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비게이션

in #dclick6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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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가 채 걷히지 않은 길의 끝에 물기 젖은 아침 해가 떴다. 내비게이션은 어제와 다른 길을 알려 주었다. 십여 km쯤 돌아간다고 해서 오늘 주어진 RC를 모두 소모하는 것은 아니다. 2차선 산길을 굽이 돌아 알지 못하는 4차선 고속화 도로를 타더니 어느새 더 깊은 산길로 인도했다. 통행료가 필요한 8차선 도로에 들어설 때는 동쪽 하늘 산꼭대기 한 뼘 위에 잘 닦은 주홍색 쟁반 같은 해가 빛날 찰나였지만, 안개는 사그라지지 않았다. 도심을 피해 달아나는 듯 내비게이션은 이내 2차선 시골길의 휜 척추를 따라 달렸다. 낯선 아침 풍경을 걷어가며 살아있는 육신 한 개가 가속 페달을 밟았다.
내비게이션은 차가 과속 방지턱을 타고 날아가지 못하도록 꼼꼼하게 위치를 체크해 주었고 구간 단속 시에는 평균 속도를 표시하는 친절을 발휘했다. 수십 개의 속도위반 단속 카메라를 지날 때마다 똑같은 말을 여러 번 청취하는 것은 어머니의 무한 반복 잔소리 같았다. 땅에 묻힐 때만큼 서늘하지는 않은 것이다. 창문을 타고 넘어오는 서늘한 아침 공기 때문에 옷깃을 여미지는 않았다.
휴게소에서 담배 한 대 피우고 길을 서둘렀다. 양복쟁이일 때는 더없이 편했었던 옷과 구두가 이제는 꽉 죄는 수의를 몸에 두른 것처럼 어색했다. 다시 올라선 고속도로를 질주하다 미끄러져 내리면 도착지 근처였다. 주차장으로 들어가는 마지막 길 찾기에서 어제와 같은 실수를 저지르고 애꿎은 동네를 한 바퀴 돈 다음 내비게이션에도 안식을 주었다. 죽은 자의 처소를 향해 멀리 돌아왔어도 아직 커피 한 모금 마실 여유가 있었다. 다행히 작은아버지 입관식에는 늦지 않았다.

와이셔츠 주머니에 담뱃갑을 넣고 빼고 하다가 묵주를 발견했다. 언제부터 와이셔츠에서 기도 모드로 잠들어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장례식 중에 묵주를 발견한 게 우연일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나는 기어가 잘 물려 돌아가는, 복잡하고 섬세하지만, 가늠하지 못할 만큼 커다란 기계의 작은 나사가 아닐까. 냉담은 그만하라는 관용의 표식이 아닐까.
아내에게 자초지종을 얘기했다.

작은아버지 장례식장 간다고 했더니 엄마가 넣어 놓으라고 해서 그렇게 한거야.

어쩐지 우연치고는 너무 그럴싸했다. 엄마 말 잘 듣는 딸이다. 장모님은 우리를 포함한 처가댁 가족사를 줄줄이 꿰고 있는 주치 점쟁이를 정기적으로 방문하시며 가족의 안녕을 위해 전국의 유명 사찰을 찾아 꾸준히 기도드리시는 독실한 불교도이다.
염주를 묵주로 잘못 알아들었나... 가끔 비틀거리는 걸 보면 아내의 반고리관 근처에는 듣고 싶은 것만 선택 가공하는 특수 기관이 장착된 건 아닐까... 싶을 때가 있다. 그것이 아니라면 우리 부부에게도 시간의 흔적이 차곡차곡 쌓이는 것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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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비게이션이 편리한 반면에 인간의 능력을 퇴화킨다는 생각을 자주 하곤 해요~^^

핸드폰도 그렇죠.. 전화번호와 길찾는 일이 이렇게 편리해질 줄은....

염주와 묵주... 보통 종교에 무관심하면 잘 모를거같아요ㅎ
디클릭 가즈아~!

묵주는 잘 모르는 분들이 계시죠..
디클릭은 보이는대로 눌러야죠..ㅎㅎ

시간의 흔적이라는 표현이 좋습니다.ㅎㅎ
dcli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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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도 하시네요.. 소중한 것은 가까이 있다!! 조금 서툴러도 돼!!...
디클릭 화이팅...

염주와 묵주 착각해서 생긴 에피소드네요 ㅎㅎ
디클릭 ^^

디클릭은 열심히 눌러야 합니다..ㅎㅎ

네비게이션한테 휴식을 준다는 구절이
확 와 닿네요.
정말 고맙거든요

그거 없으면 길 찾는데 바보됩니다..ㅎㅎ

편리하긴 한데 그리 좋은것도 아닌듯해요~~^^
디클릭은 보는대로 꾹 ㅋㅋ

디클릭은 꼭 품앗이 하는거 같아요..ㅎㅎ

지도 보는 건 어려워요. 내비도..

간혹 내비 보다가 딴 길로 새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게 고속도로면 환장합니다..ㅎㅎ

염주는 불교에서 묵주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거 아녀요? ㅋ

염주는 불교, 묵주는 가톨릭이에요..ㅎㅎ

소설을 연재하시나요? 글의 시작이 범상치 않습니다.

소설은 아니구요.. 너무 남일처럼 썼나봐요..
엊그제 일이었거든요..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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