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일기] 에브리맨, 사람은 언젠가 죽는다

in #kr-pen6 years ago (edited)

나는 그때 열한 살이었다. 아마 신발주머니를 앞뒤로 흔들며 신나게 하교하는 길이었을 것이다.
살던 아파트 동 앞에 다다르자 엠뷸런스 불빛이 먼저 보였다. 사람들이 웅성대며 모여 있었다. 그 무리에 가까이 가 보니 화단에 누군가 누워 있었고 흰색 천이 그 사람의 머리에서부터 덮여져 있었다. 다른 곳은 하나 보이지 않고 천 밖으로 삐져나온 발 일부분이 보일 뿐이었다.
그 사람은 들것으로 엠뷸런스에 실렸다. 차가 떠날 때까지 나는 그 자리를 뜨지 못했다. 차가 떠나고 모여 있던 사람들이 흩어질 때쯤 집으로 올라갔다. 무슨 일이냐고 몇 번을 물었지만 엄마는 제대로 답해주지 않았다.
그날 우리 집에 찾아온 경찰들과 부모님의 대화를 듣고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추측할 수 있었다. 화단에 누워 있던, 아니 쓰러져 있던 사람은 앞집 아저씨였으며 부부싸움 끝에 화를 못 이겨 뛰어내렸다고 했다. 9층에서. 경찰은 부모님에게 앞집 부부가 싸우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냐고 물었고 부모님은 듣지 못했다고 답했다.

사람이 죽을 수 있다는 걸 처음 실감한 날이었다. 또 어떤 사람은 스스로 죽을 수도 있다는 것도 알게 됐다. 그 이후로 죽음은 하나의 실체가 되어 나를 쫓아다녔다.
죽은 후의 세상에는 무엇이 있는지 궁금해했고 죽기 싫다며 울었다. 죽은 후에 어떠한 세상도 없을까 봐 두려웠다. 가만히 누워 생각을 없애며 죽음을 상상해 보기도 했다. 그리고 또 울었다.

부모님은 그런 내 모습을 볼 때마다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학교 담임선생님은 교회에 다녀야 한다고 했다. 그래야 천국에 갈 수 있다고. 하루는 예수가 있다는 걸 증명해 보이겠다고도 했다. 나는 방과 후에 교실 남아 의자 위에 눈을 감고 섰다. 선생님이 뭐라 뭐라 말했고 내가 쓰러졌다. 그것으로 예수가 있다는 게 증명된 거였다. 선생님은 교회를 다니지 않으면 죽어서 지옥에 간다고 말했다. 그 말이 통 믿기지 않아서 서예부 선생님에게도 물어봤는데, 그 선생님도 같은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누군가를 소개도 시켜줬다. 교회 사람이었다. 그 사람을 만나서 이러저러한 이야기를 들었는데, 길게 말하지 않겠다.

그 시절 내게 조금 더 차분하고 진지한 자세로 삶과 죽음에 관해 이야기해 줄 수 있는 어른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인간에게 죽음의 때가 찾아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그것으로 인해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고, 대신 어떻게 살 것인지 차근히 생각해 보자고 말해 주는 사람이 있었으면 어땠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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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생각해 보면 사춘기가 좀 이른 시기에 왔던 것 같다. 그 시절을 보내고 나는 전보다 소극적이고 어두워졌다.
그 이후로 나는 여러 번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황망한 죽음을, 조금 더 늦게 찾아왔으면 좋았을 죽음을 접했다. 그리고 죽음이라는 게 생각지도 않던 때 불쑥 찾아온다는 것도 알게 됐다. 가까운 사람이, 내가 알던 누군가가 이 세상을 떠난다는 건 다른 무엇보다 슬픈 일이었다.
필립로스의 소설 <에브리맨>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데, 내 이야기만 벌써 이렇게 길다. 아마 <에브리맨>의 주제 의식이 인간이라면 피할 수 없는 삶과 죽음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리라.

<에브리맨>은 한 사람이 늙고 병들어 죽는 이야기다. 소설은 주인공의 장례식에서부터 시작된다. 가족, 동료, 친구들이 모였고 그들은 주인공의 생전 모습을 회상한다. 그렇게 장례식에서부터 주인공의 삶이 반추되며 그가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주인공이 어렸을 적, 아버지는 '에브리맨'이라는 보석가게를 운영했고 가정은 유별난 점 없이 행복했다. 그리고 성인이 되어 그는 세 번의 결혼과 이혼을 했다. 세 번의 결혼생활은 모두 실패로 끝났다. 그는 남편으로서 아빠로서의 역할에 충실하지 않았고 다른 여자에게 매혹됐고 사랑을 나눴다. 그는 꽤 괜찮은 능력을 지니고 있는 광고인이었고 여자들에게도 인기가 많았다. 그랬던 그가 어느덧 늙고 병들어 활력을 잃어간다. 전처럼 남성으로 기능하기 어려웠고 활동적인 생활 방식을 고수할 수 없었다. 몸과 함께 마음까지 피폐해져 갔으며, 유일하게 자신의 편이었던 (건강한) 형에게 질투의 감정을 느껴 사이를 망치고 만다.

노년은 전투가 아니다. 노년은 대학살이다. (162p)

노년은 전투가 아닌, 대학살로 묘사된다. 그는 노년기에 이르기 전 당연했던 것들을 한순간에 잃게 되었고 그제서야 잃어버린 것들(예를 들면 가족 같은)을 되찾아 보려 한들 아무 소용이 없었다. 완벽하게 혼자가 되었단 느낌을 받은 주인공은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노인들을 위한 그림 클래스를 운영하면서 약간의 흥분되는 만남도 기대하는데, 그런 일은 생길 리 만무했다. 클래스에 나왔던 한 여성 노인은 병으로 얻은 고통을 이기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그는 그 노인의 죽음을 접하며 두려움을 느낀다.

하지만 사람이 어떻게 자발적으로 충만함을 버리고 그 무한한 무(無)를 선택할 수 있을까? 나라면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그냥 차분하게 누워 작별 인사를 할 수 있을까? (170p)

소설에서 주인공의 죽음은 서두에 제시됐기 때문에, 시간의 흐름에 따른 이야기는 그가 죽음으로 한 발짝 다가가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대단한 무언가가 아니다. 필립로스는 이미 소설의 제목 ‘에브리맨’에서 모든 걸 암시한다. 이건 그냥 평범한 사람이 늙고 병들어 죽는 이야기라고.
주인공은 자신이 죽음에 다가가고 있음을 예감하지만, 그 끝이 언제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는 이미 한 번 왼쪽 경동맥 수술을 받았고 오른쪽 경동맥 수술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마취의가 국부마취와 전신마취 가운데 어느 쪽을 원하느냐고 물었을 때, 전신마취를 부탁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는 그렇게 다시는 깨어나지 못했다.

그는 쓰러지는 것과는 거리가 먼, 불길한 운명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느낌으로, 다시 충만해지기를 갈망하며 밑으로 내려갔지만, 결국 다시 깨어나지 못했다. 심장마비. 그는 이제 없었다. 있음에서 풀려나, 스스로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어디에도 없는 곳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처음부터 두려워하던 바로 그대로. (188p)

인용한 부분이 소설의 끝이다. 이름 없는 주인공은 태어나서 살다가 죽었다.
앞서 내 사춘기 시절에 삶과 죽음에 관해 차근히 이야기해 줄 어른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썼다. 지금의 내가 그 시절 나를 만난다면 어떤 이야기를 해 줄 수 있을까. 이 책이라도 건네어 읽어 보게 할까?
그러지 않을 것이다. <에브리맨>은, 유한한 시간을 행복하게 살자, 고 이야기하는 소설이 아니다. 그저 ‘우리 모두 언젠가 죽는다’고 강조할 뿐이다. 짧고 직설적인 이야기다.
주인공의 노년은 심지어 우스꽝스럽게 묘사된다. 외로움에 떨며 잃어버린 것들을 찾아보려 했을 때, 모든 건 뒤늦고 말아 있었다.

“엄마, 아빠, 하위, 피비, 낸시, 랜디, 로니…… 어떻게 해야 하는지 방법만 알았다면 좋았을 것을! 내 말 안 들려? 나 떠나고 있다고! 다 끝났고, 나는 이제 당신들을 모두 다 떠나고 있어!” 그가 그들에게서 사라지는 것과 똑같은 빠른 속도로 자신에게서 사라지고 있는 그 사람들이 고개만 돌려, 너무나 의미심장하게 소리쳤다. “너무 늦었어!” (171p)

나는 이 소설을 두려움으로 읽었다. 그 두려움은 주인공에게 동질감을 느끼는 데서 비롯했다. 죽음이라는 운명을 피할 수 없는 존재에 느끼는 동질감.
나는 눈을 감을 때 얼마나 후회하게 될까 짐작해 보는 두려움. 뜨거움.

몇 해 전 읽었던 것을 최근에 다시 읽었다. 그땐 이 소설이 그리 감동적이지 않았는데 다시 읽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읽고 나서 뭉클해져 오는 슬픔이 있었다.
몇 해 전 다른 사람들과 함께 이 소설을 읽고 노트에 정리해 둔 메모가 있다. 그게 마음에 와 박힌다.

인생의 7할은 운이다.
행운, 불행 무차별적으로 아무에게나 쏟아져.
나는 다르다, 특별하다는 생각은 현대인의 나르시시즘
겸허하게 욕심부리지 않고 ‘건강’ 하나에도 감사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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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을 사는 우리는 나이를 먹어도 간달프가 되기 힘들죠. 필요한 때 필요한 말을 해 주는 어른의 상은 미디어가 만들어낸 환상에 지나지 않다고 봅니다. 다들 처음 살아보는 삶이기에...

저는 종종 힘들거나 할 때, 듣고 싶은 말을 해 줄 수 있는 어른을 찾았던 것 같아요. 그러고보니 다들 처음 살아보고 마지막으로 살아보는 삶이네요. 처음이자 마지막이라 힘든 것 같아요. 좋은 댓글, 더 생각하게 하는 댓글 감사합니다..!

죽음에 대한 고민으로 시간을 너무 많이 낭비한 이후,
죽기 전까지는 삶만 보면서 살기로 했습니다.
죽음에 대한 고민은, 죽기 직전에 잠시만 하면 그만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혹은, 대부분의 죽음은 말씀처럼 그런 고민을 할 시간조차 없을 테니까요.

ps

님, 정작 제일 중요한 'kr' 태그를 빼먹으셨습니다.

삶만 보면서 살아도 정말 짧은 시간이겠죠. 좋은 댓글 감사합니다. ^^ 그리고 태그 수정도 했어요. 감사합니다..!

죽음~~~~~~~~"우린 모두 언젠가는 죽는다" 정말 겸허하게 욕심 부리지 않고 건강하게 살아야겠습니다 .

저도 그런 생각으로 살려고 하는데, 쉽지가 않네요. 욕심 부리게 되고 질투하게 되고 끝도 없습니다. ㅎㅎ 댓글 감사하고 반갑습니다.

도입부를 읽는데 소설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네요 책에 대한 꼼꼼하고 재밌는 감상문으로 꼭한번 읽어보고싶다는 마음이 들어요 저도 언젠가 죽을 것만 같은 두려움을 붙들고 하루 하루를 살던 때가 있었습니다 특히 자동차 옆 보조석에 앉아있을 때면 늘 갑자기 사고가 나 죽으면 어떡하지 하는 생각에 사로잡혔습니다 지금은 많이 좋아졌지만 여전히 마음이 편치않을 때가 많습니다 ㅎㅎ 언젠간 극복하겠지요 좋은 글 읽고 팔로우하고 갑니다~:)

댓글들을 보니 많은 사람이 저와 같은 두려움을 안고 사는 것 같네요. 그런 의미에서 반갑습니다. 그리고 처음 뵙는 것도 반갑습니다~ 댓글 감사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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