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 순례기록 '동행' - 2. 어머니! 같이 걸어요

in KOREAN Society3 years ago

항상 그 곳에 있을 것 같았던 어머니의 자리가 텅 비었다는 생각은, 마음의 평화와 삶의 자유를 찾아야 된다는 나의 결심을 실행에 옮기는 계기가 되었다.

평생을 희생으로 일관하신 어머니를 위한 기도는 나의 의무이자 책임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천상의 어머니이신 성모 마리아에게 돌아가신 어머니를 부탁하는 순례가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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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성모 마리아께서 발현하신 포르투갈의 작은 마을 『파티마』에서 어머니의 영혼을 위한 기도를 드리는 것으로 포르투갈 해안길의 순례를 시작하기로 결심했다. 거추장스런 형식의 옷을 벗어던지자 삶의 무게를 내려놓은 듯 홀가분한 기분마저 들었다. 교수직을 사퇴한 두 번째 은퇴! 나에게 다시 자유가 주어졌다.

길이 신비로운 이유는 주변 경치가 아름다워서가 아니라 그곳을 걸어간 사람들의 사연이 켜켜이 쌓여있기 때문이다. 이미 세 번이나 그 길을 걸었지만 그때마다 사람들의 땀 냄새와 대화의 숨결이 새롭게 내 가슴에 차곡차곡 쌓여갔었다.

고통스러운 큰 배낭을 짊어지고도 환한 미소로 가득했던 순례자의 표정을 잊을 수 없었다. 바쁜 일과에 찌들어 살던 어느 날 갑자기 내 인생을 변화시킬 새로운 전환점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삶의 갖가지 이유들이 인생행로를 변경하지 못하게 방해하곤 했었다.

나의 어머니는 자녀를 위한 삶을 살아왔다. 어머니는 자신의 삶의 목표는 등한시 한 채 자녀, 그중에서도 막내아들의 성공을 지상 최고의 행복으로 삼아왔다. 5년여 전 공직을 그만 뒀을 때 어머니의 걱정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 뒤 내가 대학에 발을 들여놓은 후에야 어머니께서는 안도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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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에도 어머니는 오로지 아들의 성공만을 기원하셨다. 어느 날 어머니께서는 병석에 눕고 말았다. 때맞춰 어머니의 염원에 부응하여 쾌유를 바라기라도 한 듯 나는 교수가 된지 2년 9개월여 만에 부총장이 되었다.

총장이 대학의 주인이기에 부총장이라는 직책은 봉급쟁이로서는 최고의 영예였다. 어머니께서 그 소식을 듣고 얼마나 좋아하셨는지는 나중에야 병간호를 하던 누나의 말을 들어 알게 되었다. 아들의 출세가 자신의 쾌유보다 더 가치 있다고 여겼던 어머니셨다.

어머니께서 임종하시기 전 병실을 찾았다. 그때 의식조차 없던 어머니께서 나의 병문안을 알아채신 것 같았다. 조용히 누워계시던 어머니가 갑자기 큰 소리로 병실 안의 환자들을 향해 소리쳤다.

“여보시오, 여보시오. 내 아들이오. 내 뱃속에서 어떻게 이런 훌륭한 아들이 태어났는지 모르겠소.” 그리고는 이내 무의식의 세계로 빠져 들었다. 부총장이 된 아들이 너무 자랑스러웠던 게다. 슬며시 병실을 빠져나와 화장실에서 남몰래 눈물을 훔쳤다.

그 뒤 어머니는 돌아가셨다. 자신의 행복은 뒤로 미뤄둔 채 오로지 자식의 행복만을 바라셨던 어머니! 어머니자신의 행복도 추구했으면 더 좋았을 텐데…. 어머니께서 돌아가신 후 2달여 만에 나는 부총장직은 물론 교수직까지 미련 없이 내려놓았다.

아마도 어머니께서 살아계셨으면 그러하지 못했을 것이다. 자녀가 성공해야 한다는 어머니의 행복 기준을 차마 깨뜨릴 수 없었기에. 하지만 어머니께서 저 세상으로 떠나신 후 나는 어머니의 영정 사진을 배낭 안에 곱게 모시고 순례길에 나섰다.

이제 어머니는 프랑스 생장피드포르에서 에스파냐의 산티아고에 이르는 프랑스길 800여 킬로미터와 포르투갈 해안길 280여 킬로미터를 나와 함께 걸어갈 것이다. 프랑스길과 포르투갈길을 동시에 걷기로 한 이유는 살아생전 지은 어머니의 죄를 완전히 속죄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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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9년 교황 알렉산더 3세는 에스파냐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를 로마, 예루살렘과 동일한 가톨릭의 3대 성지로 선포했다. 그리고 칙령을 발표하여 산티아고 성인의 축일인 7월 25일이 일요일과 겹치는 해, 즉 성스러운 해에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를 순례한 자는 그 동안 지은 죄를 완전히 속죄 받고, 다른 해에 도착한 순례자는 지은 죄의 절반을 속죄 받을 수 있다는 대사大赦를 선언하게 되었다.

이러한 교황의 칙령에 근거하여 순례길을 두 번 걸으면 어머니의 죄를 완전히 속죄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걷기는 내가 걷지만 영정 사진으로나마 나와 함께 걸은 어머니의 죄를 완전히 속죄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들어서였다. 물론 자신이 지은 죄만큼 속죄를 해야 된다는 보속補贖은 나의 기도로 대신하고자 했다.

나의 까미노 여정은 이처럼 어머니와의 동행이라는 전제하에 시작되었다. 평생 단 한 번도 해외여행을 해 본 적이 없는 어머니, 해외여행을 시켜 드리고 싶어도 허리가 아파 오랫동안 앉아 있을수 없었기에 해외로 보내드릴 수 없었던 어머니셨다.

어머니께서는 가장 사랑했던 막내아들과 함께 미지의 땅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의 아름다운 풍경과 교회의 장엄함을 영혼으로나마 경험하고 체험하며 걸어가리라. 최소한 그렇게 믿으며 순례길을 걸어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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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를 사랑하는 마음이 쨘.. 하게 느껴집니다.

네! 평생을 자식들 위해 살아오셨기에....

산티아고로 떠나시까지 그런 일들이 있었군요.
리스팀합니다.

부끄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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