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여름이 오면 갈음할 것들

in Korea • 한국 • KR • KO4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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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간이 지난 흔적은 내가 머문 곳에만 남는 것은 아니어서 내 몸과 마음에도 고스란히 남는다고 했다.여름이 오면, 지난 시즌의 흔적을 분명 어디선가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씨떼 섬의 버드나무는 벌써 푸른 잎을 닦달해 피워내고 있고, 노란 건물들 사이 남은 앙상한 울타리는 개화하는 꽃들이 자신들의 영역을 침범하지 못하도록 뻗대고 있으니까. 거리위 계절이 들여오는 고유한 냄새가 만연해지면 나는 나대로 갈음할 것들과 갈음하지 못할 것들을 헤아리게 될 테다.


 혹여나 그럴 수만 있다면, 9월부터 시작되는 가을의 풍요로운 정취는 관광객들에게 양보할지언정, 비교적 두툼한 스웨터들을 가방에 넣고 남반구로 날아가 겨울을 지낼 생각이다. 지난 몇 년동안 프랑스의 북쪽에서 남쪽까지, 동쪽에서 서쪽까지 다양한 기후의 특성을 겪었다. 파리의 기후는 본격적으로 여름에 속하는 6월부터 9월 사이를 제외하곤 흐리거나 비가 오거나 둘 중 하나지만, 다행인 부분은 그나마 여름이 빚는 이점들이 일 년의 나머지를 갈음한다. 구석구석 파리의 모든 장소를 비추고 솎아내 생기를 불어넣는 여름, 그런 여름이 온다면 보상이라도 받듯 여유를 부린 후 어디론가 떠날 계획이였다(하지만 인생은 늘 계획대로 되질 않는다)


 나의 미션 중 하나는 바로 주파수 맞는 사람을 찾는 것이였다. 겨울동안 웅숭그린 몸을 서서히 피고 나면, 가라앉은 주변은 텅 비어있었다. 물론 주파수 맞는 사람을 찾는 일은 일년 내내, 어쩌면 인생의 미션으로 봐도 무방하겠다. 미션임파서블, 즉 평생 사람과 관계를 맺는 존재인 '사람'의 일. 이에 대한 고찰은 언제든 나눌 필요가 있지 않나. 딱히 나만의 기준이 있다면, 나를 평등한 하나의 인격체로 보고 내 언어와 생각을 존중하려는 태도가 몸에 밴 사람 정도가 되겠다. 높지도 낮지도 않은 장벽에 사람들은 쉽게 걸려 넘어지기도 하고, 가볍게 폴짝 뛰어넘어 내 곁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이미 내 반경에 들어온 사람들과는 그렇지 않은 사람들과 더욱 자주 교류를 하게 되므로 이 사람이 이 말을 어떤 뜻으로 말했는지, 평소 말하는 습관이라던지 등을 능동적으로 해석하는 작업을 거치지 않아도 자연스레 파악할 수 있게 된다. 그 과정을 너무 길지 않은 텀의 대화로 적절히 거쳐야 하는 것이다. 현실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한 나는 내게 주어진 상황을 다각도의 입장에서 바라볼 수 있는 의지를 불태우는데 늘 전력을 소모하는데, 이는 굉장히 피곤한 일에 속하지만 무의식적으로나마 상대방을 차별선에 두는 상황을 미연에 방지하거나 나와 연결되는 지점에서 적당한 예의를 갖추고 있는지 알아차리려면 늘 민감하게 안테나를 세워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타인을 대하는데 있어서 전반적인 이해, 사회 구성 요소, 자신의 위치 등을 면밀히 성찰하고 있는 사람- 즉 나와 주파수가 맞는 사람-을 찾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괜히 '미션'이라 불리우겠나) 쉽지 않겠지만, 나 자신부터 점검하고 생각해보자. 내가 가진 기준이 어떻게해서 적용되어있는지, 어떠한 고정관념에 갇혀 있는지 등을 생각해보는 것은 성찰의 첫걸음이 될 수 있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와 그 틀 자체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있어야 시작이란 뜻이다. 나를 동등한 주체로 대하는 사람을 이 넓고 다양한 커뮤니티에서 찾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다.

누군가와 나란히 걸으면서 걸음의 보폭은 물론 마음의 보폭까지 맞아 서로 조금도 불편해하지 않고 대화를 나눌 수 있다면 두 사람은 오랫동안 같이 걸을 수 있으리라. 함께 걸어가고, 걸어 다니고 싶은 사람. -김정선



#2


 락다운이 길어지면서 고의 아니게 한정된 사람들과 교류를 하는 시간을 거치고 보니, 불필요한 생각이 지나치게 많아졌다. 어떤 면에서 불필요하냐면, 대부분 생각의 폭이 부정적인 쪽으로 빠지는지라 그걸 정리하는데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무엇보다 작업속도가 느려지기 때문이다. 며칠동안 고민하다가 오랜만에 주치의에게 상담을 신청했고, 비대면 스카이프 화상으로 30분간 대화를 나눴다. 누구나 커리어, 건강(어제 갑자기 손이 떨려서 글을 쓰지 못했음), 경제적 등 다양한 문제가 있지만 대부분 현실적인 문제를 이상적으로만 대하기에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많기에 주치의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나의 주치의는 늘 '선택'에 놓이게 되는 자신을 마주하도록, 그 선택의 기로에 서있는 나를 돌아볼 수 있도록 객관적이되 따듯한 시선으로 격려해준다. 뾰족한 수를 내놓기 보다 그저 정황을 되짚어주며 이야기를 들어주며 나에게 주파수를 맞춰주는 사람이 되어주기를 자처한다. 그런 점이 참 고맙다. (몇 번의 다른 상담을 통해 그렇지 않은 의사들을 여럿 거쳐왔다) 상담동안 나눈 이야기의 9를 차지한 내용은 늘 그랬듯이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감정들과 그에 따른 근본적인 이유였고, 끝난 후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조깅을 나섰다.


 비교적 번잡해진 도로옆을 달리면서 생각한다. 여름이 오면, 아침마다 끓여 마시는 히비스커스 차는 전날 밤 미리 우려내어 냉차로 마시게 될 거라고. 하도 입어서 이젠 내 피부같은 포근한 감촉의 오버사이즈 스웨터는 벗어 접어두고 시원한 린넨 소재의 셔츠를 찾게 될 거라고. 따듯한 햇살을 쏟아내는 하늘의 파란 온도가 밤 아홉시가 다 되어도 어둠으로 물들지 않을 때, 모두가 그런 것처럼 나 또한 밖으로 나와 천천히 강둑을 걷게 될 거라고. 하늘거리는 치마를 마음껏 펄럭이며, 지나가는 스케이트 보더들과 자전거 주행을 하는 사람들, 어깨에 장바구니를 메고 퇴근하는 사람들을 뒤로 하고서 미리 가을의 정취를 그리워 하게 될 거라고.



#3


 살다보니, 어쩌다가, 정확한 명목은 모르겠지만, 나와 타자를 연결시키는 일에 있어 그 누구보다 진심을 다하는 사람들이 곁에 하나 둘 모였다. 모두 정의의 의지를 불태우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라는 물음을 가슴에 품은 사람들이다. 남성 여성을 떠나 어떠한 성별에 소속감을 느끼기 이전에 나라는 개인으로서 고민하며, 자신의 정체성에 꾸준한 질문을 던지며 위치를 파악하는데 적잖은 노력을 들인다. 물론 현생에 치이다 보면 객관적 현실을 바라보는 능력이 무뎌질 수도 있다. 나 또한 종종 실수하고 넘어지고 반성하고 연민을 느끼는 일을 하루에도 몇 번씩 반복하니까. 하지만 그들은 어떤 이유건 연민과 존중과 사랑을 잃지 않는다. 발길 닿는 곳마다 옅지만 명료한 희망을 뿌리내린다. 그런 이들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스스로가 세상 못나게 느껴지는 초라한 때조차도 형용할 수 없는 위로가 된다.


 전화로든, 대면으로든, 이메일로든, 편지로든 오랜시간 사유와 성찰을 나눠왔다. 한달만의 전화에도 또는 매일 나누는 카톡에도 걱정과 위로가 서려있다. 그리고 다들 그렇게 밥을 챙긴다. (타지에 혼자 살다보니 온갖 마음챙김을 받고있다) 이처럼 내게 자발적으로 주파수를 맞춰주는 사람들의 노력과 애정이 있기에 무기력증을 유발하는 잔혹한 일들 속에서도 사람에 대한 희망을 잃지 않을 수 있었다. 앞으로 나아가려면 대체 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한 고마움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를 유지하려는 의식적인 주력이 필요함은 말할 것도 없다. 그래서 관계란 참 어렵다. '그런 관점이 있구나' 하는 존중과 방관 한 끗 차이를 적절히 구분해야 하며 개인적, 사회적 욕구가 만나는 지점의 성찰을 유지해야 함은 물론, 진정으로 상대방을 위한 일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알려는 노력을 해야 하니까.


 그렇기에 시즌을 막론하고 대체할 수 없는 것은, 나를 향한 마음이라는 결론이 내려진다. 상대방의 주파수가 나와 다르다면 맞춰가는 것, 내가 부족한 부분을 상대방에게 감추고 자책하지 않음은 물론, 변화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것. 이러한 것들이 내게는 친구를 찾아가는 과정이며 인생 미션인 셈이다. 기꺼이 순수한 기쁨과 슬픔을 나누고 진심으로 행복을 빌어주는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하루의 시작이 가뿐해진다. 무서운 세상 속 나와 마음을 연결하고 나누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에 감사한다.


 창 밖으로 희미하게 동이트는 시간이 점점 앞당겨지는 새벽 침대에서 반쯤 일어나 강 건너편을 바라보고 있자면 지난 밤 내내 상상속 품에 껴안고 밀어냈던 한 사람의 모습이 서서히 지워지는 것 같다. 아침맞이 반짝이는 강물이 마음에 무언가를 일게 한 듯이. 메마른 겨울, 아침에 눈을 떠보면 새벽에 내린 는개 때문에 거리가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작년 여름 아침엔 어땠는지 떠올려보니 기억이 없다. 겨울이 여름 기억을 지워낸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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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파수 맞는 사람, 꼭 만나세요. ㅎㅎ

 4 years ago 

인생미션이니, 계속 헤매다 보면 찾을 수 있겠지요 ㅎㅎ

 4 years ago 

연결됨에 진심을 다하는 분들이 곁에 많다니 부럽습니다. ^^

 4 years ago (edited)

마쉘린님 같은 분들이죠. 예전에 비해선 많아진 것인데, 누구와 상대적으로 비교할 수 없는 것이긴 하지만, 더욱 많아졌으면 하는 바람?욕심?입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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