가에 대해서 생각을 하기 앞서 좀 놀아보려고 한다. 들고 있는 것을 내려놓아야 다음 것이 보인다. 아직 난 들고 있는 것을 다 못 내려 놓았다. 미련도 후회도 없지만, 그 안에 있었던 시간이 너무 길었던 탓이다. 내 마음속에 어느덧 파고 들어 있는 '배운 도둑질'을 털어 내고서야 다음이 보일 것 같다. 이제는 직장이 아닌 직업을 찾아 볼 수 있을 것 같다.

며칠 정도의 환송회들이 끝나면, 나는 다시 자연인으로 돌아간다. 법적으로는 2018년 7월 15일자로 자연인으로 돌아간다. 학교를 졸업하고 부터 회사를 옮길때에도 한달을 쉬어본 적이 없는 내가 완전히 '무적'상태가 된다. 어떨지 아직은 짐작이 안된다. 하지만, 작은 다짐은 있다. 이제 다시 가슴 뛰게 하는 일, 그리고 내가 매몰되지 않을 동반자 같은 일을 찾겠다는 것이다.

나의 이 도전 아닌 도전이 무모한 일로 기록되어 이 글을 후에 다시 보며 바보 같았음을 한탄 하게 될지도 모를일이다. 하지만, 여전히 내 앞에 놓인 인생은 길다. 인생 후반부에도 또 무엇인가 가슴 뛰는 일로 신나게 살아봐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야 훗날 나는 미련이 없었노라고, 후회없이 열심히 살았노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시간이 좀 흐른뒤 아직은 열지 않고 그냥 가져다 두기만 한 저 세개의 박스를 여는 날, 틀림없이 오늘 담담히 내 마음 밖으로 나오지 못했던 지난 기억의 아쉬움이 함께 열릴 것이다. 아직은 조금 두렵지만, 용기를 내어 저 박스들을 세상밖으로 꺼내온 나 자신에게 응원을 보낸다. 열심히 그리고 부끄럽게 살지 않았으니 된 것이라고.

Fin.


written by @travelwalk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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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즐거운 스티밋하세요!

수고많으십니다. 감사합니다

그 문을나서면 왠지 안될것같고 불안한 생각이 들지만 그 문을 나서는 순간 지금까지 보지못했던 새로운
세상이 기다리고 있을거에요.
말씀대로 편안한 휴식 시간을 보내시고 진짜 원하는
일을 하세요. 화이팅~!!

응원 감사드립니다. 하고 있던 일을 놓으면 갑자기 막 불안해지긴 하지만, 놓지 않으면 다른 것을 잡을 수 없는 일이니까요. 정말 재미있게 지내보려 합니다. ^^

용기에 감탄합니다.

^^ 감탄하실만한 용기까지야 되겠나요.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ㅎ

화이팅! 앞으로 잘될거예요. 응원합니다.

응원 감사합니다 ^^

오랫 동안 몸담았던 곳을 털고 나오면 잠시는 허전하겠지만, 맘 먹고 푹 놀아볼 생각이시라니 곧 행복해지시겠네요.
평생에 다시 없을 기회일 수 있으니 정말로 실컷 제대로 놀아보세요^^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긴 줄 알았는데 의외로 짧고 기회가 많은 줄 알았는데 의외로 기회가 없더라구요. ^^

내가 떠나면 내가 하던일은 잘 돌아갈까? 하며 떨던 오지랍도 백수생활 하루이틀 지나보니 깨닫게 되더라구요.. 세상이 잘만 돌아가고 있음을... 자유인이 될 것을 축하합니다!!

감사합니다. 차차님은 이미 자유인 이시니 선배로서 많은 조언 부탁드립니다 ^^

시간이 흐르고 꼭 오늘 결정을 스스로애게 잘했다고 말해줄 날이 올거라고 믿어요!
저도 은퇴를 결심하기 까지 복잡한 심정 꽤 긴시간을 보냈었어요..
내일은 아직 모르지만 트라밸 워커님 말씀처럼 더 이상 가슴뛰지 않는 일에 좀비처럼 시간 죽이는 일을 하고 싶지 않았던거죠...
천천히 세심하게 준비해서 2막 올리시길 응원할게요! 화이팅입니다!

이미 선배님이니 많은 조언 부탁드립니다. ^^ 인생 2막은 제가 꾸려갈 수 있는 것들로 채워지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ㅎ

여태 한번도 쉬지 못하셨던거니, 잠깐 쉼표 찍는다고 보시면 되지 않을까 합니다.ㅎㅎ 금방 또 다시 책상 찾으실꺼에요!

응원 감사합니다 ! ^^

nch1234님이 travelwalker님을 멘션하셨습니당. 아래 링크를 누르시면 연결되용~ ^^
nch1234님의 [미운앙마's][정보] - 7월 한국 (kr, kr-) 태그 포스팅수 순위 - (7월 1일 ~ 7월 13일 오전 2시 30분 기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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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의 삶을 응원합니다!

응원 감사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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