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담수첩] 1994년 어느 늦은 밤을 기억한다. 지난 여름날들을 기억하며.

in #kr-pen6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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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세대 주택에 살았던 1994년, 그날의 밤도 오늘만큼이나 더웠다. 바깥으로 나오실 용기를 가지시지 못했는지 모를 아버지를 뺀 엄마와 어렸던 동생과 나는 돗자리를 준비해 현관 앞 복도에 이불대신 돗자리를 깔고 잠을 청할 준비를 했다. 속옷바람에도 바깥으로 나올 용기를 가졌던 건 지금처럼 내 피를 빨아갈 모기가 없었음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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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이 노래를 들은적은 있었는지 몰라도 들었던 기억은 없다. 가사를 음미하며 듣기 위해 제목을 검색했다. 김현철이 글을 쓰고, 김동률이 곡을 썼다. 이 둘 조합의 노래를 들은적이 있었는지 몰라도 기억나는 노래는 없었다. 그 시절에는 누가 썼는지보단 누가 불렀는가만 기억했을테니까. 노래 속 어느 늦은 밤은 아마 가을이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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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부터 알던 밴드였지만 이렇게 노래가 좋은지 몰랐었다. '불후의 명곡'이란 프로그램을 통해서 알았을텐데, 선배들의 노래를 커버할 때 보다 그들이 직접 쓴 노래를 들으니 더 가슴을 후벼판다. 이번 뜨거웠던 밤들에, 술을 한 잔 걸치고 들어온 날은 자기전 이 노래를 찾아 듣고 또 들었다. 이 노래가 듣기 좋았다면 'She'도 찾아 들어보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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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에 살고 있는지 아파트형 공장에 살고 있는지 모르겠다. 아파트 네모 상자에 둘러 싸인 정자에 앉아 있으면 실외기의 바람개비 돌아가는 소리가 가득하다. 아파트 네면 중에 두 면만에 실외기가 붙어 있어 그나마 소리가 덜 할 것이다. 지난주에는 외숙모네 아파트가 뉴스에 나왔다. 과부하가 걸린 변압기가 고장나 정전이라는 소식이었다. 그 집 식구들도 걱정됐지만, 그 집 냉장고 안의 것들도 걱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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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처럼 에어콘을 창조해 주신 캐리어 아저씨에게 감사한 적이 없다. 이렇게 에어콘을 틀고 산 날이 있을까 싶다. 다음달 전기세 걱정은 작년까지만 해도 엄마만의 것이었는데, 올해는 모두의 것이 돼버렸다. 그래도 실외기 바람개비를 멈출 수가 없다. 지금 사는 집으로 이사오며 전에 살던 주택에 놓고 온 벽걸이 에어콘이 너무 아쉬운 여름이다. 엄마는 내 방에 놓기를 권했는데, 아버지는 에어콘 없이 사는 옆집에 주자고 했다. 나도 그러자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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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를 제대하고 첫 알바는 에어콘 A/S였다. 브랜드는 에어콘 창조주의 회사였다. 국내 대기업의 as센터에서 일해본 적은 없지만 그들보다 덜 체계적이고 더 야매적인 센터였다, 내가 일했던 곳은. 습기 가득한 지하의 사무실로 출근하면 모니터에는 덥다고 아우성되는 고객들의 목소리가 가득했다. 대부분의 민원은 '바람은 나오는데 시원하지 않아요'

에어콘이 시원하지 않은 이유는 냉매 가스가 어딘가에서 셌거나, 증발기에 때가 꼈거나, 실외기에 먼지가 가득 낀 경우였다. 그 외 콤프레샤같은 큰 부품이 고장났다면 에어콘을 새로사기를 권했다. 증발기에나 실외기에 때가 낀 경우는 주택이 아닌 곳이 대부분이었다. 캐리어는 주택보단 식당에서 더 많이 마주치니까.

문제는 냉매 가스였다. 실내기와 실외기를 연결하는 동관에 문제가 없다면 자체적으로 냉매 가스가 소멸하는 일은 절대 없다. 그런게 그걸 아는 사람들이 그때는 많지 않았다. 시원하지 않으니 고객 스스로 원인을 진단하고 냉매 가스를 보충해주기를 원했다. 실외기에 가스 압력계를 연결해보면 안다. 가스가 세고 있어서인지 아닌지는.

아저씨는 야매였다. 시원하지 않으니 돈을 지불하고서라도 가스를 보충해달라는 고객의 말을 철저히 따랐다. 충분했던 가스는 압력계의 다른 호스로 서서히 빠져가고, 나는 아저씨의 호출에 트럭으로 가, 냉매 가스통을 들고 왔다. 싸기라도 했을까? 3-5만원의 돈은 현금으로 쥐어주기에 적당한 금액이었고 그 돈은 본사를 거치지 않고 고스란히 아저씨의 주머니로 들어갔다.

아저씨는 그 외적으로는 다 좋았다. 밥 두 공기를 먹어도 뭐라 말 하지 않았고, 월급도 두둑히 제때 주었다. 휴가는 왜 안가냐며, 이번주 금토일은 쉴 테니 휴가 가라며 용돈도 두둑히 챙겨주셨다. 그렇게 여름이 끝나가고 나는 학교로 복귀했다. 개강총회가 있던 날 아저씨에게 전화가 왔다. 더위가 길어져 일이 바쁜데 주말에 도와줄 수 있겠냐고. 많지 않은 과제를 핑계로 아저씨의 호출에 불응했다.

그때는 아저씨의 만행?을 알리지 않고 받아가기만 했던 내 자신이 미웠는데, 세상에 어디 그런 것이 한둘이었을까 생각한다. 잘 모르면 호구된다는 것이 과연 맞는 말일까. 소멸되지 않을 충분한 가스를 빼내 다시 충전해서 받아가는 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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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달 전기세가 걱정이다. 기업들은 좋겠다 누진세 뜯겨 갈 걱정하지 않아도 되니 말이다.

오늘의 교훈 : 에어콘 냉매 가스는 동관에 구멍이 나지 않는 이상 절대 없어지거나 소멸되지 않아요. 기사 아저씨와 함께 아저씨가 들고 있을 냉매 가스 압력계를 같이 확인하세요. 정확한 수치는 기억나지 않으나, 적정 수치가 있을겁니다. 본사에 전화해서 확인 할 일 없는 A/S가 많아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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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용한 정보로군요.

다핑님 오랜만이시네요! 여름 잘 나시고 계신지 모르겠습니다.

무아지경 뛰놀던 시절이라 그리 더웠는지 기억나진 않지만;; 94년이 더웠다고들 하길래 찾아보니 갑술년 이때도 건조한 땅의 기운이 강한 해였네요.

저도 한창 뛰어놀 때인데 밤에 잘때 더웠던 거는 기억에 남아요.
명리학에도 나오나 보네요. 더위는 언제쯤 내려갈지 ㅠㅠ

헐,,, 이런 고급 정보를.... ㅋㅋ... 여태 몰랐네요..
누진세 뜯기지 않을 기업들,, 슬픈 얘깁니다.

모르는분들이 많으시더라구요.
누진세 기업에 좀 넘겨주면 좋으련만...

저도 다음 달 전기세가 걱정입니다 ㅎㅎ
잔나비 정말 매력적인 밴드죠! 저도 넘 좋아해요-
덕분에 오랜만에 듣네요 :)

여름 한철이라도 누진률을 좀 낮춰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잔나비 흥했으면 좋겠습니다. 이미 아시는 분들은 다 아시겠지만요 ㅎㅎㅎ

노래 너무 잘 들었습니다. 에어컨 냉매가스 이야기는 새롭게 알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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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좋은 정보였으면 좋겠어요 ^^

캐리어가 에어컨 발명가의 이름이었다니!

페라리도 엔쵸 페라리 할배가 만들었어요!ㅎㅎㅎ

에어콘 정말 희대의 발명품이네요. 지구 온난화에 대비해 인류가 붙잡을 지푸리기라고 할까요. 우리집도 전기세가 염려됩니다. ㅎ

정말 희대의 발명품입니다...사람 시원하자고 온난화를 더 부추기는 건 아닌지 모르겠어요 ㅎㅎㅎ
정말 이렇게 에어콘 들고 산 적은 처음입니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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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처음으로 에어컨을 발명해준 캐리어에게 감사를 하게 됐어요~~ ^^

이제는 에어콘 없는 여름 상상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

선생님!2번이 2갠데요
👀💦

여사님 매의 눈이시네요! 감사합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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