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 그리고 ‘사일런스’ ” - ‘침묵’의 ‘역사 균형감’인가, ‘사일런스’의 ‘신앙의 좌절’인가...

in #kr-movie6 years ago

‘침묵’, 그리고 ‘사일런스’ ”

  • ‘침묵’의 ‘역사 균형감’인가, ‘사일런스’의 ‘신앙의 좌절’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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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신앙, 또는 종교에 대해 관심이 없었다. 소싯적에 절간에 한번 들어가 볼 생각은 한 적은 있지만 집안 어른 중에 스님이 계셨던 가풍의 불교에 대한 친숙함과 그 나이 때의 가벼운 치기에 불과했다. 더구나 17세기 도쿠가와 막부가 성립된 후 일본에서 벌어진 대대적인 기독교도 박해에 대해 관심을 가질 딱히 이유도 없었다.

종교적 박해, 가톨릭교에 대한 박해는 조선사회에서도 부지기수로 발생하지 않았는가. 19세기만 해도 1801년의 정조 사후 그를 이은 순조의 수렴청정(垂簾聽政)을 맡았던 정순대비(貞純大妃) 세력에 의한 정조에 의해 육성되었던 남인계열 등의 관료세력을 탄압하기 위한 ‘신유박해(辛酉迫害)’가 있었다. 1839년에는 어린 헌종이 즉위하자 순조의 비(妃) 순원왕후(純元王后)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자 그의 오빠인 세도가 안동 김씨의 김유근(金逌根)이 세례교인임을 빌미로 시파(時派)인 안동 김씨로부터 권력을 탈취하려는 벽파(僻派) 풍양 조씨들이 일으킨 ‘기해박해(己亥迫害)’가 있었다. 1846년에는 최초의 조선인 신부인 김대건 신부 등이 희생되었던 ‘병오박해(丙午迫害)’가 줄을 이었다.

결국 1866년에 흥선대원군은 ‘병인박해(丙寅迫害)’가 일으켜 9명의 외국인 신부와 약 8천 명의 신자들이 대량 도륙되었다. 흥선대원군 정권은 함경도 국경지대에 출몰한 러시아 세력의 남하를 견제하기 위해 프랑스의 힘을 빌리고자 당시 국내에 있던 프랑스 신부들과 접촉했었다. 그러나 그것을 빌미로 흥선대원군의 반대파들의 비난이 들끓자 아예 가톨릭 교세의 뿌리를 뽑는 대규모 박해로 나섰던 것이다. 그리고 성격이 전혀 다르지만 1901년 제주에서는 국가권력으로부터 징세권을 위임받은 가톨릭교도들이 행패를 일삼자 토착세력을 대표하는 ‘이재수(李在守)’ 등이 무장봉기를 일으켜 약 500명 이상의 가톨릭교도들이 도륙된 사건을 ‘신축교난(辛丑敎難)’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렇듯 종교박해는 다른 종교들 간의 다름에서 오는 그 자체의 갈등보다 정치와 경제, 사회 등의 권력과 이해관계가 상충되면서 그것을 이용하고 조장하는 세력들에 의해 부추겨져 탄압과 학살로 이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17세기 일본에서의 벌어진 가톨릭교에 박해도 그런 맥락을 벗어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일본에서의 가톨릭 박해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는 순전히 거장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영화 ‘<사일런스(Silence, 2016)>’ 때문이다. 스콜세지 감독 작품의 대표적인 키워드는 ‘이탈리안’과 ‘뉴욕’과 마피아 등의 ‘범죄’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런 그가 종교영화를 만들었다. 물론 스콜세지 감독은 ‘니코스 카잔차키스’ 원작을 각색한 문제작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1988)>과 ‘달라이 라마’의 행적을 다룬 ‘<쿤둔(1997)>’을 연출하여 종교영화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스콜세지 감독의 종교, 특히 가톨릭에 대한 의식은 역시 성장기와 관련이 있다. 가톨릭교도가 대부분인 이탈리아의 가난한 이민자 집안 출신으로 뉴욕 빈민가에서 어린 시절과 청소년기를 보냈다. 그는 빈민가 한가운데 외딴섬처럼 자리 잡은 성당의 성스러움과 바깥세상의 속물스러움이 혼재돼 있음을 보며 “성당 밖에 차고 넘치는 고통과 사악함을 변화시키거나 구원할 수 없다면 종교가 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혼란스러웠다고 한다. 이 경험은 그로 하여금 평생 종교의 존재 의미에 대한 의문을 던지게 했다.

1988년, 뉴욕 대주교 ‘폴 무어’ 신부는 스콜세지에 1966년 처음 출간되었던 ‘엔도 슈사쿠(1923~1996) ’의 소설 <침묵>을 건네주고 영화로 만들면 어떻겠냐고 제의했다. 일본의 기독교 사상가이자 소설가로 군림하는 인물로 <침묵>은 그의 대표작이고 여러 번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되엇다. 슈사쿠의 소설 <침묵>에 매혹된 스콜세지는 영화 제작에 착수했지만 판권문제 등의 난항으로 쉽게 영화화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스콜세지 감독은 2007년 소설 <침묵> 영문판의 서문을 쓸 만큼 애정을 쏟았다. 드디어 30년이 가까운 2016년에야 주요 배역에 ‘앤드류 가필드’, ‘리암 니슨’, ‘츠카모도 신야’ 등 널리 알려진 배우들을 캐스팅하여 영화를 완성할 수 있었다. 이미 소설 <침묵>은 1971년 ‘시노다 마사히로’ 감독에 의해 동명 영화로 제작됐었다.

<침묵>의 그 무엇이 스콜세지 감독의 그 오랜 세월 사로잡았을까.
일본에서는 가톨릭교도들을 ‘크리스트’의 발음의 일본식 발음에 따라 ‘기리시탄’이라고 한다. <침묵>은 소설의 형식을 빌었지만 바로 이 기리시탄들의 참혹했던 삶의 역사를 다루는 ‘역사서’로서 충분히 의미와 가치를 작품이다. 종교를 통해 투과된 한 시대와 역사를 살아야했던 분자화된 개별인간들의 생동하는 감정과 호흡과 번민이 절절하게 느껴진다.

일본 가톨릭 역사, 기리시탄의 역사는 1543년 중국 명나라로 가던 포르투갈 선박이 난파하여 풍랑에 떠밀려 일본 규슈에 상륙하면서 시작됐다. 당시는 서양인들에게는 중요한 인도와 중국 등 동방과의 향료무역이 오리엔트 세계를 장악한 이슬람세력에 방해를 봤자 아시아로 가는 신항로를 발견하기 위한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선도하는 이른바 ‘대항해시대’가 개막되고 있었다.

1488년 포르투갈의 항해사 ‘바르톨로뮤 디아스’가 아프리카 대륙 남단의 희망봉을 발견했다. 그리고 1498년에는 포르투갈의 ‘바스코 다가마’가 드디어 인도에 상륙했다. 이에 앞서 스페인의 후원을 받는 이탈리아인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서인도 제도에 발을 디뎠다. 스페인은 필리핀 마닐라에 무역기지를 건설했고, 포르투갈은 인도 고아를 장악하고 계속 동진하여 포르투갈은 중국대륙 ‘마카오’까지 교두보를 확보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아시아 진출은 무역을 이익창출이 기본 목적이기도 하였지만, 유럽에서 종교개혁운동으로 그 위상이 흔들리고 있던 가톨릭의 전파에도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현지인들의 이슬람, 힌두교, 유교 등의 오랜 종교적 전통과 문화와 충돌을 빚는 경우가 다반사였고, 반발하는 현지 세력을 무력을 동원하여 학살하는 경우들도 빈번하게 발생했다.

포르투갈 인들이 도착했을 때 당시 일본은 전국시대(戰國時代)의 혼란기로 영주들, 즉 ‘다이묘’들 간의 패권을 장악하기 위한 피비린내 나는 쟁투가 점입가경으로 벌어지던 시절이었다. 일본의 영주들은 난파한 선박의 포르투갈 인들이 지니고 있던 신무기인 서양의 ‘철포’, 즉 ‘조총’에 관심들이 집중됐다. 조총은 삽시간에 널리 퍼져 영주들의 군대는 조총으로 무장했으며 전국시대의 전술, 전략에도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또한 영주들은 다른 영주들보다 정치적, 군사적, 경제적 우위를 점하기 위해 영주들은 특히 규슈지방을 중심으로 포르투갈과의 무역에 집중했으며 무역이 확대되면서 이 와중에 가톨릭교회는 본격적으로 일본에서의 포교 활동에 나섰다.

1549년 ‘예수회’ 소속의 신부 ‘프란체스코 사비에르’가 선교를 목적으로 처음 일본 땅을 밟았다. 사비에르는 포교허가를 받기 위해 일본 천황이 살고 있는 교토까지 들어갔다. 비록 공식적인 허가를 받는데 실패했지만 규슈지방을 중심으로 영주들의 전폭적인 후원까지 받으며 가톨릭의 교세는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세례를 받은 ‘세례영주’들까지 출현했고, 곳곳에 교회와 신학교, 수도원 등이 건설됐다. 소설 <침묵>이나 영화 <사일런스>에서는 일본 내 기독교도, 즉 기리시탄의 수가 약 30만에 달했다고 하지만 다른 기록에서는 75만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러나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87년 기독교의 포교를 금지하는 조치를 내린다. 애초 신 앞에 만인의 평등하고 독립된 자아와 인격에 대한 기독교의 교리는 일본의 봉건적 신분제와 전통적 도덕관을 부정하는 것으로서 배치되었다. 전국시대 혼란의 와중에서는 각 다이묘들이 막대한 이익을 얻을 수 있는 서양세력과의 무역의 효과는 더불어 이루어진 가톨릭 전파를 무마하고도 남았으나 다이묘 세력들을 통제해야하는 도요토미 통일 정권에서는 규제에 나섰고, 가톨릭의 포교활동을 금지시켰던 것이다. 이는 도요토미 정권만이 서양세력과의 무역을 독점하고자 하는 의도였으며 금지령을 내렸음에도 가톨릭의 선교활동은 크게 타격을 받지는 않았었다.

그러나 159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고 남은 도요토미 세력의 일전이었던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승리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에도막부가 성립되면서 사정은 달라졌다. 도요토미의 잔당 쪽에 가톨릭교도가 많다는 것을 명분으로 삼아 선교사와 신자들을 탄압하는 정책으로 바뀐 것이다. 1612년 발표된 가톨릭 금교령은 에도, 오사카, 교토에 적용되었고, 이듬해는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금교령 발표 이후 이에야스는 모든 백성들이 불교의 신도가 되도록 하였으며, 가톨릭을 믿고 있던 이들에게도 신토(신도:神道)나 불교로의 개종을 강요하였다. 이어 1616년에는 유럽인의 거주·무역 지역을 히라도와 나가사키 일대로만 한정하였다. 이어서 1624년에는 선교사의 활동에 가장 깊이 관련하고 있던 스페인 선박의 내항을 금지하고, 1633년에는 막부의 허락을 받은 선박 이외의 일본선박들의 해외도항을 금지시켰다.

게다가 1635년에는 일본인의 해외도항과 재외 일본인의 귀국을 전면적으로 금지시켰다. 또 이제까지 제한하지 않았던 중국선의 내항도 나가사키의 한 곳으로 제한하고 이듬해에는 포르투갈인을 나가사키항내에 만든 인공섬인 데지마(出島)로 이주시켰다.

1639년에는 포르투갈선의 내항을 전면 금지하였고, 대일무역의 주력이었던 포르투갈이 일본을 떠나게 되었다. 1641년에는 유럽인으로서는 유일하게 남은 네덜란드 인을 히라도 상관(商館)에서 나가사키와 데지마(出島)로 옮기고 일본인과의 교류를 금지하였으며 나가사키 봉행(長崎奉行)의 엄격한 감시를 받게 하였다. 이로써 쇄국은 완성되었다.
이런 와중에 1637년 규슈의 시마바라(島原)와 아마쿠사(天草)지방에서 가톨릭교도를 중심으로 하는 반란(시마바라의 난)이 일어났다. 시마바라, 아마쿠사 두 지방의 영주가 가톨릭교도들을 심하게 탄압하고 세금을 과하게 부과하는 등 폭정을 행사하자 견딜 수 없게 된 시마바라의 민중이 무장봉기했다. 그리고 뒤이어 아마쿠사 농민들도 일어났다.
민중이 아마쿠사와 시마바라 대부분을 점령했지만, 막부에서 토벌을 위한 12만 대군을 파견하자 두 지역의 3만 7천여 명이 시마바라의 남단에서 바다를 등지고 있는 폐성인 하라성에 진을 치고 저항하였다. 성안의 높은 곳에는 나무십자가가 세워지고 성벽에는 십자가나 성상을 그린 깃발이 내걸렸다. 그러나 1639년 2월 28일 진압되고 반란군들은 전원 참혹하게 학살당했다.

소설과 영화의 <침묵>, <사일런스>는 바로 이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 신부들과 신도들이 학살당하거나 배교를 강요당하는 사태에 포르투갈 출신으로 예수회 관구장을 맡는 등 명망 받는 ‘페레이라’ 신부가 실종된다. 그가 배교했다는 소문까지 전해지면서 그 진의파악에 나선다. 페레이라 신부가 소속되었던 포르투갈의 ‘예수회’에서는 그의 제자들이었던 ‘세바스티안 로드리고’와 ‘프란치스코 가르페’, ‘호안테’ 등 세 명의 젊은 신부들을 일본으로 파견한다.

이들이 포르투갈 리스본을 떠난 건 1638년의 3월이었다. 대서양을 종단해 아프리카 최남단 희망봉을 걸쳐 인도의 포르투갈령 고아까지 험난하고 길고긴 고통의 여정이었다. 이들이 고아에 도착한 건 10월이었다. 그러나 이들을 일본으로 데려다 줄 포르투갈 선박이 없었다. 고아에서 시마바라의 반란이 진압된 소식을 접했고 반란의 배후에 포르투갈이 관련됐다는 이유로 포르투갈과의 교역이 단절하고 모든 포르투갈 선박의 입항을 금지했기 때문이었다.

이 세 사람은 일본과 가장 근접한 포르투갈령인 중국 마카오로 이동한 것이 이듬해 5월이었다. 그곳에서 비밀리에 일본으로 들어가는 배편을 구하기 위함이었다. 드디어 중국 정크선을 수소문 끝에 간신히 구해 로드리고 신부와 가루페 신부가 출발한다. 같이 출발했던 호안테 신부는 말라리아에 걸린 탓에 마카오에 잔류했다. 이들의 일본행에는 ‘기치지로’라는 일본인이 길잡이로 동행했다. 기치지로는 풍랑으로 조난을 당해 마카오까지 흘러들어온 인물로 사실은 가톨릭 신자였던 그는 박해로 배교를 했던 자였다.

로드리고 신부와 가루페 신부는 나가사키 근방의 한 섬에 상륙했다. 그들은 기치지로의 안내에 힘입어 근처 마을에 살며 비밀리에 신앙생활을 영위하던 신자들을 접촉하는데 성공한다. 이들이 바로 ‘카쿠레 기리시탄’, 즉 ‘숨은 크리스트’ 신자들의 원조들이었는지 모르겠다. 이들은 미사를 집전하는 신부들이 탄압으로 죽거나, 체포되거나 추방당하자 스스로 비밀조직을 만들어 신앙생활을 지속하고 있었다. 어쩌면 당시 일본 땅에서 거의 유이한 신부들이었을지 모를 로드리고 신부와 가루페 신부는 은밀하게 목회활동을 벌이고 틈틈이 페레이라 신부의 소식을 탐문한다.

그러나 누군가의 밀고로 일본 관아의 추적을 받는다. 결국 마을주민들의 신앙생활은 탄로가 나고, 성화에 침을 뱉고 성모 마리아를 매음부라고 말할 것을 거부한 마을의 신앙지도자격인 두 명이 수책형(水磔刑)으로 처형된다. 당시 배교 의식은 신자인가를 확인하기 위해 십자가 못박힌 예수의 성화나 성모마리아가 새겨진 성화상을 짓밟아보게 하는 후미에(繪踏)를 실시하는 것이었다. 수책형은 바닷가에 기둥을 세워 죄인들을 묶어놓고, 밀물 때 목만 남기고 몸이 물에 잠겨 며칠 후면 고통 속에 죽음을 당하는 가혹한 형벌이었다.

이에 신변의 위험을 느낀 로드리고 신부와 가루페 신부는 어느 한 사람이 잡혀도 선교활동을 보전하기 위해 따로 활동하기로 하고 헤어진다. 그러나 로드리고 신부는 은전 몇 닢에 팔린 기치지로의 밀고로 관병들에게 체포된다. 이제 그를 기다리는 건 순교가 아니라 가혹한 배교의 압박이었다.

당시 에도막부의 직할령이기도 했던 나가사키의 수령 ‘이노우에 지쿠고나가미’는 원래 일본에 세운 신학교에서 공부를 했던 신자였지만 다시 배교를 한 인물이었다. 그는 처형만이 능사가 아니고 오히려 순교자를 양산하여 가톨릭의 세를 부추길 뿐이라고 생각했다. 핵심적인 인물들, 즉 신을 향한 통로의 역할을 주관하는 신부 같은 존재를 배교시킴으로서 신앙의 뿌리를 일소할 수 있다고 생각했고 실행했다.

로드리고 신부는 이런 지쿠고나가미의 공작에 굳건히 버텨내지만 역시 체포되었다가 관병들이 바닷물에 빠뜨린 신자들을 구하려다 익사한 동료 가루페 신부의 허망한 죽음을 목도하고 오직 배교를 위해 이미 배교했음에도 그의 배교를 위해 고문당하는 신자들의 고통에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한다. 이 참혹한 고통을 끝내달라고, 너그러운 위안과 용기의 말씀을 남겨달라고 하느님을 애타게 부르지만 신은 여전히 ‘침묵’ 뿐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가 일본에 온 이유이기도 했던 은사인 ‘크리스토발 페레이라’ 신부와 해후한다.

페레이라 신부는 배교를 하고 불교에 귀의했으며 결혼까지 한 상태였다. 그 역시 로드리고 신부와 신자들의 참혹한 고문 때문에 배교를 했다. 결국 로드리고 구덩이에 거꾸로 묶여 고문을 당하는 신자들의 고통의 울부짖음에 그리스도도 이들의 고통을 끝내기 위해 배교했을 것이라는 페레이라 신부의 설득에 울부짖음으로 성화를 밟고 배교를 하고 만다.

스콜세지의 영화 <사일런스>에서 주목하는 것은 하느님의 침묵에 따른 배교의 과정이다. 반면 원작 슈사쿠의 <침묵>에서는 신앙이 왜 좌절, 굴절되었는가의 문제에 천착한다.

영화에서는 현재와 현실의 고난에 대해 사랑하고 절대적 믿음으로의 신에게 끊임없이 신은 대답하지 않는다. 그에게 로드리고 주변의 신자들은 육체적 고문이나 고통에 시달리지만 그에게 가해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 고통의 신음소리들이 그를 갈등과 번민의 늪에 빠지게 만든다. 그는 결국 번민의 무게에 짓눌려 배교를 선택하지만 마음속 깊이 자리 잡은 신을 죽는 날까지 버리진 않는다. 영화 <사일런스>의 묻고자 하는 건 신앙의 의미다. 아무리 기다려도 대답이 없는 신의 ‘침묵’에 박해와 압박 때문에 형식적 행위로서 신의 형상을 밟았다 해도 신을 진실로 부정한 것인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다.

그러나 엔도 슈사쿠의 원작 소설의 <침묵>은 냉정하고, 균형적인 시선에서 역사적이며, 총체적으로 접근한다. 소설에 주목받는 인물은 나가사키의 수령으로 간교하고 교묘한 회유책으로 후미에를 이르게 하는 ‘이노우에 지쿠고나가미’의 역할이다. 지쿠고나가미는 영화에서는 그저 교활한 인물로 묘사되며 주목하지 않는 인물이었지만 소설에서는 당대의 일본의 역사적 상황과 조건을 대변한다.
지쿠고나가미는 가톨릭이 일본의 전통적 토양과는 맞지가 않아 뿌리가 내릴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일본의 전통적 신분제의 봉건질서와 천황의 조상을 숭배하는 ‘신토(神道)’나, 토착화한 불교 등의 신앙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하느님 앞에 누구나의 평등을 강조하는 가톨릭과도 충돌이 발생할 수밖에 없는 조건을 내포하고 있었다.

가톨릭의 전파는 이미 말한 대로 교역의 이익과 맞물려 있었고, 중앙권력의 정치체제가 안정된 상황에서 권력의 안정을 저해하는 요소가 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지쿠고나가미의 입을 빌려 초기 일본 선교의 선구자였던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신’이라는 의미의 라틴어인 ‘데우스(Deus)’가 일본이 숭배하던 전통의 ‘태양신’, 즉 ‘다이니치(大日)’와 발음이 비슷한 것을 선교에 적극적으로 이용했다는 것이다.

또한 스페인, 포르투갈이 가톨릭 전파를 앞세우고 이어 일본을 지배하려 들 것이라는 우려도 한 몫을 했다. 사실 대항해시대를 주도했고 덕분에 최대 수혜국이었던 이들 가톨릭 국가들은 야만으로 지칭했던 아메리카와 인도 등에서 지배야욕을 드러내며 약탈과 착취로 자신들의 정치적, 경제적 욕망을 실현했으며 유럽 세력의 침략의 과정을 그런 길을 밟았다. 전통의 사회체제와 이념이 강력하게 유지되던 중국과 인도와는 달리 전국시대 대혼란기의 일본은 그들에게는 선교를 구실로 삼아 정치적 지배와 경제적 이익을 동시에 구현할 수 있는 훌륭한 먹잇감이었는지 모른다.

실제로 세례를 받은 규슈의 다이묘들은 도요토미 정권에게 규슈를 교회령으로 해줄 것을 청원하기도 했으며, 시마바라에서의 가톨릭교도들의 반란에는 포르투갈이 개입한 의혹이 있었다. 또한 스페인과 포르투갈과 해상권을 놓고 격돌했던 후발국들이자 개신교 국가들인 네덜란드와 영국은 가톨릭 국가들이 일본을 지배하려들 것이라고 부추긴 것도 박해로 전환한 또 하나의 이유였다.

그리고 가톨릭의 평등사상이 이념이 아닌 현실에서도 과연 평등한 사상인가 자문해볼 문제이기도 하다. 가톨릭의 타락과 부패에 따라 ‘마틴 루터’ 등의 종교개혁운동이 일어났고, 가톨릭 내부에서도 원래의 기독교의 청빈정신으로 돌아가자는 내부에서의 개혁운동이 활발히 벌어졌다. 그러나 가톨릭 국가 내부에서는 왕가, 귀족, 대지주 등에 의한 지배착취구조는 여전했다.
물론 아메리카와 아시아 무역을 통해 막대한 이익을 챙겼지만 그것은 지배계급의 이익에 귀속되었을 뿐이 피지배민들에게 전혀 상관이 없는 일이었다. 유럽에서 가톨릭이 강성했던 스페인, 이탈리아, 포르투갈, 프랑스 등은 모두 한가지로 구체제의 억압이 강고하게 작동했던 나라들이다. 내부에 모순이 존재하는데 먼 극동의 국가에게 평등사상의 전파는 모순적이다.

1902년에 조선의 제주에서 일어난 ‘이재수의 난’의 가톨릭 세력이 전통적 종교들을 야만, 이단으로 규정하고 국가권력의 징세권을 받아 신자가 아닌 민중들을 강압하면서 발생한 경우도 있었다. 즉 그들의 평등은 가톨릭 신자간의 평등일 뿐이고, 같은 신자사이라 할지라도 지배계급에 의한 피지배계급의 지배논리를 정당화하는 역할로 작용했다.

소설 <침묵>이나 영화 <사일런스>에서 로드리고 신부나, 이노우에 지쿠고나가미와 더불어 중요한 비중의 인물은 ‘기치지로’다. 그는 배신과 배교를 밥 먹듯이 하면서 고해와 참회를 통해 그의 행위에 대해 용서받는 걸 반복한다. 그는 스스로 강하지 못하고 나약하기가 짝이 없어 위협에 굴복한다고 스스로를 정당화하는 인물이다.

이 기치지로의 모습에는 원작의 엔도 슈사쿠가 투영된다. 슈사쿠 자신이 카쿠레기리시탄, 즉 ‘숨은 크리스트’교 후예로 그의 신앙과 철학과 삶을 기치지로를 통해 끊임없이 회의하고 반문한다. 스콜세지의 영화에서의 기치지로의 존재는 그저 추접한 인물로 그다지 비중이 높지 않다. 다만 영화에서 기치지로는 배교를 한 로드리고 신부의 시중을 드는 휘하로 들어가 시간이 난 훗날, 과연 이들이 진실로 배교를 했는지 확인하기 위한 정기적인 성화를 밟는 후미에 의식에서 더 이상 성화를 밟지 않고 끌려간다. 불멸의 마음 속 믿음에 대한 영화의 극적 효과를 끌어올리기 위한 장치였을 것이다.

소설에서는 로드리고 신부는 배교를 했지만 여전히 응답하지 않는 신의 침묵과 그를 부정한 행위에 대해 번민한다. 약삭빠르고 천박하며 그래서 늘 무시를 당하는 존재에 불과했던 기치지로는 그런 로드리고 신부에게 지침과 같은 역할로 다가선다. 진실로 신을 섬긴다는 건 형식과 행위에서 우러나오는 것이 아니라 마음 속 신심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도 페레이라 신부가 걸었던 길, 신이 부정된 일본의 시스템 아래서 결혼을 하고 불교에 귀의하며, 번역서와 사전을 만들고, 유일하게 교역이 인정된 지역이자 나라인 나가사키의 네덜란드와의 교역에서 가톨릭과 관계된 물품들이 반입여부를 조사하는 생활을 한다. 그러나 그도 가톨릭 세계가 파계한 그를 질타하겠지만 신의 사랑과 믿음을 깊이깊이 여전히 간직한다.

엔도 슈사쿠의 <침묵>은 결국 역사적 조건과 박해의 가혹한 시련이라는 설득을 통해 형식을 떠난 신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는 삶의 정당성을 부여한다. 그것은 일본이라는 특수한 시간과 공간의 특성이 내재된다. 그 속에서 신의 문제인 ‘선’과 ‘악’은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에 대한 규정은 무의미하다. 반면 스콜세지의 <사일런스>에서는 박해를 가한 자들은 ‘악’이고, 박해를 받는 자들은 ‘선’이라는 이분법을 구도로 삼는다. 박해를 받아 굴복했더라도 마음을 신앙을 간직하는 의미를 추구하지만, 박해를 가한 자와 완전히 굴복한 자들에 대해서는 ‘악’이라는 시선을 거두지 않는다. 신앙 자체에 함몰된 것이다.

신앙 자체에 함몰되어 과연 신의 세계를 설명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다. 또한 신의 세계란 선과 악을 모두 포용하는 세계가 아닌가. 성장기의 뉴욕의 고달픈 삶들 천지인 빈민가와 그 속에 우뚝 솟은 웅장한 교회 첨탑의 신성함과의 괴리에서 신의 존재에 대해 질문을 던졌다는 그가 ‘로드리고’라는 ‘나’의 세계에만 빠져있다는 것이 아쉽다. 슈사쿠의 원작과 고민처럼 ‘이노우에 지쿠고나가미’나 ‘기치치로’에게 의미와 따뜻한 시선을 부여했다면 신에 문외한 사람들에게도 축복의 신의 영광을 골고루 비추지 않았을까.

서로 다른 것들의 ‘관계’를 통해 우리는 좀 더 본질에 접근할 수 있는 법이다. 본질은 개인의 ‘구원’에 대해 신의 응답하지 않는 ‘침묵’의 문제가 아니라 ‘나’와 다른 ‘너’의 세계와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접촉하느냐의 문제가 아닐까. 감히 신의 영역도 그렇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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