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후감] #34. 아무것도 하지 않을 권리 by 정희재 - 계속 달리자니 죽을 것 같고, 멈춰서자니 패배자가 될 것 같은 이들에게

in #kr-book6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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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달리자니 죽을 것 같고, 멈춰서자니 패배자가 될 것 같고




무한경쟁시대라고 하지만 어느 누구도 그걸 심각하게 여기지 않는 것 같다. 옆집 아이보다 일찍 목을 가누고 앉기 시작하던 때부터 워낙 익숙하게 겪어오던 것이라 그런지, 아니면 잠시라도 멈춰서서 이게 얼마나 심각한 일인지를 가늠해볼 여유조차 없어서인지.

계속 앞만 보고 내달리자니 숨이 차서 죽을 것 같고, 멈춰서자니 세상에서 도태되어 나만 패배자가 될 거 같고. 이런 갈등과 고민을 안고 괴로움에 헐떡이는 사람들에게 잠시 쉬어가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책이 바로 정희재의 "아무것도 하지 않을 권리"이다.

이 책은 우리가 어디를 향해 숨가쁘게 달려가고 있는지, 무엇을 위해 죽을 힘을 다해 버티는지, 잠시 멈춰서면 정말 세상이 무너지는지 진지하게 질문을 던지고 있다. 내가 맞게 가고 있는 걸까, 더 빠르게 가야 하는 건 아닐까 걱정하는 이에게 지금 이대로도 충분히 괜찮다고 위로해준다.


남들은 뛰어가고, 날아가는데 나만 제자리걸음 같을 때, 내가 참가한 경기의 규칙은 조금 다르다고, 내게 맞는 근육을 사용해 한 걸음 한 걸음 즐기며 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면, 충분히 지적이고 용감한 사람이 아닐까.


바쁜 경쟁구도 속에서 한 발자국 떨어져서 내 속도대로 걸었는데, 그저 하고 싶은 일을 좇다 보니 책도 출간하고 얼결에 영어 선생님 소리를 듣고 있는 내게 아래 문구는 위안을 주면서 고개를 끄덕이게 만들었다.


“어쩌다 보니 여기까지 왔습니다.” 마치 제대로 된 목표도 없이 흘러가는 대로 살다 보니 그 자리에 이르렀다는 말처럼 들린다. 특별한 비법을 기대하고 묻는 사람으로선 맥이 풀릴 만한 대답이다. 그러나 그건 자기 비하도 겸손도 아니다. 목표를 정해 놓고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드는 사람도 있겠지만, 가다 보니 방향성이 생겨서 삶의 잔가지를 정리하고 한 그루 오롯한 나무로 성장한 사람도 있다. 대학 때 전공과도 다르고, 어려서부터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길로 접어들어 뜻밖의 재미를 발견하고 성실하게 가는 이들이 의외로 많다.



출처: 북이오


제목의 후광, 양날의 검



이 책이 베스트셀러가 된 데는 제목의 후광도 한 몫을 했음을 부인하기 어려울 것이다. 요즘 같은 세상에 '아무것도 하지 않을 권리'라니, 이 얼마나 힐링되는 문구란 말인가! 그런데 이 제목에도 논란의 여지는 있다. 작가 본인이 책에서 이 권리는 나 자신의 가치와 신념이 아닌 사회가 강요하는 트렌드나 경향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권리라고 부연설명을 했지만, 처음 제목을 읽은 사람이라면 말 그대로 '아무것도 안 해도 되는 권리'를 떠올리기 쉽다. 나처럼. 그래서 책을 처음 읽기 시작했을 때 약간 당황할 수도 있다. 나처럼.

바쁜 현대인들은 자투리 시간까지 활용하며 일분일초도 허투루 보내는 일이 없다. 그렇기에 그 반대급부로 아무것도 안 하는 시간, '멍 때리는' 시간, 명상하는 시간이 삶을 치유하는 방법으로 강조되기도 한다. 그런데 이 책에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을 권리'가 1) 진짜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무위(無爲), 2) 사회가 강요하는 일을 하지 않을 권리 혹은 세상이 가치있다 말하지 않는 일이더라도 자신이 원해서 자발적으로 열심히 무언가를 하는 권리, 이 두 가지 의미로 혼용되고 있다. 둘 중 하나에 대한 이야기에 집중하거나, 아니면 둘을 확실히 구분해서 설명해줬으면 더 좋았을 것 같다.

또 읽으면서 약간 의아했던 부분도 있었다.


간단한 일이었다. 운동화를 들고 나선다. 가게에 맡긴다. 값을 치르고 찾아 온다. 신발장에 넣는다. 그러나 운동화를 빠는 귀찮음과 수고를 누군가 대신 해 줬다고 해서 그 시간에 내가 더 가치 있는 일을 한 건 아니었다. 빈자리에 행복이 채워지지도 않았다.



저자의 의도는 이해가 간다. 몸을 움직이는 대신 소비의 편리함을 누린다고 해서 우리가 더 행복해지는 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운동화를 세탁소에 맡겨 빨래하는 시간에 내가 무엇을 해야 '더 가치 있는 일'을 하게 되는 것일까? 밀린 낮잠을 자거나 만화책을 보며 낄낄대면 '더 가치 있는 일'이 아닌 것인가? 그 일이 가치가 더 있는지 없는지에 대한 기준은 무엇인가?

운동화 빨래를 스스로 하는 것보다 더 가치있는 일이 무엇인가에 대한 논의는 차치하더라도, 돈주고 빨래를 하는 대신 얻은 자유 시간에 '가치있는 일을 하지 않고 보내버린 것은 의미가 없고 행복하지 못하다'는 뉘앙스로 말하는 건 자신이 그토록 주장해오던 "아무것도 하지 않을 권리"와 살짝 어긋나 있다.

저자는 “우리에겐 심심할 권리, 빈둥거릴 권리가 있어. 그 지루함을 한번 끝까지 파고들어 보는 것도 괜찮아. 지루함 속에 살맛나게 하는 것들이 보석처럼 숨어 있기도 하니까.”라고 했지만, 어떤 이들은 그렇게 심심하고 지루하게 빈둥거릴 '권리'를 누리기 위해서는 돈을 들여 그 시간을 사야 한다는 걸 간과하고 있는 듯하다.


목이 타는 한 여름에 마시는 미지근한 물 - 누군가에겐 오아시스, 누군가에겐 밍밍한.



이 책에서 또 하나 아쉬운 점은 이런 저런 제약과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멈춰서기로 결심한 사람들을 위해 다음 방향을 제시하고 있지 않다는 거다. 그렇게 피곤하게 내달리지 말고, 조금 쉬었다 가. 그래도 괜찮아, 라고 달콤하게 속삭이는데 그 다음에 대해서는 별 얘기가 없다. 멈춰서면, 그 다음엔 어떻게 할 것인가?

아니, 애초에 멈춰선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 회사를 그만 두라는 말인가? 너무 열심히 일하지 말고, 상사의 눈을 피해 근무시간에 인터넷 쇼핑이라도 하라는 말인가? 이 책에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을 권리'를 이렇게 말하고 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을 권리’란 나 자신의 가치와 신념이 아닌 사회가 강요하는 트렌드나 경향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권리를 말한다.


사회가 강요하는 트렌드나 경향에서 자유로우려면 어떤 시도들을 해야 하는지, 어떻게 하면 사회의 강요와 상관없이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발견할 수 있는지, 거기에는 어떤 위험요소가 있고 그건 어떻게 극복해나갈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있지 않다. 그저 저자 자신의 단편적인 경험들만 나열되어 있다. 아마도 이 책이 '자기계발서' 보다는 '에세이'의 성격을 띠고 있어서 그런 것 같다.

그래서 이 책은, 목이 타는 한 여름에 마시는 한 모금의 미지근한 물이다. 지금 갈증에 허덕이며 목이 타서 죽을 것 같은 사람에게는 미지근한 물이라도 달콤한 생명수와 같겠지만, 어느 정도 갈증의 고비를 넘긴 사람에게는 "너무 미지근하네. 좀 더 시원한 물 없나?"하는 생각이 들게 마련이니까. 지금 이대로도 좋긴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싶은 사람들'을 위해 좀더 체계적으로 실천 방향을 제시해줬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럼에도, 누군가에겐 소중한 한 모금의 물




다소 아쉬운 점이 있긴 했지만, 그럼에도 이 책이 누군가에겐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반짝반짝 빛을 줄 수 있겠다 싶다. 계속 달리기만 해서 좀 멈추고 싶은데 멈추는 법도 잊은 사람들, 멈추게 되면 누가 날 비난할까봐 아니, 스스로를 너무 비난하기 때문에 힘든 사람들, 그런 이들에겐 추천하고 싶다.

굳이 책을 읽지 않더라도, 이 독후감을 읽는 모두에게 이 말만은 꼭 전하고 싶다.

‘너도 참 좋은 시절을 지나고 있어. 그걸 알았으면 좋겠네.’


제목: 아무것도 하지 않을 권리
저자: 정희재
출판사: 갤리온






[독후감] 지난 독후감들 최근 5개 링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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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엑시덴탈 유니버스 by 앨런 라이트먼 - '비과학적'이고 '비논리적'인 현대 물리학의 세계

30. 내 친구 윈딕시 by 케이트 디카밀로 - 가고 싶어하는 것을 붙잡아둘 방법은 없단다

31. 스토너 by 존 윌리엄스 - 열심히 살았는데, 그걸로는 충분하지 않은 걸까?

32. 에드워드 툴레인의 신기한 여행 by 케이트 디카밀로 - 사랑을 잊어버린 어른을 위한 동화

33. 와일드 by 쉐릴 스트레이드 - 위험해도, 무서워도, 두려워도. 나는 계속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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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우리에겐 심심할 권리, 빈둥거릴 권리가 있어. 그 지루함을 한번 끝까지 파고들어 보는 것도 괜찮아. 지루함 속에 살맛나게 하는 것들이 보석처럼 숨어 있기도 하니까.”라고 했지만, 어떤 이들은 그렇게 심심하고 지루하게 빈둥거릴 '권리'를 누리기 위해서는 돈을 들여 그 시간을 사야 한다는 걸 간과하고 있는 듯하다.

부드럽게 비판하지만 예리한, 멋진 리뷰입니다.^^ 책의 좋은 점만 잔뜩 나열하는 많은 리뷰보다 영양가 가득한 글이네요. 이 리뷰를 다 읽고서 이 책 봐야할까, 하는 의문이 들었는데

계속 달리기만 해서 좀 멈추고 싶은데 멈추는 법도 잊은 사람들,

에게 추천하시는 마지막 부분 보고, 안 읽어도 되겠다 결론냅니다ㅎ 전 계속 멈추기만 해서 좀 달리고 싶은 사람에 포함되거든요. 책보다 리뷰가 더 좋을 듯. 잘 봤습니다^^

쏠메님께서 이렇게 칭찬해주시니 정말 기분 좋습니다! ^^
내가 책의 장단점을 다 느꼈다면 독후감에도 그 장단점을 다 적어야하지 않을까 싶었어요.
책의 좋은 점만 쓰면 독자를 오도하게 되고, 나쁜 점만 쓰기엔 나와 의견이 다른 이들도 많을 테니까요.
제가 느낀 장단점을 모두 알리고 싶었어요.
고맙습니다. ^^

‘아무것도 하지 않을 권리’란 나 자신의 가치와 신념이 아닌 사회가 강요하는 트렌드나 경향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권리를 말한다.. 오랫동안 맞지 않는 옷을 입고 남들의 시선에 의해서 내자신을 지켜오는 거라고 믿었던 일들을 하나씩 내려놓는 단계를 거쳐오게 되면서 정말 공감가는 글입니다. 내게 맞는 근육을 사용해 한 걸음 한 걸음 즐기며 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면, 충분히 지적이고 용감한 사람이라고 말해주는 문구가 힐링 그 자체인것 같아요. 작년부터 읽고 싶었던 책이지만 매번 한국에서 주문을 실패하고 읽지 못했는데, 이거 해외배송이라도 해야하나 싶네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링크까지 걸어주시는 친절함에 감사드려요. 어차피 책으로는 꼭 소장하고 싶은지라 정 못기다릴것 같을땐 전자책도 고려하고 있었는데 ㅎㅎ 앞으로의 포스팅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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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에버슬로스님도 말씀하셨지만 전자책도 있어요.
제 포스팅에 초록색으로 변한 부분을 클릭하시면 '북이오'라는 전자책 플랫폼으로 가는데
그곳에서는 한화 말고도 스팀이나 스팀달러로도 전자책을 구매하실 수 있고요.

종이책이 어려울 땐 전자책이 참 좋은 거 같아요.
저도 해외 살고 있어서 전자책으로 읽었거든요. ^^

오~ 제가 예전부터 써왔던 문구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아' 였는데 ㅎㅎ 반갑네요~

그러셨군요. 역시 선구자! ㅎㅎㅎ
근데 이 책에서는 '진짜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무위'와 '사회가 강요하는 게 아닌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는 것'이라는 두 가지를 혼용하고 있어요. 제목만 읽으면 오해하기 쉬운 책이에요.

저에게는 밍밍한 이야기 일듯 하네요.
이미 월급 루팡이라...ㅎㅎ

사장님! 여깁니다, 여기요! ㅎㅎㅎ

@bree1042님 안녕하세요 ㅎㅎ
스팀잇 계정만 있으면 에어드랍 해주는 바이트볼 받으셨나요 ^^?
https://steemit.com/kr/@ganzi/gbtye
위 링크에 쉽게 설명해 놓았습니다!
좋은하루 보내세요^^

네, 이미 받았습니다. 고맙습니다. ^^

'카르페 디엠'이 생각나는 책이네요:]

카르페 디엠하면 키팅 선생님이죠.
로빈 윌리엄스.. ㅠ.ㅠ
(feat. 사고의 흐름..)

누군가에겐 밍밍할 수도 있다...
맞습니다. 책이 하는 이야기는 독자에 따라 담기는 것이
달라요.

그래서 책을 언제 만나느냐도 아주 중요한 문제 같아요.
나이대와 자신이 처한 상황에 따라 많이 달라지니까요.
공감해주셔서 고맙습니다. :)

읽다보면 생각이 꼬리를 물듯 해요. 읽는 사람마다 받아들이는 것이 다르겠지만요.

자신의 현재 위치, 지금의 마음가짐이나 상태에 따라 책이 주는 느낌이 다를 거 같아요.

가다 보니 방향성이 생겨서 삶의 잔가지를 정리하고 한 그루 오롯한 나무로 성장한 사람도 있다. 대학 때 전공과도 다르고, 어려서부터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길로 접어들어 뜻밖의 재미를 발견하고 성실하게 가는 이들이 의외로 많다.

저는 결국 멈춰섰기에, 저에게도 이런 행운이 왔으면 합니다.

무작정 걷는 걸 멈춰서셨고,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나가기 시작하셨다면 이미 이런 행운은 시작된 게 아닐까요?
머지 않은 미래에 꼭 멋진 결실 맺으실 겁니다. :)

도서관에서 빌려서 봐야겠습니다. 고민할 것들을 많이 던져줄거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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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중간에 섞인 그림들도 참 좋았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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