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8월 29일 다부동 전투 종료와 정봉욱 장군

1950년 8월 29일 다부동 전투 종료와 정봉욱 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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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포 전 ‘다부동 전투’가 화제가 됐다. 백선엽 장군의 사망을 계기로 ‘사단장 돌격’ 등 그가 수훈을 세웠다고 알려져 있는 다부동 전투가 사실은 별 것이 아니었다거나 다른 전투에 비해 특출할 것도 없었다는 주장이 제기됐고, 이에 대한 반박도 부산하여 이래저래 시끄러웠던 것이다. 생각이야 다를 수 있겠으나 개인적으로 다부동 전투는 매우 중요한 전투였고 대한민국의 운명을 결정지은 전투 중의 하나였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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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동강 전선이 뚤린다면 최후 방어선으로는 마산 밀양 울산을 잇는 데이비드슨 선이 상정돼 있었다. 하지만 이는 방어선이라기보다는 부산항에서 벌어질 대철수 작전을 위한 시간 벌기용이라는 쪽이 정확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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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래저래 낙동강은 8월 15일 광복절까지 부산을 점령하라고 악을 쓰던 김일성에게나 “Stand or die”를 부르짖던 미8군 사령관 워커 이하 미군과 한국군들에게나 무슨 수를 쓰든, 무슨 희생을 치르든 넘어서고 막아서야 할 경계였다. 그리고 다부동은 당시 한국의 정부 기능이 집결돼 있는 대구를 향한 도상에 있었다. 한국군 1사단이 이곳을 지지키고 있었고 여기에 인민군 3개 사단, 1사단과 13사단 15사단이 달려들었다. 여기에 서울 점령의 선봉의 공으로 여단에서 전차사단으로 승격한 105 전차사단까지 힘을 보탰다. 지금도 유명한 ‘류경수 근위 땅크 사단’이 그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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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부동 전투의 상황을 일일이 다 이야기할 필요는 없겠지만 다부동 전투는 실로 치열했고 수많은 희생을 치러내는 가운데 한국군이 미군의 지원을 받으며 끝끝내 버텨낸 승전이었다. 미군 탱크와 인민군 탱크가 6.25 전쟁을 통틀어 몇 번 안될 치열한 전차전을 벌이기도 했고 그 이름도 끔찍한 융단폭격이 왜관 일대를 초토화시키기도 했다. 한국군 1사단 사령부가 인민군 특공대의 공격을 받아 위기일발을 겪기도 했고 이틀 동안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하고 싸우다 후퇴하는 병사들 앞에서 사단장이 권총 들고 돌격하는 ‘영화를 찍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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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일보에 따르면 다부동 전투는 1950년 8월 29일 종료됐다. 한국군 1사단은 끝까지 적의 공격을 막아내고 미군과 교대하게 되는데 미군은 “고지 위의 시체를 다 파묻지 않으면 인수 인계 못하겠다!”고 아우성을 쳤다. 한국군과 인민군 합쳐 수천 구가 넘는 시신들이 뒹굴고 있었으니 그럴만도 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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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군 시인으로서 전쟁터를 누비던 조지훈 시인이 쓴 시 <다부원에서>에는 그 참상이 여실히, 그리고 뻐근하게 드러나 있다. 포성이 찢어발기고 총성이 쓸고 간 전장이 시인이 토해낸 명시(名詩)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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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 농성(籠城) 끝에 나와 보는 다부원은
얇은 가을 구름이 산마루에 뿌려져 있다.
피아(彼我)공방의 포화가
한달을 내리 울부짖던 곳
아아 다부원은 이렇게도
대구에서 가까운 자리에 있었구나.
조그만 마을 하나를
자유의 국토 안에 살리기 위해서는

한해살이 푸나무도 온전히
제 목숨을 다 마치지 못했거니
사람들아 묻지를 말아라
이 황폐한 풍경이
무엇 때문의 희생인가를....
고개 들어 하늘에 외치던 그 자세대로
머리만 남아 있는 군마의 시체
스스로의 뉘우침에 흐느껴 우는 듯
길 옆에 쓰러진 괴뢰전사
일찍이 한 하늘 아래 목숨 받아
움직이던 생령들이 이제
싸늘한 가을 바람에 오히려
간 고등어 냄새로 썩고 있는 다부원
진실로 운명의 말미암음이 없고
그것을 또한 믿을 수가 없다면
이 가련한 주검에 무슨 안식이 있느냐.
살아서 다시 보는 다부원은
죽은 자도 산 자도 다 함께
안주(安住)의 집이 없고 바람만 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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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자는 죽은 자였지만 산 자들은 살았다. 또 이 전투에서 운명이 완전히 바뀌거나 전환점을 맞은 사람들도 있었다. 이 전투로 전쟁영웅으로 떠오른 백선엽 장군이야 더 말할 것이 없을 것이고 괴멸적인 타격을 입은 후 미군에 투항했다가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는 친공포로들의 지휘관 노릇을 했던 13사단 참모장 리학구에게도 다부동은 매우 특별한 기억이었을 터이다 또 한 사람 정봉욱 장군을 빼놓을 수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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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원래 황포군관학교를 나와 (이건 들은 얘긴데 확인하지는 못했다) 팔로군에서 일본군과 싸웠고 이후 북한으로 돌아와 포병 장교로 복무했고 인민군 13사단 포병연대장 (중좌: 중령)으로 다부동 전투에 참가했다. 그런데 8월 22일 그는 당번병 한 명과 함께 백기를 흔들며 국군에 투항한다. 야전군인으로서 공산군 특유의 정치군관들에 넌더리를 냈던 그는 사단장이 포병 운용에 트집을 잡아오자 이러다가는 죽갔구나 싶어 탈출해 온 것이었다. 그는 엄청난 정보를 풀어 놓았고 가뭄의 단비같은 정보를 한국군은 요긴하게 써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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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순한 인민군 포병연대장과 함께 지내며 정보 보따리를 풀었던 사람이 포병 출신인 박정희였다. 정봉욱은 자신의 계급을 인정받아 한국군으로 편입돼 후일 5.16에도 참여했고 인민군 출신으로서 한국군에서 별을 다는 기염을 토한다. 논산훈련소장, 초대 3군사관학교장, 7사단장 등이 그의 주요 전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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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청렴결백한 장군으로 유명했다. 아내가 사적으로 짚차를 이용했다고 노발대발하며 외양간에서 자라고 내몰았다는 거짓말같은 일화는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짐작케 한다. 장개석 군대도 보았고 팔로군 경험도 있어서 그런지 “군이 썩으면 나라가 망한다.”는 신념을 가진 듯 군내의 부정부패를 혐오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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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가진 지론 중의 하나는 이것이었다. “공산주의를 이기기 위해서는 가진 자가 베풀어 그렇지 못한 이들과 나눠 가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진정 공산주의를 이길수가 없다.” 요즘 누가 들으면 빨갱이라고 길길이 뛸 발언이지만 한국 현대사, 나아가 동북아시아 현대사의 격랑을 누비며 실로 다양한 경험을 했던 정봉욱이 체득한 통찰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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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7사단장으로 있을 때 인민군이 군사분계선을 넘어 국군 GP를 기습하는 도발을 일으켰다. 그때 정봉욱 소장은 휘하 포병대에게 DMZ내 포격을 명령했고 침투해 있던 꽤 많은 수의 인민군들은 그대로 비무장지대의 고혼이 돼 버렸다. 상황을 목격한 사람에 따르면 포격을 가한 비무장지대 지역이 피로 물들어 있었다니 북한으로서는 만만찮은 희생이었을 것이다. 거기서 정봉욱 소장이 직접 대북 마이크를 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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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들었던 7사단 출신 예비역의 전설(?)에 따르면 인민군 부대장은 정봉욱 장군의 후배였고 서로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고 한다. 인민군 부대장이 “이보라 정 장군. 올챙이 때 생각을 못하고 설치나.” 하면서 인민군 출신임을 들어 도발하자 정봉욱 역시 마이크를 잡고 외쳤다. “내가 누군지 알고도 이러나. 또 까불면 내레 니 머리통에 포탄을 꽂아 주갔어.” 뭐 군인의 기상이고 뭐고는 좀 제쳐 두고 그렇게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말싸움을 한 왕년의 인민군과 현역 인민군 장성들은 어떤 심경들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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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봉욱 장군은 일본어, 중국어, 러시아어에 영어까지 구사했다고 한다. 그 능력도 능력이거니와 그 언어 구사력 또한 역사의 소산이라는 생각이 든다. 식민지에서 태어났으니 일본어는 기본으로 배워야 했고 중국에서 팔로군 생활을 했으니 중국어도 모국어같이 했을 것이고 전쟁을 개시하는 작전명령 1호가 러시아어로 남아 있는 인민군이니 러시아어도 공부해야 했을 것이고 한국군 장성으로서는 영어를 더듬더듬이라도 해야 하지 않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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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백선엽만큼은 아니지만 무척 장수해서 2018년 9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남긴 기록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이런 사람들의 행적이 그냥 묻혀 버리는 건 참 아쉬운 일이다. 역사란 얼마나 미로처럼 복잡하고 드렁칡처럼 얽혀 있는 것인지. 그가 아직 살았다면 1950년 8월 29일 끝났던 다부동 전투 이야기를 실감나게 들을 수 있었을 터인데.
달포 전 ‘다부동 전투’가 화제가 됐다. 백선엽 장군의 사망을 계기로 ‘사단장 돌격’ 등 그가 수훈을 세웠다고 알려져 있는 다부동 전투가 사실은 별 것이 아니었다거나 다른 전투에 비해 특출할 것도 없었다는 주장이 제기됐고, 이에 대한 반박도 부산하여 이래저래 시끄러웠던 것이다. 생각이야 다를 수 있겠으나 개인적으로 다부동 전투는 매우 중요한 전투였고 대한민국의 운명을 결정지은 전투 중의 하나였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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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동강 전선이 뚤린다면 최후 방어선으로는 마산 밀양 울산을 잇는 데이비드슨 선이 상정돼 있었다. 하지만 이는 방어선이라기보다는 부산항에서 벌어질 대철수 작전을 위한 시간 벌기용이라는 쪽이 정확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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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래저래 낙동강은 8월 15일 광복절까지 부산을 점령하라고 악을 쓰던 김일성에게나 “Stand or die”를 부르짖던 미8군 사령관 워커 이하 미군과 한국군들에게나 무슨 수를 쓰든, 무슨 희생을 치르든 넘어서고 막아서야 할 경계였다. 그리고 다부동은 당시 한국의 정부 기능이 집결돼 있는 대구를 향한 도상에 있었다. 한국군 1사단이 이곳을 지지키고 있었고 여기에 인민군 3개 사단, 1사단과 13사단 15사단이 달려들었다. 여기에 서울 점령의 선봉의 공으로 여단에서 전차사단으로 승격한 105 전차사단까지 힘을 보탰다. 지금도 유명한 ‘류경수 근위 땅크 사단’이 그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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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부동 전투의 상황을 일일이 다 이야기할 필요는 없겠지만 다부동 전투는 실로 치열했고 수많은 희생을 치러내는 가운데 한국군이 미군의 지원을 받으며 끝끝내 버텨낸 승전이었다. 미군 탱크와 인민군 탱크가 6.25 전쟁을 통틀어 몇 번 안될 치열한 전차전을 벌이기도 했고 그 이름도 끔찍한 융단폭격이 왜관 일대를 초토화시키기도 했다. 한국군 1사단 사령부가 인민군 특공대의 공격을 받아 위기일발을 겪기도 했고 이틀 동안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하고 싸우다 후퇴하는 병사들 앞에서 사단장이 권총 들고 돌격하는 ‘영화를 찍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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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일보에 따르면 다부동 전투는 1950년 8월 29일 종료됐다. 한국군 1사단은 끝까지 적의 공격을 막아내고 미군과 교대하게 되는데 미군은 “고지 위의 시체를 다 파묻지 않으면 인수 인계 못하겠다!”고 아우성을 쳤다. 한국군과 인민군 합쳐 수천 구가 넘는 시신들이 뒹굴고 있었으니 그럴만도 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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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군 시인으로서 전쟁터를 누비던 조지훈 시인이 쓴 시 <다부원에서>에는 그 참상이 여실히, 그리고 뻐근하게 드러나 있다. 포성이 찢어발기고 총성이 쓸고 간 전장이 시인이 토해낸 명시(名詩)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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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 농성(籠城) 끝에 나와 보는 다부원은
얇은 가을 구름이 산마루에 뿌려져 있다.
피아(彼我)공방의 포화가
한달을 내리 울부짖던 곳
아아 다부원은 이렇게도
대구에서 가까운 자리에 있었구나.
조그만 마을 하나를
자유의 국토 안에 살리기 위해서는

한해살이 푸나무도 온전히
제 목숨을 다 마치지 못했거니
사람들아 묻지를 말아라
이 황폐한 풍경이
무엇 때문의 희생인가를....
고개 들어 하늘에 외치던 그 자세대로
머리만 남아 있는 군마의 시체
스스로의 뉘우침에 흐느껴 우는 듯
길 옆에 쓰러진 괴뢰전사
일찍이 한 하늘 아래 목숨 받아
움직이던 생령들이 이제
싸늘한 가을 바람에 오히려
간 고등어 냄새로 썩고 있는 다부원
진실로 운명의 말미암음이 없고
그것을 또한 믿을 수가 없다면
이 가련한 주검에 무슨 안식이 있느냐.
살아서 다시 보는 다부원은
죽은 자도 산 자도 다 함께
안주(安住)의 집이 없고 바람만 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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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자는 죽은 자였지만 산 자들은 살았다. 또 이 전투에서 운명이 완전히 바뀌거나 전환점을 맞은 사람들도 있었다. 이 전투로 전쟁영웅으로 떠오른 백선엽 장군이야 더 말할 것이 없을 것이고 괴멸적인 타격을 입은 후 미군에 투항했다가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는 친공포로들의 지휘관 노릇을 했던 13사단 참모장 리학구에게도 다부동은 매우 특별한 기억이었을 터이다 또 한 사람 정봉욱 장군을 빼놓을 수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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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원래 황포군관학교를 나와 (이건 들은 얘긴데 확인하지는 못했다) 팔로군에서 일본군과 싸웠고 이후 북한으로 돌아와 포병 장교로 복무했고 인민군 13사단 포병연대장 (중좌: 중령)으로 다부동 전투에 참가했다. 그런데 8월 22일 그는 당번병 한 명과 함께 백기를 흔들며 국군에 투항한다. 야전군인으로서 공산군 특유의 정치군관들에 넌더리를 냈던 그는 사단장이 포병 운용에 트집을 잡아오자 이러다가는 죽갔구나 싶어 탈출해 온 것이었다. 그는 엄청난 정보를 풀어 놓았고 가뭄의 단비같은 정보를 한국군은 요긴하게 써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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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순한 인민군 포병연대장과 함께 지내며 정보 보따리를 풀었던 사람이 포병 출신인 박정희였다. 정봉욱은 자신의 계급을 인정받아 한국군으로 편입돼 후일 5.16에도 참여했고 인민군 출신으로서 한국군에서 별을 다는 기염을 토한다. 논산훈련소장, 초대 3군사관학교장, 7사단장 등이 그의 주요 전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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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청렴결백한 장군으로 유명했다. 아내가 사적으로 짚차를 이용했다고 노발대발하며 외양간에서 자라고 내몰았다는 거짓말같은 일화는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짐작케 한다. 장개석 군대도 보았고 팔로군 경험도 있어서 그런지 “군이 썩으면 나라가 망한다.”는 신념을 가진 듯 군내의 부정부패를 혐오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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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가진 지론 중의 하나는 이것이었다. “공산주의를 이기기 위해서는 가진 자가 베풀어 그렇지 못한 이들과 나눠 가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진정 공산주의를 이길수가 없다.” 요즘 누가 들으면 빨갱이라고 길길이 뛸 발언이지만 한국 현대사, 나아가 동북아시아 현대사의 격랑을 누비며 실로 다양한 경험을 했던 정봉욱이 체득한 통찰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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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7사단장으로 있을 때 인민군이 군사분계선을 넘어 국군 GP를 기습하는 도발을 일으켰다. 그때 정봉욱 소장은 휘하 포병대에게 DMZ내 포격을 명령했고 침투해 있던 꽤 많은 수의 인민군들은 그대로 비무장지대의 고혼이 돼 버렸다. 상황을 목격한 사람에 따르면 포격을 가한 비무장지대 지역이 피로 물들어 있었다니 북한으로서는 만만찮은 희생이었을 것이다. 거기서 정봉욱 소장이 직접 대북 마이크를 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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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들었던 7사단 출신 예비역의 전설(?)에 따르면 인민군 부대장은 정봉욱 장군의 후배였고 서로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고 한다. 인민군 부대장이 “이보라 정 장군. 올챙이 때 생각을 못하고 설치나.” 하면서 인민군 출신임을 들어 도발하자 정봉욱 역시 마이크를 잡고 외쳤다. “내가 누군지 알고도 이러나. 또 까불면 내레 니 머리통에 포탄을 꽂아 주갔어.” 뭐 군인의 기상이고 뭐고는 좀 제쳐 두고 그렇게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말싸움을 한 왕년의 인민군과 현역 인민군 장성들은 어떤 심경들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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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봉욱 장군은 일본어, 중국어, 러시아어에 영어까지 구사했다고 한다. 그 능력도 능력이거니와 그 언어 구사력 또한 역사의 소산이라는 생각이 든다. 식민지에서 태어났으니 일본어는 기본으로 배워야 했고 중국에서 팔로군 생활을 했으니 중국어도 모국어같이 했을 것이고 전쟁을 개시하는 작전명령 1호가 러시아어로 남아 있는 인민군이니 러시아어도 공부해야 했을 것이고 한국군 장성으로서는 영어를 더듬더듬이라도 해야 하지 않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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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백선엽만큼은 아니지만 무척 장수해서 2018년 9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남긴 기록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이런 사람들의 행적이 그냥 묻혀 버리는 건 참 아쉬운 일이다. 역사란 얼마나 미로처럼 복잡하고 드렁칡처럼 얽혀 있는 것인지. 그가 아직 살았다면 1950년 8월 29일 끝났던 다부동 전투 이야기를 실감나게 들을 수 있었을 터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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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years ago 

잘 읽었습니다.
상세한 설명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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