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사 | 불안해서 오늘도 버렸습니다 | 삶이 내 쪽으로 선을 넘지 않도록

in Book it Suda3 years ago

“오늘 버린 것은 주문한 음식이다.”

친구와 함께 태국 행 비행기 표 두 장을 끊었다. 친구의 이름은 영혼 없는 리액션이다. 우리는 아침형 인간도 저녁형 인간도 새벽형 인간도 아니다. 아침에도 골골대고 저녁에도 컨디션이 좋지 않다(새벽에는 운다). 그런 인간을 뭉뚱그려 ‘현타형 인간’으로 분류할 수 있을 것이다. 둘 다 아침에 일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오후 여섯 시 출발 비행기 표를 끊었다. 그런데 출발 당일 병에 걸려 아침부터 병원을 다녀와야 했다. 영혼 없는 리액션은 임파선 결핵의 재발 조짐과 방광염이 의심되었고 나는 천식과 독감 증세가 있었다. 병원은 연말이라 붐볐고(“왜 이렇게 오래 걸려요?”라는 대기자들의 원성에 간호사는 “연말이라서요”라고 답했는데, 연말인 것과 사람들이 아픈 것 사이에 무슨 상관관계가 있는 걸까?) 총 두 시간 반을 기다린 끝에 진료를 받고 영혼 없는 리액션을 만났다. 우리는 약을 먹고 인천국제공항으로 향했다. 그리고 비행기에 탑승했다.

영혼 없는 리액션의 좌석은 5A, 나는 6A였다. 나란히 앉는 대신 앞뒤 좌석을 예약한 것이다. 영혼 없는 리액션의 옆 좌석에 앉은 아저씨는 이런 형태가 이해가 되지 않아 그녀에게 “아니, 왜 친구랑 옆에 안 앉아?” 하고 따졌고, 영혼 없는 리액션은 “우정 유지를 위해”라고 답했다.

영혼 없는 리액션은 필요에 따라 창문과 기내 벽 사이로 내게 물통과 맛동산을 전달했다(저가 항공이라 기내식을 안 줘서 영혼 없는 리액션이 맛동산을 샀는데 사은품으로 고래 모양 물총을 받았다). 맛동산을 하나씩 주다가 질렸는지 나에게 다 먹으라며 맛동산을 넘겨놓고 조금 있다가 손을 내밀었다. 영혼 없는 리액션은 펜을 원할 때도 있고 맛동산을 원할 때도 있었는데 손으로 자신의 의사를 표현했다. 손 모양에는 별 차이가 없었지만 그녀가 원하는 것이 펜인지 맛동산인지 단박에 알 수 있었다. 이런 게 바로 우정의 실체일 것이다.

밤늦게 태국에 도착한 우리는 숙소에서 똠양꿍과 모닝글로리 그리고 계란 부침을 주문했다. 주문한 요리를 받으러 1층으로 내려갔을 땐 아무도 없었는데 음식을 받고 뒤돌아서니 자다 깬 남자가 일어나 “Help You?”하고 물었다. 새벽에 호스텔을 지키는 직원인데, 책상 아래서 숨어서 자고 있었던 것이다. 땅바닥에서 자다가 인기척에 깬 그에게 “Oh, No... Sorry” 대답하고는 2층으로 올라갔다. 누워서 자는 알바생의 티셔츠 등짝에는 ‘Worry Less, Live More’라는 문구가 적혀있었다. 대충 번역하면 “걱정을 줄이고, 걱정을 덜 한 만큼 수명을 늘려라” 정도가 될 것이다.

주문한 음식은 먹을 수 없는 맛이어서 버려야 했고 객실에 비치된 오레오로 기억을 덮었다. ‘걱정 덜하고 더 많이 살기’ 그런 건 어떻게 하는 거지? 그런데 걱정을 덜 하면 더 많이 살게 되나? 반대로 걱정을 많이 하면 덜 사나? ‘Worry Less, Live More’라는 표현은 삶과 걱정을 공간을 차지하는 무언가로 간주한다. 혹은 공간을 함께 쓰는 무엇으로. 한 놈의 몸집이 줄어들면 다른 놈이 커지고, 한 놈이 불어나면 다른 놈이 영향을 받는다는 점에서 말이다. 걱정이 빠져나가면 빈 공간이 생기고 그 공간에 다른 것을 들여놓을 수 있다는 의미인 듯하다. 어쨌거나 ‘Worry Less, Live More’에서 걱정은 삶의 면적을 축소하는 무엇으로 보인다. 이번엔 등에 적힌 문장을 내 멋대로 바꿔본다.

“Worry More, Live More(걱정을 많이 하고 많이 살아라)!”

사실 걱정을 많이 할수록 삶을 더 많이 느끼기 때문에 약간의 걱정을 조미료처럼 사용하면 삶이 감칠맛 날 수도 있다.

볕이 잘 드는 카페에서 휘핑크림을 커다란 모자처럼 쓰고 있는 모카 라떼를 마시면서 원고를 마감하다가 나는 갑자기 “아, 좋다” 하고 작은 탄성을 내질렀다. 한국에서는 별일이 없어도 걱정 인간이 된다. 삶을 살지 못한다. 삶을 사는 게 아니라 삶이 내 쪽으로 선을 넘지 않도록 경고를 보내고, 삶을 진정시키고, 선 밖에 머무르라고 주의시키는 것에 힘을 쏟는다. 소극적이고 방어적인 삶. 적극적일 수 없는 삶. 활개치는 건 꿈꾸지 못하는 삶. 누군가 내 삶에 침범하고 발을 들여놓는 것을 막는 것에 급급한 삶. 사람을 만나 관계를 진척시키며 좋은 사이가 되는 것은 고사하고, 상대가 내 삶에 침범할까 봐 조마조마할 뿐이다.

반면 태국에서 나는 걱정에 부대끼지 않는 사람이 된다. 삶에 필요한 최소한의 걱정만을 품고 산다. 길을 건너다 차에 치이면 어쩌지? 조심하자. 오늘은 치앙마이 도서관을 또 못 찾아가면 어떡하지, 그래도 찾아가 보자. 내일은 좋아하는 카페가 닫는 날인데 어떡하지. 이런 걱정뿐이다. 다정하고 무해하며 초보적인 삶의 걱정들. 이런 걱정들은 삶에 생기를 불어넣고 발을 움직이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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