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사 | 프랑켄슈타인 | 3부 3

in Book it Suda2 years ago

3
어느 날 저녁 나는 연구실에 앉아 있었다. 해는 이미 지고 달이 막 바다에서 떠오르는 참이었다. 작업을 하기에는 불빛이 충분하지 않았으므로 나는 멍하니 손을 놓고서 그날 밤은 일을 접어야 할지 아니면 서둘러 완성해야 할지 생각했다. 많은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다가, 내가 지금 하는 일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까 하는 데까지 생각이 미쳤다. 3년 전 나는 이와 똑같은 일을 했고, 그렇게 만든 악마는 비할 데 없는 잔인성으로 내 가슴을 황폐하게 했으며, 지울 수 없는 자책감을 심어 주었다. 지금 나는 새로운 존재를 만들어 내려 하는데, 그 존재의 성격 또한 몰랐다. 어쩌면 그녀는 자신의 배우자보다 천 배 만 배 사악해서 살인과 참극 자체를 즐길 수도 있다. 그는 인간의 주변을 떠나 외딴 오지에 숨어 살겠다고 맹세했지만 그녀는 아니었다. 그녀 역시 생각하고 추론할 줄 아는 동물일 텐데, 자기가 태어나기 전에 이루어진 계약을 지키지 않을 수도 있다. 그들이 서로를 미워할 가능성도 있다. 그 녀석이 자신의 흉측한 외모를 싫어하는데 자기 앞의 여자를 보고 더 큰 혐오감을 가지지 말란 법도 없지 않은가? 그녀 또한 훨씬 잘생긴 사람을 보고 그를 싫어할지도 모른다. 그녀가 그를 떠나면 그는 다시 혼자가 될 것이고, 자기 종족에게 버림받은 사실에 분노를 불태울지도 모른다.
설사 그들이 유럽을 떠나 신대륙의 황무지에 둥지를 튼다고 해도, 그 악마가 갈구하는 공감의 첫 번째 결과는 아이들일 테고, 그렇게 악마의 씨족이 지구에 번식한다면 인간의 존재 자체가 공포 가득하고 위험한 상황에 처할 수도 있었다. 나 혼자 좋으라고, 나중 세대에게 이런 저주를 부를 권리가 있는 걸까? 전에 나는 내가 창조한 존재의 궤변에 감동했다. 사실은 그의 악마적인 위협에 꼼짝없이 당한 것이다. 지금 와서 처음으로, 내 약속의 부도덕성을 갑자기 깨달았다. 후손들이 나를, 자기만의 이기심에서 인류 전체의 존재와 자신의 평화를 서슴없이 맞바꾼, 벌레만도 못한 놈이라고 저주할 생각을 하니 몸서리가 쳐졌다.
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심장이 멎을 것 같았다. 그때였다. 고개를 들었는데, 창문에서 달빛으로 드러난 그 악마의 모습이 보였다. 소름 끼치는 웃음으로 입술이 주름투성이가 되어 나를, 자신이 명령한 과제가 진행되는 방을 보고 있었다. 그래, 그는 나를 따라온 것이다. 숲을 어슬렁거리고 동굴에 숨어 지내면서, 또는 드넓은 히스 벌판에서 쉬면서, 이제 내가 얼마나 일을 진척시켰는지 확인하고 약속 이행을 재촉하러 나타난 것이다. 보면 볼수록 그 얼굴이 극도의 사악함과 배신을 말해 주는 것 같았다. 그를 닮은 존재를 또 하나 만들겠다는 약속은 미친 짓이었다. 나는 분노로 부들부들 떨면서 작업하던 것을 갈가리 찢어 버렸다. 그 악마는 머지않아 행복을 안겨 줄 존재가 파괴되는 광경을 보더니 절망과 원한에 사무쳐 섬뜩하게 울부짖으며 물러났다.
난 방에서 나와 문을 잠그면서, 다시는 그 일에 손대지 않겠다고 엄숙하게 맹세했다. 그러고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끌고 내 거처로 향했다. 나는 혼자였다. 그 답답한 우울증을 떨쳐 주고 무서운 망상으로 인한 토할 듯한 중압감에서 나를 구제해 줄 사람은 주변에 없었다.
몇 시간이 흘렀을까. 나는 바다를 보며 창가에 있었다. 바람이 조용해서 그런지 바다는 거의 움직임이 없었고, 고요한 달빛 아래 모든 것이 잠든 채였다. 고깃배 몇 척만이 드문드문 수면에 떠 있었고, 가끔씩 서로를 부르는 어부들의 목소리가 산들바람에 실려 왔다. 고요하다는 느낌은 있었지만 사실 그 정적의 깊이를 제대로 의식한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갑자기, 가까운 해변에서 노 젓는 소리가 들리더니 누군가 집 근처로 올라오는 것 같았다.
몇 분 후 누가 문을 살짝 열어젖힌 듯 대문이 끼익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온몸이 사시나무 떨리듯 떨렸다. 육감으로 그의 정체를 간파한 나는 멀지 않은 오두막에 사는 농부를 깨우고 싶었다. 그러나 도저히 어쩔 수 없는 감정, 다급한 위험을 피해 달아나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그 자리에 붙박혀 버린 무서운 꿈속에서 수없이 느끼는 그런 감정에 허우적댔다.
곧이어 진입로를 따라 걸어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문이 열리고 마침내 내가 두려워하던 악마가 나타났다. 그는 문을 닫고 내게 다가와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은 힘들게 시작한 것을 파괴해 버렸어. 대체 의도가 뭐지? 감히 약속을 깨겠다는 건가? 지금까지 난 온갖 고생을 다 겪어 왔어. 당신과 함께 스위스를 떠나 라인 강변을 따라 버드나무 많은 섬들 사이로, 언덕을 넘어 옮겨 다녔어. 잉글랜드의 히스 들판과 스코틀랜드의 황야에서 몇 달씩 지냈고, 생각도 못 할 피로와 추위, 굶주림을 견뎌 왔는데 감히 내 희망을 무너뜨려?”
“꺼져! 약속은 지키지 않겠다. 너처럼 흉측하고 사악한 존재는 절대 다시 만들 수 없어.”
“넌 노예야. 그렇게 설득했건만 넌 내가 애써 겸손 떨 가치도 없음을 스스로 입증하고 말았어. 내 능력을 잊지 마. 넌 지금 스스로 비참하다고 생각하겠지만 난 네가 햇빛도 싫어할 만큼 더 비참하게 만들 수 있어. 넌 나를 만들었지만 네 주인은 나야. 어서 복종해!”
“우유부단하던 내 과거는 지나갔다. 어디 네 마음대로 해보아라. 하지만 네가 아무리 위협해도 난 두 번 다시 그 사악한 짓을 하지 않을 테다. 오히려 네 악행의 동반자를 만들어 주지 않겠다는 내 결심만 굳어질 뿐이지. 내가 맨 정신으로, 죽음과 참극을 즐길 악마를 세상에 풀어놓을 것 같으냐? 어림없다! 내 결심은 흔들리지 않는다. 아무리 협박해도 네 말은 내 분노를 부채질할 뿐이야.”
그 괴물은 내 얼굴에 나타난 굳은 결심을 보더니 무기력한 분노로 이를 갈았다. “모든 남자가 아내를 가슴에 품고, 모든 짐승도 자기 짝이 있는데 나만 혼자 살라고? 나도 한때 사랑을 베풀었다. 그러나 그 대가는 혐오와 경멸뿐이었어. 이봐! 너는 맘에 안 들겠지만 조심해야 할걸! 앞으로 네 인생은 공포와 불행 속에서 지나갈 것이고 머지않아 벼락이 내리쳐 네게서 영원히 행복을 앗아 갈 것이다. 내가 감당 못 할 비참함 속에서 뒹구는 동안 너는 행복할 줄 아느냐? 넌 나의 나머지 열정도 파괴할 수는 있겠지만 복수는 남아. 복수, 앞으로는 그것이 빛이나 음식보다 더 좋게 느껴지겠지! 나는 죽을지 몰라도 그 전에 네가, 나를 괴롭히는 폭군인 네가 먼저, 너의 불행을 지켜보는 태양을 저주하게 될 것이다. 명심해라. 난 겁이 없고 그래서 강인하거든. 뱀처럼 교활하게 지켜보다가 독을 쏠 테다. 넌 네가 입은 상처를 보며 후회하게 될 것이다.”
“닥쳐라, 악마야. 사악한 말로 공기를 더럽히지 말아라. 내 결심은 이미 말했고 난 그런 말에 뜻을 굽힐 겁쟁이가 아니다. 이제 그만 떠나라. 내 뜻은 변하지 않는다.”
“좋다, 가지. 하지만 잊지 마라. 네 결혼 첫날밤에 찾아갈 것이다.”
나는 불쑥 앞으로 나서며 소리쳤다. “비열한 자식! 내 죽음을 말하기 전에 네 몸이나 무사하게 잘 간수해라.”
그를 붙잡으려 했지만 그는 몸을 피하더니 총총히 집을 떠났다. 몇 분 후 그가 탄 배가 쏜살같이 물을 가르며 나가는가 싶더니 곧 파도 사이로 사라졌다. 다시 적막이 내려앉았지만 그의 말이 귓전에 울렸다. 내 평화를 압살한 녀석을 쫓아가서 바닷속에 처박고 싶은 분노가 이글거렸다.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방안을 오락가락하는 동안 온갖 상상이 떠오르면서 가슴을 찢고 에는 것 같았다. 왜 그때 그를 쫓아가서 죽어라 싸우지 않았던가? 그러나 상처를 주어 그를 떠나게 만든 사람은 나였고 그는 본토 쪽으로 길을 떠난 후였다. 만족을 모르는 그의 복수극에서 다음 희생자가 누구일지 생각하니 몸서리가 쳐졌다. 그리고 다시 그의 말이 떠올랐다. ‘네 결혼 첫날밤에 찾아갈 것이다.’ 그렇다면 그때가 내 운명의 끝으로 정해진 시점이었다. 나는 바로 그 시간에 죽어서 그를 만족시키고 원한을 풀어 주어야 할 것이다. 그런 생각은 두렵지 않았다. 그러나 사랑하는 엘리자베스, 그녀가 잔인하게 연인을 빼앗기고 흘릴 눈물과 한없는 슬픔을 생각하니 정말 몇 달 만에 처음으로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그리고 한바탕 싸워 보지도 않고 적 앞에 쓰러지지는 않겠노라고 결심했다.
밤이 지나고 바다에서 해가 떠올랐다. 기분은 한결 편안해졌다. 분노의 격정이 깊은 절망 속에 가라앉은 것을 그렇게 표현해도 된다면 말이다. 나는 집을, 어젯밤의 언쟁이 있었던 끔찍한 현장을 떠나 바닷가를 거닐었다. 바다는 나와 다른 인간들 사이에 놓인 건널 수 없는 장애물 같았다. 아니, 차라리 그런 사실이 증명되었으면 하는 소망이 슬그머니 일었다. 차라리 그 황량한 섬에서 시들어 가며, 어떤 갑작스러운 불행의 충격도 없이 살다 갔으면 하고 바랐다. 돌아간다면, 그건 나를 제물로 바치는 일이었다. 아니면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이 내가 만든 악마의 손에 죽어 가는 것을 목격해야 할 터였다.
나는 사랑하는 모든 것과 헤어져, 그 이별의 불행 때문에 잠들지 못하는 유령처럼 섬을 떠돌았다. 정오가 되어 해가 중천에 올랐을 때는, 풀밭에 누워 깊은 잠에 빠져 버렸다. 밤을 꼬박 새워 신경이 예민했고 눈이 따가웠던 것이다. 그렇게 빠져든 잠이 기력을 채워 주었다. 잠에서 깬 나는 다시 인간의 한 성원이 된 기분이었고, 훨씬 더 안정된 마음으로 지난 일을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그 악마의 말이 죽음을 알리는 조종처럼 계속 귀에 울렸다. 그 말은 꿈처럼 다가왔지만 현실처럼 생생하고 무거웠다.
해가 훌쩍 기울어 버렸다. 나는 여전히 바닷가에 앉아서, 게걸스러워진 식욕을 귀리 케이크로 채웠다. 그때 배 한 척이 내가 앉은 쪽으로 다가오더니 선원이 꾸러미 하나를 건네주었다. 그 안에는 제네바에서 온 편지들과 함께, 빨리 돌아오라고 애원하는 클레르발의 편지가 들어 있었다. 그는 그곳에서 무료하게 시간을 보내는 것에 지쳤으며, 런던에서 사귄 그의 친구들이 이미 시작한 인도 사업에 관한 협상을 마저 끝내야 하니 런던으로 돌아오라는 편지를 보내 왔다고 써 있었다. 그는 더는 출발을 미룰 수 없으며, 런던까지 여행한 후에, 어쩌면 생각보다 빨리 더 긴 여행이 이어질지도 모르니 하루 속히 자신과 함께 있어 달라고 간청했다. 결국 그는 나더러 이 외로운 섬을 떠나서 퍼스에서 자기를 만나 같이 남쪽으로 가자고 졸랐다. 이 편지가 나에게 상당한 활력을 주었고 나는 이틀 후에 그 섬을 떠나기로 했다.
그러나 출발하기 전에 마무리해야 할 일이, 생각만 해도 소름 끼치는 일이 있었다. 화학 기구들을 챙겨야 했고, 그러려면 끔찍한 작업 현장이었던 방에 들어가야 했고, 구역질 나는 꼴을 하고 있는 재료들을 치워야 했다. 이튿날 아침 동이 틀 무렵, 나는 억지로 용기를 내어 연구실 문을 열었다. 내가 파괴해 버린, 반쯤 완성되었던 존재의 잔해가 바닥에 흩어져 있었다. 마치 산 사람의 살을 난도질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정신을 가다듬고 방으로 들어갔다. 떨리는 손으로 기구들을 밖으로 옮겼지만, 이대로 떠나면 농부들의 공포와 의심을 살 것이고, 그래선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 쓰레기들을 바구니에 담아 돌을 가득 채운 후, 한밤중에 배에 싣고 가 바다에 버리기로 했다. 그러고는 해변에 앉아 화학 기구들을 씻고 정리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 악마가 나타났던 날 밤 이후 내 감정은 완전히 180도 바뀌었다. 그 전에는 우울한 절망감에 싸여, 결과가 어떻든 약속은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은 마치 눈앞에서 장막을 걷어 버린 듯, 처음으로 모든 것이 선명하게 보였다. 작업을 다시 한다는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그의 위협이 꺼림칙하게 마음을 짓눌렀지만, 자발적으로 나선다고 그걸 피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 악마와 똑같은 존재를 다시 만든다는 것은 그야말로 가장 비열하고 극악하게 이기적인 행동이라고 굳게 못 박은 나는 다른 결론이 나옴 직한 생각들을 모두 떨쳐 버렸다.
새벽 2시에서 3시 사이 달이 떴다. 나는 작은 배에 바구니를 싣고 해안에서 6킬로미터쯤 나아갔다. 사위는 너무도 쓸쓸했다. 배 몇 척이 육지로 돌아가고 있었고 나는 그들에게서 멀어져 갔다. 무슨 끔찍한 범죄를 저지른 사람처럼 불안에 떨면서 사람과 마주치지 않도록 피했다. 한순간, 맑게 빛나던 달이 갑자기 짙은 구름에 가렸고, 나는 어둠의 순간을 놓치지 않고 바구니를 바다에 던져 넣었다. 꾸르륵거리며 가라앉는 소리를 확인한 후 자리를 떴다. 날씨가 흐려지기 시작했지만 공기는 시원했고, 마침 북동쪽에서 불어오는 산들바람에 쌀쌀함이 느껴졌다. 그러나 쌀쌀한 공기가 오히려 상쾌하고 기분 좋게 다가와서 좀 더 바다에 머물기로 하고는 키를 한쪽 방향으로 고정시킨 채 바닥에 누웠다. 구름이 달을 가려 모든 것이 흐릿했고 배의 용골이 파도를 가르는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자장가 같은 그 소리에 나는 깜빡 깊이 잠이 들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른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해가 이미 높이 떠오른 뒤였다. 바람이 세게 불면서 파도가 내 작은 배를 끊임없이 위협해 왔다. 북동풍이 부는 것으로 보아, 내가 떠나온 해안에서 멀리 밀려온 것이 분명했다. 나는 항로를 바꾸려고 했지만 한 번 더 뱃머리를 돌렸다가는 당장 배에 물이 찰 것 같았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꼼짝없이 바람에 밀려가는 수밖에 없었다. 고백하지만 그때는 굉장히 무서웠다. 나에겐 나침반도 없었고, 이곳 지리를 거의 알지 못했으므로 태양의 위치도 나한테는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어쩌면 나는 드넓은 대서양으로 흘러들어서, 굶주림에 허덕이거나 또는 거칠게 철썩이며 사방에서 나를 희롱하는 엄청난 파도에 휩쓸려 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많은 시간이 흐른 뒤였으므로, 이어질 고난의 전주곡과도 같은, 타는 듯한 갈증을 느꼈다. 하늘을 쳐다보았다. 하늘을 가린 구름이 바람에 밀려갔지만, 구름이 밀려난 자리를 다시 다른 구름이 채웠다. 바다를 둘러보았다. 그곳은 나의 무덤이었다. “이 악마야, 네가 할 일이 벌써 다 끝나 버렸다!” 나는 고함을 쳤다. 그리고 엘리자베스를, 아버지를, 클레르발을 떠올렸다. 내가 떠나온 사람들, 그 괴물이 무자비한 피의 욕심을 채우려고 손을 뻗칠 모든 이를 생각했다. 그런 생각은 나를 절망스럽고 두렵기만 한 망상에 빠뜨렸다. 이제 그 장면이 영원히 막을 내리려는 이 순간에도, 그 생각을 하면 몸서리가 쳐진다.
몇 시간이 그렇게 흘렀다. 해가 수평선으로 기울면서 바람이 조금씩 잦아들어 산들바람으로 바뀌었고 거품을 물던 높은 파도는 바다에서 사라졌다. 그러나 바람이 잠잠해지자 어마어마한 너울이 일었다. 속이 울렁거려 키를 잡고 있기도 힘들어질 때쯤, 갑자기 남쪽에 길게 뻗은 고지가 보였다.
완전히 녹초가 되어 무서운 불안 속에서 여러 시간을 보낸 후라, 드디어 살았다는 갑작스런 희망이 벅차게 밀려오면서 눈물이 줄줄 쏟아졌다.
우리 감정이란 얼마나 변덕스러운지, 그리고 아무리 비참한 상황에서도 우리가 가진 삶에 대한 애착은 얼마나 묘한 것인지! 나는 옷가지로 돛을 하나 더 만들어 달고, 기를 쓰고 육지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멀리서는 험한 바위 땅처럼 보였는데 가까이 다가갈수록 경작지의 모습이 뚜렷이 드러났다. 해안 가까이에는 선박들이 있었다. 나는 문득 문명화한 인간들의 사회로 돌아가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주의 깊게 육지의 굴곡을 눈으로 더듬다가 마침내 작은 곶 뒤로 솟아오른 첨탑을 보고는 환호성을 질렀다. 극도로 기진맥진한 상태였으므로, 가장 쉽게 먹을 걸 해결할 수 있는 그 도시를 향해 배를 저어 가기로 했다. 다행히 나에겐 돈이 있었다. 곶을 도는 순간 작고 아담한 소도시와 아늑한 항구가 눈에 들어왔고 그곳으로 들어가는 내 가슴은 뜻밖의 탈출구에 기쁨으로 설레었다.
배를 대고 돛을 내리느라 정신없을 때 몇몇 사람이 다가왔다. 그들은 내 몰골에 적잖이 놀란 것 같았지만 나를 도와줄 생각은 하지 않았다. 오히려 저희들끼리 몸짓을 해가며 수군거리는 것이 다른 때 같았으면 은근히 경계심이 들었을 것이다. 사실 나는 그들이 영어를 쓴다는 것밖에는 알아듣지 못했으므로 영어로 말을 걸었다. “실례합니다만, 이 도시 이름이 뭐지요? 여기가 어딥니까?”
한 남자가 거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제 곧 알게 될 텐데 뭘. 어쩌면 이곳은 별로 당신 맘에 들지 않겠지만, 어쨌거나 내 장담하건대 당신한테 묵을 곳을 내줄 사람도 없을 거요.”
낯선 사람에게서 이렇게 무례한 말을 들은 나는 몹시 놀랐을뿐더러 그 동료들의 찡그리고 화난 표정이 무척 당혹스러웠다. “왜 그런 식으로 대답하시는 겁니까? 처음 보는 사람한테 그렇게 불친절하게 대하는 건 영국인다운 관습이 아닐 텐데요.”
그 남자가 말을 받았다. “난 모르겠소. 영국인다운 관습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아일랜드인의 관습은 죄인을 미워하는 거라오.”
이상한 대화가 오가는 사이에 군중은 빠른 속도로 불어났다. 하나같이 호기심과 분노가 섞인 표정들이 사실 성가시기도 했지만 상당한 불안감을 일으켰다. 여관으로 가는 길을 물었지만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나는 앞으로 걸어갔다. 군중이 웅성거리면서 나를 에워싸고 따라오는데 험상궂은 남자가 다가오면서 내 어깨를 툭툭 쳤다. “이보시오, 나와 같이 커윈 나리한테 가서 스스로 해명하는 게 좋을 거요.”
“커윈 나리가 누굽니까? 왜 나에 관해 해명해야 하죠? 여기는 자유 국가 아닌가요?”
“물론, 정직한 사람들한테야 얼마든지 자유롭죠. 커윈 나리는 이곳 치안 판사요. 당신은 어젯밤 여기서 살해된 채 발견된 한 신사의 죽음을 설명해야 할 거요.”
이 대답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지만 나는 이내 냉정을 되찾았다. 나는 결백했다. 그건 쉽게 증명될 것이다. 그래서 조용히 그 사람을 따라 그 도시에서 가장 좋은 집으로 갔다. 피로와 허기가 겹쳐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지만, 군중에 둘러싸여 있는 데다 몸이 쇠약한 사람을 범인으로 여기거나 의심하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에 힘을 다해 버티는 것이 낫겠다고 나름대로 계산했다. 그때 나는, 몇 분 후면 나를 덮쳐 버릴, 그리고 불명예나 죽음에 대한 모든 두려움을 공포와 절망으로 삼켜 버릴 재앙을 전혀 짐작도 못 했다.
여기서 잠깐 쉬었다 가야겠다. 이제 곧 자세하게 이야기하려는 무시무시한 사건들을 떠올리려면 정말 온 힘을 쥐어짜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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