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사 | 불안해서 오늘도 버렸습니다 | 번아웃 증후군

in Book it Suda3 years ago

“오늘 버린 것은 달력이다.”

나의 문제는 누군가 나를 아주 손쉽게 미워할 거라 믿는다는 점이다. 대화를 나누는데 피곤한 기색을 보여서, 부탁을 거절해서, 혹은 부탁을 들어주겠다고 했다가 말을 바꿔서, 답장을 빨리 하지 않아서, 게을러서, 욕심이 많아서 등. 누군가 나를 미워할 이유는 밤새 열거할 수 있다.

누군가 나를 미워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나는 빠르게 수긍하도록 훈련을 해왔다. 누군가 나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을 땐 타인이 느꼈을 불쾌함이 먼저 상상된다. 그런데 지금은 인간 면역력이 떨어졌기 때문에, 혹은 번아웃되어서 모든 인간관계가 버겁게 느껴진다. 연말만 되면 번아웃되는 나를 위해 미리 태국 행 비행기표를 끊어놓는다. 작년에도 12월에 태국으로 도망갔다. 지난해에도 이번에도 출국 전날에 입술 포진에 걸렸다. 피곤이 극에 달한 것이다. 사실 내가 날짜를 맞춘 것이 아니라 출국 날짜가 정해지면 데드라인 효과에 의해 나의 정신과 신체가 알아서 에너지를 안배해 출국 날짜에 정확히 동나게 하는 것 같다. 중요한 일이 끝나자마자 긴장이 풀려 감기에 걸리거나 며칠을 내리 잠만 자는 것처럼.

신비롭게도 인류가 감기에 가장 걸리지 않는 상황은 전쟁터라고 한다. 목숨이 걸린 위급한 상황에서 감기는 우리의 영혼의 판단에 따라 우선순위에서 밀려나는 것이다.

오늘 내가 버린 것은 2019년 달력으로, 오늘 처음 내 책상에 달력이 서 있었다는 걸 알았다. 달력은 3월에서 멈춰 있다. 내가 언제부터 그것을 바라보지 않았는지 달력은 온몸으로 말한다. 시계처럼 죽은 순간의 날짜와 시간을 몸에 각인하고 있다. 웃긴 놈이다. 매년 새 달력을 책상에 세우고 일정을 써놓지만 어느 순간부터 보지 않는다. 액자와 마찬가지로 달력은 ‘거기에 있지만 거기에 없는 사물’이 되어버린다.

그런데 달력은 소모품인가? 겉은 닳지 않아도 영혼은 점점 너덜너덜해진다. 달력을 넘길 때마다 달력은 죽는다. 다시 살지 않는 한 달력은 재생할 수 없다. 달력은 한 해가 가면 쓸모없는 물건이 되기 때문이다. 예전에 달력을 가슴에 박은 토끼 인형을 선물 받은 적이 있다. 토끼 인형은 가슴에 폭발 장치를 단 것 같았다. 달력 때문에 1년이 지나면 소용이 없어지고 때 지난 물건이 되어, 버려야 하므로. 달력을 달지 않았다면 토끼 인형은 장수할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그러나 언제 버려질지 예정되어 있다는 점에서 달력은 슬프다.

그럼 이런 상상은 어떤가? 달력의 영향을 가진 책, 가령 2019년 1월부터 2019년 12월 31일까지만 글자가 보이고, 2020년 1월 1일부터는 아무짝에도 쓸모없게끔 쓰인 책이 있다면? 2020년부터는 내부 장치에 의해 모든 글씨가 지워져 백지가 되어버리거나 스스로 폭파하는 것이다. 그럼 그 책을 조금 더 소중하게 여기게 될까? 내가 지금 달력을 아무 죄책감 없이 갖다 버리는 것처럼 버리기만 쉬워지겠지.

연말이 되면 달력이나 새해 다이어리가 잘 팔린다. 그런데 2019년 입장에서 2019년이 다 가지도 않았는데 2020년이 나대는 건 왠지 예의에 어긋나는 기분이 든다. 2019년이 두 눈 시퍼렇게 뜨고 버젓이 살아 있는데 ‘넌 어차피 죽었으니까~’ 하고 새 인물이 나타나 주인공 역을 빼앗는 꼴이랄까... 2020년을 미리 기웃거리고 얼른 2020년으로 갈아타려는 이유는 마지막이 겁나서다. 마지막을 어떻게 봉합해야 할지 모르는 마무리 젬병이기 때문에. 나는 새 출발의 기운으로 무서움을 가린다. 사람들의 이런 심리를 반영해, 그러니까 마무리보다는 새 출발이 인기가 많다는 점을 반영해, 2020년 다이어리에는 항상 2019년의 11월이나 12월 달력이 덤으로 끼워져 있다. 도움닫기 같은 건가? 당장 2020년부터 시작하려면 기다려야 하니까 예비 2020년(=2019년 12월)부터 자연스럽게 합류하라는...

그래서 2020년의 실제 시작은 2019년 12월인지도 모르겠다. 사실 1월은 새 출발의 느낌은커녕 공허하고 춥고 쓸쓸하다. 12월에는 한 해를 돌아보고 결산하고 내년의 다짐을 하고 소중한 사람들을 떠올리느라 생기가 넘친다. 반면 1월은 파티가 끝나고 청소하는 다음 날 아침에 가깝다. 혹은 만취해서 영혼을 교감하며 거하게 놀아놓고 다음 날 아침 쌩까는 기분이 1월이다. 그러는 나란 인간은? 마지막도 싫고 새 출발도 싫어서 동남아로 도망친다. 1월 1일에 여름 한복판에 있는 기분을 누릴 수 있도록 연말이나 새해가 나를 찾지 못하도록 따뜻한 곳에 숨어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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